속속 밝혀지는 진관사 태극기의 비밀…90년 만에 드러난 불교계 항일운동

송화선 기자

입력 2019-02-28 14:15:00 수정 2019-02-28 1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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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산중 작은 전각에 감춰져 있던 독립운동의 흔적
● 일장기 위에 푸른색 덧칠해 만든 100년 전 태극기
● 모진 고문 속에서도 독립 의지 꺾지 않은 승려 백초월
● 신상완, 박수남 등 더 기억할 항일지사들


진관사 주지 계호스님이 항일 역사가 담긴 태극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박해윤 기자]
태극기 왼쪽 상단에 불에 탄 흔적이 보였다. 군데군데 손상된 부분도 있었다. 빛바랜 광목천에선 세월이 느껴졌다. 그러나 청홍 태극 문양과 4괘에서 여전히 힘찬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 태극기를 본 첫인상이다.

이 태극기는 2009년 5월 27일 아침, 진관사 칠성각 해체·복원 공사 도중 발견됐다. 벽을 뜯던 인부가 불단과 기둥 사이에서 한지로 겹겹이 싼 작은 보퉁이를 발견했다. 풀어보니 낡은 태극기와 3·1운동 관련 문건이 들어 있었다. 대체 누가, 언제, 왜 이것들을 사찰 안에 숨긴 것인지 당시 많은 이가 관심을 가졌다. 지난 10년 사이 무엇이 밝혀졌을까.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얘기를 듣고자 진관사를 찾았다. 진관사 주지 계호스님은 “이 태극기에 담긴 사연을 이해하고 온전히 보전하는 게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해 지난 10년간 최선을 다했다”며 입을 열었다.


죽온 줄 알앗던 우리 太極旗
태극기 안에 싸여 있던 일제강점기 신문 자료 발굴 모습. [진관사 제공]

먼저 태극기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날 이야기부터 나눴다. 진관사 총무 법해스님은 지금도 10년 전 그날을 선명히 기억했다.


“따뜻한 봄날이었어요. 아침 9시쯤 여기 마루에 앉아 있는데 인부들이 ‘스님, 칠성각에서 뭐가 나왔어요’ 하며 요만한 뭉치를 갖다주더군요. 칠성각은 1907년 건축돼 당시 많이 낡은 상태였습니다. 6·25 때 폭격을 맞은 영향으로 약간 기울어 있기도 했고요. 공사를 시작하며 현장 분들께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이니까 작업 도중 동전 하나가 나와도 꼭 알려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싶어 조심스레 종이를 벗기자 천보자기 같은 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로 언뜻 태극 문양이 보였다. 법해스님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북받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바로 계호스님에게 연락해 여러 스님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시 천천히 꾸러미를 풀어가자 물건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극 문양 천보자기’처럼 보인 것은 펼치고 보니 불에 타고 군데군데 해진 흔적이 남아 있는, 가로 89cm 세로 70cm 크기 태극기였다. 그 안에는 예스러운 종이 인쇄물 10여 부가 고이 접힌 채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독립신문’인 걸 확인한 순간 스님들 사이에는 작은 탄성이 일었다. 발행일이 1919년 11월 27일인 신문 1면에 ‘태극기’라는 제목의 시(詩)가 실려 있었다.

“三角山(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태극기)를/네가 보앗나냐 죽온 줄 알앗던/우리 太極旗(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앗네/自由(자유)의 바람에 太極旗(태극기) 날니네/二千萬 同胞(이천만동포)야 萬歲(만세)를 불러라/다시 산 太極旗(태극기)를 爲(위)해 萬歲萬歲(만세만세)/다시 산 大韓國(대한국).”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던 법해스님이 갑자기 시 구절을 줄줄 암송했다. 수없이 읽다 보니 저절로 외우게 됐다고 했다. 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뛰게 만든다는 이 시는, 10년 전 그날 아침에도 스님들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예사롭지 않은 자료임을 직감한 계호스님은 즉시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에게 연락했다. 서울시 문화재위원장 등을 지낸 문 교수는 ‘삼각산 진관사의 역사와 문화’ 등을 펴낸 인연으로 스님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곧바로 달려온 문 교수가 응급 자료보존 조치를 한 뒤 각계 전문가의 연구·분석이 시작됐다.

