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는 노동 ‘넌, 줘도 못 먹니?’ 여친 말에 괴로웠다”

신동아

입력 2017-04-01 14:09 수정 2017-04-0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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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씨는 지금까지 9명의 여성들과 연애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갖는 성적 욕망이 성관계를 통해 충족되는 느낌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A씨는 이런 자기의 감정을 여자친구가 알게 되면 서로 민망할까봐 성관계에 만족하는 것처럼 연기를 해왔다.

그러다 결국 A씨는 이러한 연기에 염증을 느끼면서 섹스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런 A씨에게 여자친구가 말했다. “넌, 줘도 못 먹니?” 이 말을 듣고 A씨는 괴로웠다고 한다. 그가 친구들에게 성적 판타지가 없다는 고민을 털어놓자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았다. “게이야? 아니면 고자야? 그냥 절에 들어가 살아!”

“오늘은 아닌 것 같아”

# B씨는 얼마 전 남자친구와 강원도 강릉으로 1주년 여행을 떠났다. B씨는 이번 여행에서도 남자친구와 다툼이 일어날까 걱정이 앞섰다. 섹스에 대해 매번 남자친구와 의견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여행의 밤은 다툼으로 시작됐다.

“오빠 정말 미안한데, 오늘은 아닌 것 같아.” B씨의 말에 남자친구는 참다 폭발한 듯이 말했다. “언제까지 안 되는데? 사랑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야.” B씨는 남자친구를 사랑한다. 그러나 섹스는 하고 싶지 않다. 끈질기게 설득하는 남자친구에게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성인 A씨와 남성인 B씨는 모두 무성애자다. 이들은 자신을 무성애자로 규정한 후 “잃어버린 내면의 퍼즐 조각을 찾은 것 같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무성애자 모임을 찾았다. 네이버 카페에는 약 10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국내 유일의 ‘무성애자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이와 별개로 무성애자를 위한 오프라인 모임인 ‘무:대ACEtage’도 있다. 이 모임에선 20여 명의 무성애자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최근 서울 혜화동에서 ‘무성애자 커뮤니티’의 매니저인 케이(23) 씨를 인터뷰했다. 또한 서울 합정동 한 카페에서 열린 ‘무:대ACEtage’의 좌담회에 객원으로 참여해 M씨(25·경기도 수원·대학생), J씨(20대 초반·여·서울·대학생), P씨(24·여·경기도 고양·무직), G씨(21·경기도·조리사), D씨(25·여·인천·사회단체 간사), R씨(27·여·서울 신림동·프리랜서) 등 6명의 20대 무성애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케이 씨에 따르면, 무성애자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성적 끌림은 ‘다른 사람과의 성적 접촉을 원하는 끌림’인데, 남성이든 여성이든 무성애자는 이런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득도한 수도승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이에 대해 케이 씨는 “성적 끌림은 정적인 것이다. 개인이 가지는 성적 끌림의 정도는 고유하며 일정하다”고 말한다. 이어 케이 씨는 “이성에 대한 성적 욕구는 성적 끌림과 다르다. 무성애자는 성적 욕구를 느끼더라도 이를 굳이 육체적 접촉을 지향하는 성적 끌림으로 해결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무성애자도 애인의 요구 같은 외생적 이유로 성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과 같다고 한다.

플라토닉 사랑 vs 무성애

‘플라토닉 사랑’과 ‘무성애’는 어떻게 다를까. 모든 무성애자는 결과적으로 플라토닉 사랑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플라토닉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이 무성애자는 아니다. 이는 ‘치킨을 먹고 싶은데 더 큰 가치인 다이어트를 위해 안 먹는 사람’과 ‘치킨을 원래 싫어해서 안 먹는 사람’의 차이와 같다.

그러나 M씨는 “늘 플라토닉 사랑만을 추구하지만 스스로를 무성애자로 규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미혼여성에게 강요되는 ‘순결’과 ‘무성애’의 차이와 관련해, D씨는 “둘에 대한 탐색이 길었다. 결국 ‘나는 성행위를 통해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G씨에 따르면, 여성 무성애자에 비해 남성 무성애자는 자신의 무성애 속성을 안 뒤 더 당황하는 편이라고 한다. 주변에 이야기하면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는다. 허지웅은 최근 모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무성애자라는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 이에 대해 J씨는 “허지웅이 미디어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100% 드러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일 뿐이며 TV에 비친 모습만으로 무성애자인지 여부를 판가름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오히려 대화에 참여한 무성애자들은 허지웅이 무성애자의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부분이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케이 씨는 “무성애자는 짧게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인데 미디어는 함축적이고 자극적인 단어를 좋아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양은오 대표도 “미디어에서 무성애자는 시청자가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그려진다”고 했다.

