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오수길 고려사이버대 교수 / 공론장의 의미

동아일보

입력 2019-02-21 08:00 수정 2019-02-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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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길 고려사이버대학교 창의공학부 교수

통상적으로 30문항 정도의 설문 조사에 응하면 몇 분이나 소요될까? 대부분의 설문 조사지에서는 10분 내지 20분 정도가 걸리는 것으로 제시하면서 설문에 응할 것을 요청한다. 그렇다면 한 문항 당 20초 내지 40초의 생각으로 답변을 하게 되는 것이다. 30개 문항의 설문 조사가 아니라 특정한 쟁점에 대한 의견을 집중적으로 묻는 두세 개 문항의 전화 설문이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선거라고 예외는 아니다. 많은 유권자가 인물이며 정당이며 공약을 모두 고려한다고 답변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여러 요건을 고려하는 것 같지 않다. 다른 정당의 정강‧정책과 제대로 비교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후보가 어떤 경로를 걸어왔는지 제대로 눈여겨보지 않는다. 지난 민선 7기 서울시장 후보 10명을 소개하는 홍보물에는 층간소음 갈등의 가해자였던 범죄사실이 명시되어 있는 후보도 있었지만, 이를 알고 있는 유권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알고도 표를 줬다면 층간소음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폭력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2017년 7월 24일부터 10월 20일까지 ‘한국형 숙의 민주주의’를 향한 첫 번째 시도였다는 평을 받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시민참여형조사’가 실시된 바 있다. 공론조사가 거론될 때 비판이 많았다. 이렇게 전문적인 안건을 일반 시민이 도대체 어떤 지식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였다. 기존의 설문 조사를 떠올려 보면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전문성과 이해관계가 전적으로 독립적일까 하는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그간 전문가의 논의는 어떠했는지도 따져보자.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 영역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역에 대한 소신을 강조하면서 그 이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루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원자력 발전과 같은 분야는 특히 전문적인 영역이다. 그렇기에 전문가의 토론회에서 쟁점이 쉽게 좁혀지기 어렵다. 원자력 에너지 전문가는 원자력발전이 깨끗한 에너지임을 주로 강조한다. 환경단체 전문가는 궁극적으로 환경에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비용도 훨씬 많이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198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제임스 피시킨 교수가 처음 제안한 공론조사는 단편적인 정보나 인식에 기초한 여론조사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참여자가 다양한 정보를 제공받아 쟁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합리적인 판단에 이를 수 있다는 가정이며,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론적 근거를 갖고 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시민참여형조사는 이런 논거를 실제 적용해 본 사례이다.

공론조사는 20,006명에 대한 1차 설문 조사로 시작되었다. 1차 조사에서 표출된 의견을 바탕으로 성별, 연령별, 지역별 3차원 층화로 무작위추출하여 500명의 시민참여단을 구성하였고, 결국 4차 조사까지 471명이 참여했다. 시민참여단이 활동한 기간은 89일, 회의와 간담회로 논의를 이어간 것이 67회, 최종 2박 3일간의 종합토론회와 최종조사 참여율 98.5%. 시민참여단이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학습, 의견 청취, 질의와 응답, 토의에 들인 시간은 1인당 평균 2,187시간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론화위원회는 일시중단 중인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원자력발전 축소 방향으로 에너지정책을 추진, 보완조치에 대한 세부실행계획 마련 등의 정책권고에 이를 수 있었다. 찬반 양쪽 모두 아쉬움이 있을 수 있지만, 찬성과 반대 의견, 주장, 증거 등을 충분히 검토하면서 시민참여단의 참여자들은 자신의 생활세계에 비춰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탈원전’ 정책에 대한 갑론을박이 진행 중이다. 원전 정책과는 별개로 대안에너지 기술에도 박차를 가하는 선진국에 비춰 볼 때 원자력발전소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은 다소 근시안적인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역사적인 함의도 있는 공론조사 이후 정부의 공론화 과정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시민의 목소리에 답이 있음을 인식했다면, 일회적인 공론조사로 끝나지 않도록 공론화 과정이 지속적으로 있어야 했다. 보완조치에 대한 세부실행계획은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에너지정책 전환의 공론화가 시민의 일상생활에까지 일관되게 진행되어야 한다. 국가와 지방 차원의 에너지기본계획 수립과 논의가 중심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오수길 고려사이버대학교 창의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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