태극기 보따리 속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외에도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하이에서 펴낸 신문 ‘신대한(新大韓)’, 국내에서 발행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이름만 전해질 뿐 실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불교계 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등 귀한 사료가 가득 들어 있었다.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를 준엄하게 꾸짖는 경고문도 있었다. 신문 및 문건 발행 시기는 모두 3·1운동 이후부터 그해 겨울 사이로 확인됐다. 그러나 마치 인쇄기에서 갓 찍어낸 듯 보일 정도로 보관 상태가 좋았다.

계호스님은 “일제 탄압이 거세던 시절이라 당시 생산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많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산중 사찰 작은 전각에서 90년 전 인쇄물이 쏟아져 나와 많은 분이 놀라워했다”고 밝혔다. 또 “진관사는 6·25 때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탔다. 칠성각 등 전각 3개만 화마를 피했는데, 어떻게 이 자료가 칠성각 안에 보관돼 현세에 전달됐는지 신비하고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밝혔다.

학자들 또한 흥분했다. 김주현 경북대 국문과 교수는 논문 ‘신채호의 신대한 발행과 독립운동’에서 “그전까지 ‘신대한’은 일본외무성 사료관에 1, 17, 18호가 보관돼 있는 게 전부였다”며 “진관사에서 2, 3호가 나온 것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밝혔다. 법해스님은 “당시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이 ‘신대한’을 보고 그 앞에서 큰절을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 신문만 갖고도 논문 수십 편을 쓸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자료”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값진 유물을 감싸고 있던 태극기 또한 특별했다. 계호스님은 “이 태극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일장기 적색 부분에 청색을 덧칠해 태극 문양을 만들었다는 점”이라며 “독립 의지를 더욱 굳게 세우려고 굳이 일장기를 가져다 태극기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뜻과 기개를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하다”고 했다.


일장기 위에 태극 덧그린 기개
2009년 5월 서울 은평구 진관사 칠성각에서 발견된 ‘신대한’ 지면. ‘독립운동의 제1일’이라는 제목 아래 3·1운동 당시 사진이 게재돼 있다. 원본이 아닌 영인본이다. [동아DB]

전문가들은 이 태극기가 3·1운동을 전후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판단한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3·1운동 현장에서 사용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한 교수가 쓴 ‘진관사 태극기의 형태와 그 역사적 의의’라는 제목의 논문 일부다.

“태극기의 건(乾) 부분이 불에 타 있고 다른 부분도 구멍이 생길 정도로 손상됐다. 또 일장기에 청색을 덧칠해서 만들었다. 이에 비춰볼 때 국내에서 제작돼 3·1운동 당시 현장에서 사용되다가 손상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진관사 태극기의 4괘 위치는 현재 태극기와 다소 다르다. 건(乾)과 곤(坤)은 같은 자리에 있지만, 리(離)와 감(坎)은 서로 바뀌었다. 한 교수는 이것이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에 따른 4괘 위치라고 설명했다. 이에 비춰보면 진관사 태극기가 임시정부 혹은 그 관련 단체 등에서 제작, 사용하던 것으로, 독립신문 등과 함께 국내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의 제작 목적 등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1919년 무렵 만들어진 태극기 중 현존하는 것이 몇 점 안 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 태극기는 그 자체만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당시엔 구하기도 힘들었을 ‘위험 문건’을 한데 모으고, 항일의 염원을 담은 태극기에 꽁꽁 싸매 진관사 칠성각에 감춘 걸까. 사찰에서 발견된 자료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될수록, 이 비밀을 풀기 위한 스님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법해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 신대한 등을 구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그것도 여러 사람 손에 손을 거쳐 전달된 손때 묻은 신문이 아니라 막 인쇄기에서 뽑아낸 듯 정갈한 첫 신문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죠.”

