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장애인 편의점’으로 일자리 실험

김용석 기자

입력 2018-03-28 03:00 수정 2018-03-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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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회사 옮기면 축하해주는 ‘이상한 사장님’
‘베어베터’ 김정호 대표


김정호 베어베터 대표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사무실에서 회사 마스코트인 ‘베베’ 곰 인형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999년 네이버 창업, 2004년 한게임 대표, 2009년 한국게임산업협회 회장, 2009년부터 에인절 투자자로 카카오와 블루홀 등에 초기 투자, 2012년 발달장애인 사회적 기업 베어베터 창업….

남다른 이력을 가진 김정호 베어베터 대표(51)는 요즘 편의점 점주로 변신을 준비 중이다. 휴게음식점 위생교육을 받고 보건증을 받는 모습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다음 달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근처에 편의점을 열 계획이다.

24일 서울 성동구 베어베터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는 “편의점을 열어 자폐성 장애나 지적장애 등 발달장애인의 일자리 만들기에 도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인 편의점과 발달장애인을 조합한 일자리를 구상하고 있다. 무인 편의점이 도입돼 계산대에서 손님을 응대하는 일이 사라진다면 남는 일은 편의점 물건을 채우고, 진열대를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이다.

“발달장애인들은 반복적인 일을 정확히 하는 것을 좋아하고, 비장애인보다 높은 업무 완성도를 보입니다. 예컨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조를 이뤄 여러 무인 편의점의 매대 정리를 하는 거죠. 먼저 편의점 두 곳 정도를 열어 발달장애인들이 그 일을 잘해낼 수 있는지 실험을 해보려 합니다. 데이터가 쌓이면 편의점 본사에 발달장애인을 채용해 무인점포를 관리하는 자회사 설립을 제안할 생각입니다.”

김 대표는 2012년 네이버(NHN) 인사담당 임원 출신인 이진희 대표와 함께 베어베터를 창업한 이후 기업 경영 경험을 살려 발달장애인 일자리 만들기에 나섰다. 연계 고용 제도를 활용해 사업모델을 만들었다.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은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직접 채용해야 한다. 이를 못 하는 기업은 부담금을 내야 하는데 베어베터와 같은 장애인 기업의 서비스나 제품을 구입한 만큼 이를 면제받는 게 연계 고용 제도다.

베어베터는 이 제도를 이용해 300여 곳 기업에 명함 인쇄, 커피점 운영, 쿠키와 빵 등을 제공한다. 기업은 과태료 면제만큼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베어베터는 일자리를 만든다. 2012년 창업한 베어베터는 2년 만인 2014년부터 당기 순이익을 올리기 시작했고, 지난해 말까지 중증 발달장애인 사원을 전체 직원의 85%인 197명까지 늘렸다. 고객 만족도도 80∼90%에 이른다.

베어베터를 통해 발달장애인에게 일을 맡겨도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기업들은 직접 채용으로 전환하고 있다. 최근 삼정회계법인이 발달장애인 13명을 채용해 사내 카페 운영과 인쇄 업무를 맡는 자회사를 세웠고, 카카오도 30명 규모의 자회사를 설립할 예정이다. 대웅제약과 그랜드힐튼호텔도 베어베터의 도움으로 직접 고용을 한다. 베어베터는 이 과정에서 장애인 고용에 대한 컨설팅을 제공하고 이직할 인력도 보내준다.

베어베터는 여느 회사와 달리 이렇게 새로 생기는 기업에 이직하는 직원이 생길 때마다 축하하는 분위기다. 김 대표는 “기업들이 발달장애인도 일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돼 직접 고용에 나서고, 결국 베어베터처럼 연계 고용을 하는 회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며 “편의점 일자리 실험에 나선 것도 이런 이유”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1999년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 등과 함께 네이버를 창업했다. 삼성 입사 후 9년 동안 아끼고 아껴 돈을 모았는데 하계동 아파트 전세금도 마련하기 어려운 걸 보고 창업을 결심했다. 네이버에 총 1억 원을 투자한 그가 2009년 회사를 떠나며 정리한 주식은 모두 400억 원어치. 이후 에인절 투자자로 나섰다.

100억 원가량을 카카오, 퓨처스트림네트워크, 블루홀, 넵튠 등에 투자해 1000억 원 정도를 벌었다. 그는 자신의 투자 원칙에 대해 “문서는 전혀 보지 않는다. 사람을 보고 투자하되 10년 정도 오랜 기간 그 사람의 능력과 신뢰도를 평가한다”며 “투자받자마자 만족할 사람이 아니라 더 높은 목표에 욕심 낼 사람인지를 본다”고 했다.

그는 모교인 고려대에 장모 이름을 딴 장학금을 만들어 10억 원 넘게 기부했다. 후배들을 만날 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일을 많이 하라”는 말을 종종 한다. 그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 ‘노력하라’는 말을 하기 조심스럽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 자식에게 하는 말과 다른 소리를 남의 자식들에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정보기술(IT) 창업 1세대들이 무대 뒤에 숨어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선 “한국은 기업가들에게 종교인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나라”라며 “기업을 하다 보면 경쟁자를 공격하거나 여러 일이 생기게 마련이어서 그렇게 높은 도덕적 기준에 맞추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오피니언 리더로서 목소리 내기를 꺼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석 기자 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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