J씨는 “최근 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고 같은 무성애자들끼리 이를 공유하는 움직임이 활기를 띠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은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무성애자 커뮤니티’에 무성애자는 처녀일 것이라는 판타지를 가진 사람이 들어와 소동을 일으켰다. D씨는 “이런 사람을 피하고자 우리는 폐쇄적인 모임을 유지한다. 사실 우리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무성애자 커뮤니티에 대한 조회 수가 급증했다고 한다. 케이 씨는 “사람들이 무성애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때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하는지는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D씨는 “우리를 보면서 자신도 무성애자임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SNS를 통해 우리에게 ‘이제 내가 누군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무성애자 모임 회원들은 무성애를 상징하는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부럽다”

그러나 우리와 대화한 무성애자들 중 몇몇은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직장 동료나 친구, 가족에게 밝히는 건 여전히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이런 커밍아웃에 대해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연민하거나, 질병으로 취급하거나, 믿으려하지 않는 반응을 보일까 두렵기 때문이다. P씨는 얼마 전 친구들에게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밝혔다고 한다. P씨가 전하는 P씨 친구의 반응은 이랬다. “네가 무성애자야? 부럽다. 성관계를 하기 위해 쏟을 에너지를 다른 일에 쓸 수 있으니까.”

“사랑하니까 내 코를 핥아줘”

D씨는 “남자친구에게 무성애자임을 고백했더니 그는 ‘너 나랑 잤잖아? 그런데 왜 무성애자야?’라고 묻더라. 한 레즈비언 친구는 ‘나랑 자보는 건 어때?’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어 D씨는 “한 친구는 내 말을 듣더니 ‘그런 감정을 모르는 네가 너무 불쌍하다’고 울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케이 씨는 “무성애자라고 말하면 보통 ‘성적으로 안 끌려? 예전의 안 좋은 기억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있는 것 아냐?’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이런 반응도 무성애자에 대한 넓은 의미의 혐오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무성애자 모임 회원들이 말하는, 무성애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무성애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은 무성애자에 대해 ‘현자’ ‘보살’ ‘로봇’ ‘바싹 마른 볏짚’ ‘냉담’ ‘무기력’ 같은 이미지를 가진다.

그러나 무성애자들은 “우리는 ‘섹스 없는 사랑’에 빠진다”고 말한다. 세계 최대 무성애자 모임인 에이븐(AVEN)도 “무성애자는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단지 그 사랑에 섹스가 동반되지 않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많은 무성애자는 누군가와 긴밀하게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감정을 경험한다. 다만, 실제로 사랑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들도 있다. ‘사랑에는 섹스가 뒤따른다’는 ‘연애 정상성’의 관점에선 무성애자의 공식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무성애자의 공식은 ‘연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연애를 하되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 ‘성행위는 어떠한 육체적·정신적 쾌락도 주지 않는 무의미한 노동이다’로 집약될 수 있다. 무:대 회원 6명은 ‘연애 정상성’에 대한 조용히 탄식했다.

J씨는 “초등학교 때 진실게임을 했는데 ‘너 누구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너 첫사랑 누구야?’라는 질문을 받았다.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끌려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P씨도 “친해지고 싶은 정도를 넘어선 두근거림이나 끌림을 한번도 느끼지 않았다”고 했다.

남자친구를 사귄 D씨는 “남자친구의 성관계 요구는 ‘우리는 서로 사랑하니까 내 코를 핥아줘’라는 의미로 들린다. 굳이 힘들게 왜 하나 싶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R씨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첫 성관계는 사랑을 핑계로 한 합의로 이뤄졌다. ‘사랑하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점 ‘사랑해도 성관계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받아주고 싶은 스킨십은 뽀뽀, 더 가봤자 키스정도였다. ‘왜 그 많은 시간과 힘을 소모하면서 성관계를 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그러나 안 하면 싸우게 되니까, 더럽고 치사해서 ‘그냥 합시다’ 식으로 한 거다. 이럴 때 연애에 염증을 많이 느꼈다.”

M씨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성관계를 한다’는 건 사실 당연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니까 저희는 상처 받는다”고 말했다. R씨는 “성행위에 대한 내 의사를 존중해주는 상대를 만났다. 몇 달이 지나도 전혀 욕구가 발생하지 않았다. 성행위는 ‘안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과 같다. 배고프면 집에 가서 혼자 시리얼 먹으면 된다. 굳이 식성에도 안 맞는 순댓국을 함께 먹을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이들은 “무성애자가 아닌 사람들과 논쟁하거나 이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어서 하지 않는다. 이들이 내뱉는 불감증, 발기부전 같은 말에 상처를 받는다”고 말한다.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미디어글쓰기’ 강의 수강생들이 작성했습니다.

[신동아 4월호] 김해인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정민주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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