그 사람은 불교계 사정에도 밝았을 게 분명했다. 깊은 산중에 있는 진관사는 일제강점기 일반인이 쉽게 찾기 어려운 장소였다. 칠성각은 그 안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작은 전각이다. 바로 그 장소를 택해 불단과 기둥 사이 벽을 뜯어내고 자료를 숨긴 이는 진관사를 훤히 아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법해스님은 “사찰 전각에는 원래 도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진관사 안에서도 칠성각 벽에만 도배가 돼 있었다. 태극기가 나온 뒤 그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누군가 칠성각 벽을 뜯어 태극기를 보관한 뒤 그 흔적을 감추고자 도배지를 붙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런 조치까지 할 수 있으려면 진관사 안에서도 영향력 있는 스님일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일제강점기 진관사 승려 가운데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다. 계호스님은 “진관사는 1011년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내용이 정리돼 있지만 당시까지 항일운동 관련 사항은 전해진 게 없었다”고 밝혔다.

계호스님이 이 의문을 풀고자 도움을 청한 사람은 불교계 항일운동사 전문가인 김광식 동국대 교수였다. 김 교수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한용운 스님, 백용성 스님 등에 대해 연구해온 관련 분야 권위자였다. 그는 진관사 연락을 받고 곧장 초월스님(1878~1944)을 언급했다. “한용운·백용성 스님이 3·1운동 여파로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된 이후 초월스님이 불교계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했다. 그분이 1920~1930년대 진관사에 머물렀으니, 만약 누군가 진관사에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숨겼다면, 그 주인공은 초월스님일 것”이라고 알렸다.


역사에 묻힌 이름, 초월스님

일제 형무소에 수감될 당시 백초월 스님. [진관사 제공]
알고 보니 초월스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혐의로 수차례 옥고를 치른 항일지사였다. 1891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했고, 3·1운동 직후 상경해 진관사 등을 근거지로 항일운동을 펼친 기록이 있었다. 독립군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앞장서다 청주교도소에서 1944년 순국했다. 김 교수가 이 내용 등에 대해 관련 사료를 추적, 연구하고 있었으나 그 내용이 불교계 내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스님들은 초월스님의 행적과 진관사 태극기 사이의 관련성을 알아내고자 김 교수와 함께 나서기로 했다. 2009년 8월의 일이다. 초월스님이 세상을 떠나고 60여 년이 흐른 뒤였지만, 생전의 그를 기억하는 이가 아직 남아 있었다. 법해스님은 “유년기를 진관사에서 보낸 노스님이 계셨다. 금봉스님이라고, 1919년 태어나 어린 시절 진관사로 출가한 분이다. 그분께 연락드리니 바로 ‘초월스님을 잘 안다’며 반가워하셨다. 진관사에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발견됐다는 말씀을 듣고도 ‘초월스님이 숨기신 게 틀림없다’고 하시더라”고 전했다.

계호스님, 법해스님은 곧장 김 교수 등과 함께 금봉스님이 몸담고 있던 경기 남양주시 범륜사를 찾았다. 진관사에서 나온 태극기 사진을 액자에 담아 들고 갔다. 태극기를 보자마자 금봉스님은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세 번 절을 올렸다고 한다.

“금봉스님 기억 속에 ‘항일운동가 백초월’에 대한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었던 거죠. 그분이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시던 것, 일제 감시를 피하려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던 것, 그러면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북돋우는 말씀을 하시던 것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어요. 하루는 초월스님과 함께 진관사 경내를 걷는데 초월스님이 대웅전 뒤 북한산(삼각산) 응봉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대요. ‘삼각산이 조선이면 왜놈은 달걀이야. 달걀로 삼각산을 아무리 쳐도 삼각산은 끄떡없지’라고요. 그 간절한 마음으로 숨겨두신 태극기를 우리가 이제야 찾았다며, 금봉스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진관사 스님들은 이런 증언을 채록하며 초월스님의 행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김 교수가 축적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초월스님의 항일정신을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도 병행했다. 많은 사람이 알지 못했을 뿐, 일제강점기 비밀수사기록 등 사료 곳곳에 초월스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김 교수가 찾아낸 1919년 12월 5일자 일제 문서 ‘독립운동자금모집자 검거의 건’ 내용은 이렇다.

“백초월은 승려로 있는 몸임에도 항상 불온사상을 품고 국권회복을 몽상하여 은근히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던 중 금년 봄 소요발발한 이래 (중략) 금년 4월 경성에 들어와 시내 각처에 숨어 있으면서 우선 불온문서를 간행하여 인심을 교란시킬 계획으로 한국민단본부라는 단체를 경성 중앙학림 내에 설치하여 스스로 민단 부장이 되어 자금과 부원 모집에 분주(후략).”

초월스님이 3·1운동 직후부터 일제가 감시하는 항일운동가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천재스님의 항일운동

불교계 기록에 따르면 초월스님은 불과 28세 때인 1903년, 영원사 조실(祖室·사찰 최고 어른) 자리에 오를 만큼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승려였다. 1915년 불교계 고등교육기관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이 문을 열자 초대 강사로 내정될 만큼 학식이 높았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산문을 나와 항일독립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일제 기록에는 그가 “3·1운동이 발발했는데도 불교계 독립운동이 미약한 사실을 개탄했다”는 내용이 있다. 한용운·백용성 스님이 서대문형무소에 체포돼 있는 상태에서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초월스님은 곧 불교계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군자금 모금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매일신보’ 1919년 11월 5일자 기사 중 초월스님에 대한 내용이다.

“본년 4월 중에 서울에 와서 시내 각지를 다니며 숙박을 하고 혁신공보라는 불온문서를 발행하고 또 상해 가정부와 OOO독립군에 청년을 보내 독립운동을 한다 하고 의연금이라고 다액의 금전을 모집하고 (중략) 10월 22일 본정 경찰서에서 잡아 취조중인데 동인(同人, 초월스님)은 운동비로 베개 속에 오백 원을 감추어 두었더라.”

1920년 5월 5일 체포된 또 다른 항일 승려 신상완에 대한 일제 첩보 문건에도 초월스님 활동상이 기록돼 있다.

“신상완은 백초월로부터 1919년 7월경 2000원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리고 동년 8월, 서울로 귀국하여서도 백초월에게 운동 자금 300원을 인수했다.”

전문가들은 초월스님이 이처럼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 교류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진관사에서 발견된 독립신문 신대한 등 3·1운동 관련 자료는 그에게서 유래한 것일 개연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계호스님은 “당시 진관사는 마포에 포교당을 두고 있었다. 이곳은 마포나루 가까이라 국내외 이동이 편하던 곳으로, 초월스님은 삼각산 진관사와 마포 진관사 포교당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승려 신분을 활용해 법회 등으로 가장한 군자금 모금 행사를 열고, 청년 불자들을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 등에 파견한 기록도 남아 있다”고 밝혔다.

결국 초월스님은 1919년 12월 일제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는다. 이후 그의 행적은 일본에서 발견된다. 3·1운동 1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만세시위를 조직하려다 도쿄에서 붙들려 1920년 3월 9일 국내 압송됐다는 기록이다. 초월스님은 그로부터 채 두 달이 지나기 전, 또 한 번 독립운동 혐의로 일제에 검거된 것으로 밝혀졌다. 김 교수는 “초월스님이 진관사에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을 감춘 것은 바로 이 무렵, 항일 활동과 체포가 반복되던 긴박한 상황에서였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가 쓴 글 ‘백초월, 그는 누구인가’의 관련 대목이다.

“진관사에서 발견된 다수의 자료는 백초월이 3·1운동 1주년 기념으로 일본에 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를 떠나던 1920년 2월 말경에 비장(秘藏)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초월이 일본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1920년 3월 9일 직후나 재체포된 5월 6일 직후, 백초월이 일제에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된 진관사 승려가 긴박한 순간에 숨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짧은 기간 안에 반복된 체포와 구금은 초월스님의 몸과 마음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김 교수는 “이후 한동안 초월스님에 대해 ‘반병신이 됐다’ ‘미치광이가 됐다’는 구전이 있다”고 밝혔다. 이 시절 초월스님이 일제 감시를 피하고자 일부러 미친 사람 행세를 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가 이후 불교계 강백(講伯)으로 명성을 얻은 것을 봐도 그 내막을 짐작할 수 있다. 1935년 3월 ‘불교시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봉원사에서는 금춘(今春)부터 강당을 여러서 (중략) 백초월 선사를 초빙하야 강사로 취임케 하얏다더라.”

이 시절 봉원사에서 초월스님 강의를 들었던 송암스님은 1999년 ‘현대불교’와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불교 3대 강사의 한 분으로 훌륭한 분이었어요. (중략) 초월스님 머리에는 일본 경찰에게 전기찜질을 당해 생긴 큰 흠 자국이 있었어요. 고문후유증으로 늘 머리가 아파 두 손이 머리에 올라가 있고 여름에는 모기가 새카맣게 붙어도 그걸 느끼지 못해요. 그런데 공부는 아주 잘 가르쳤고 머리가 비상하게 좋았어요. 스님에게 서장까지 배웠는데 내가 막히면 당신이 줄줄 외우며 설명해주셨지요.”


“잊힌 항일지사의 혼 기억해야”

초월스님은 한동안 이처럼 전국 각지 사찰에서 강의를 이어가며 일제 감시망을 피했다. 승려들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해 꾸준히 항일 활동을 펼쳤지만, 검거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체포된 건 1939년의 일이다. 김 교수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공개된 ‘일제경성지방법원 편철자료’ 중 1940년 5월 4일자 공문을 분석한 내용이다.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일심교 검거에 관한 건/ 백초월을 비롯한 일심회는 지나사변(중일전쟁) 발발을 보면서 용산역에서 다수의 군용열차가 준비되고 조선인 특별지원병이 출정할 것을 예상, 조선운송주식회사 용산영업소 임시 인부로 취업 중인 박수남에게 밀명을 내려 동(同) 군용열차 내에 백묵으로 ‘조선독립만세’ 등의 불온낙서를 쓰게 했다.”

1939년 10월 초월스님은 박수남과 함께 일제에 붙들렸다. 70명 이상이 검거된 대형 시국사건이었다. 애국동지회가 1956년 간행한 ‘한국독립사’에도 이 사건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선승(禪僧) 백초월은 3·1운동 후 임시정부를 위하여 금품을 모집하다가 왜적(倭敵)에 가진 고문을 당하여 반광(半狂) 상태의 폐인이 되어 경성 마포의 어느 포교당에 있었다. 그 교당의 문간방을 빌어 있는 박수남이 (중략) 4272년 기묘(己卯, 1939년)에 봉천행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낙서를 하였던 것이 발각되어 수금(囚禁)되었는데 그 애국사상이 백초월에게서 감수(感受)되었다는 혐의로 구금되어 많은 악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수감생활을 한 뒤 1943년 풀려난 초월스님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다 다시 체포, 이듬해 6월 청주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법해스님은 “초월스님의 행적을 좇아 청주교도소에 간 일이 있다. 스님은 그곳 공동묘지에 매장됐다가 어딘가로 이장됐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빈터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면서 ‘이제야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다. 진관사 태극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엄혹한 시절,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치열하게 살았던 스님을 영영 모르고 지냈겠구나 생각하니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여러 연구에도 초월스님 또는 다른 누군가가 진관사에 태극기를 숨겼음을 보여주는 직접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앞으로도 영영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진관사 태극기 덕분에 초월스님의 항일운동이 뒤늦게 재조명됐고, 김 교수는 2014년 초월스님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책 ‘백초월’을 펴냈다. 초월스님은 그해 6월 순국 70년 만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신상완, 박수남 등 그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의 이름 또한 늦게나마 대중에게 알려졌다. 계호스님은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항일지사가 더 많을 것”이라며 “진관사 태극기가 90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 곁에 온 건 그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태극기에 담긴 정신을 기억하며 후대에 전할 수 있도록 애쓰겠다”고 밝혔다.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19년 3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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