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양말’을 던져라”

동아일보

입력 2014-05-31 03:00 수정 2014-05-3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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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들 사이에 알록달록 ‘야한 양말’ 확산… 왜?

5월 10일 서울시내의 한 한정식집. 스승의 날을 앞두고 S대 경영대 김모 교수(59)의 사은회에 모인 제자들은 놀랐다. 평소 칙칙한 양복만 입던 김 교수가 신발을 벗고 방 안에 들어오니 알록달록한 점이 박힌 양말을 신고 있었던 것. 반전이었다. 평소 근엄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교수님의 패션 센스가 좋다’며 치켜세웠다. 최근부터 화려한 양말을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김 교수는 계면쩍게 웃었다.

현대캐피탈에 다니는 황재우 과장(33)은 일명 ‘삭스홀릭(socks-holic·양말과 중독을 뜻하는 영어를 합한 신조어)’으로 통한다. 양말이 70여 켤레에 달해 주변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지어준 별명이다. 금융회사의 특성상 감색이나 회색 등 단정한 슈트를 입는 게 원칙. 이 때문에 양말은 그에게 ‘해방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봄바람이 일렁이는 기분 좋은 날에는 연분홍 양말을, 비가 와서 기분이 가라앉는 날에는 노란색 양말을 신는다. 황 과장은 “양말을 골라 신을 때마다 재미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야한 양말’이 확산되고 있다. 검은색이나 회색, 흰색 등 무채색 일색이었던 양말 색깔이 다양해지고 무늬도 과감해지고 있다. 매일 신는 양말이지만 하루하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일상을 새롭게 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데에 따른 것이다.


관심 밖 아이템, 욕망의 대상으로

한국 남자들에게 양말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1만 원에 3, 4개를 묶음으로 대충 사서 신다가 버리는, 때로는 회사에서 명절 선물용으로 받거나 아내가 사다 주면 그대로 신는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태창, 백양(BYC) 등의 로고가 그려진 양말에 이어 아디다스, 나이키 등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양말이 유행했지만 여전히 소비자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물품이었다.

하지만 2000년부터 양말에 대한 시각이 변화할 조짐이 보였다. 첫 남북 정상회담의 감동이 가시지 않았을 무렵인 2000년 6월. 신문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깔끔한 정장 아래 화려한 줄무늬 커플 양말을 신은 모습이 담긴 전면 광고가 등장했다. ‘양말부터 통일하자’는 광고 문구와 함께였다. 양말업체인 ‘싹스탑’이 만든 광고였다. 양말에 무덤덤했던 한국인들은 특유의 유머 코드에 열광하면서 양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서경희 싹스탑 영업부 과장은 “싹스탑이나 인따르시아 등 양말업체들이 TV의 황금시간대에 광고를 방영할 정도로 패션 양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패션 양말 가맹점 창업 붐까지 일었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화려한 양말은 여자들이 주로 선호했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전히 점잖은 양말을 신었다.

그러다 2007∼2008년경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대기업에서 비즈니스 캐주얼이 확산되면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또 슈트용 바지 역시 바뀌었다. 남성들이 벙벙한 슈트 대신 몸매를 드러내는 타이트한 슈트를 선호했다. 발목은 물론이고 신발까지도 덮는 긴 바지보다 발목을 드러내는 짧은 바지가 인기를 끌었다. 소위 ‘패션 좀 안다’는 남자들은 화려한 양말을 사서 신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에 맞춰 패션업체들은 톡톡 튀는 원색의 양말이나 화려한 문양의 양말 판매 비중을 늘리기 시작했고 양말 매출도 매년 가파르게 늘었다. 신세계백화점에서 패션 양말 매출 증가율(전년 대비)은 △2011년 109.8% △2012년 238.5% △2013년 221.4% 등 매년 2∼3배로 늘고 있다. 박제욱 신세계백화점 남성복 바이어는 “명품 브랜드에서 켤레당 5만 원이 넘는 양말을 사는 남자 고객이 적지 않다”며 “양말 전문업체뿐 아니라 패션업체까지도 양말 판매 비중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마트인 이마트도 양말 디자이너를 영입해 양말 판매를 강화했다. 이마트의 조사 결과 소비자가 양말을 구입할 때 고려하는 사항은 색상, 소재, 디자인, 신축성, 착용성의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마트 양말 디자이너 최현정 씨는 “싸거나 신기 편하다고 양말을 사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유니클로가 판매하는 양말의 색상은 50가지에 이르는 등 패스트패션업체들도 양말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이 운영하는 에잇세컨즈는 양말 종류를 150가지로 늘렸다. 에잇세컨즈 측은 “봄여름 시즌 패션양말의 절반가량을 이미 판매했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 양말 고를 때마다 소소한 행복”

남자들이 화려한 양말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기업 과장인 정희원 씨(34)는 “매일 아침 양말을 고를 때마다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예쁜 양말을 신으면 기분도 달라진다. 아내보다 여덟 살 많은 그는 아내 친구들이 그의 양말을 힐끗 보면서 ‘젊어 보인다’고 말하면 괜히 으쓱해진다.

“튀는 양말에 처음 도전한 날이었어요. 남들은 신경 안 쓰는데 괜히 저만 신경이 쓰여 내심 조마조마했죠. 하지만 주변에선 ‘우와’ 하며 감탄했어요. 중학교 때 누구나 탐내던 ‘에어조던’ 운동화를 신었을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했죠.”

이후 정 과장은 날씨와 기분, 바지 색깔, 신발 종류 등에 따라 매일 다른 양말을 신는다. 예컨대 발목까지 올라오는 캔버스화를 신어서 양말이 보일 듯 말 듯할 경우에는 강렬한 빨간색 체크무늬 양말을 신는다. 또 발등이 보이는 로퍼를 신을 때는 연한 파스텔 색상의 양말을 착용한다. 무수히 많은 조합이 가능하므로 내킬 때마다 양말을 산다. 구입처도 남대문시장부터 패스트패션 브랜드, 편집숍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부담 없는 가격에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가 있다”며 “로고가 크게 박힌 명품 백이나 시계를 살 때보다 훨씬 실속이 있다”고 말했다.

화려한 양말이 ‘작은 사치(small indulgence)’가 되는 셈이다. 트렌드 분석 책인 ‘좀 놀아 본 오빠들의 귀환’을 쓴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은 “화려한 양말의 인기는 최근 마카롱과 같은 고급 디저트나 디퓨저(공간에 두는 향수)가 유행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며 “불황으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뭔가 답답한 상황에 처한 남자들이 양말을 통해 일상을 잠시 벗어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영숙 한국패션업회 디자인육성팀장은 “각종 액세서리와 메이크업, 백 등으로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는 여성과 달리 남자는 자신을 꾸미는 방법이 여전히 제한적”이라며 “자기표현 욕구가 커진 남성들에게 양말은 정체성(아이덴티티)을 나타내고 자기표현의 욕구를 해소할 수단이 된다”고 말했다.


사소하지만 재미있는 ‘리추얼’

양말을 고르고 신고 정리하는 행동 자체가 행복감을 높인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국계 증권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하는 박영구 씨(31)는 양말을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예전에는 집에 오면 양말을 던져버리고 세탁 방법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양말을 벗을 때도 말리지 않게 벗고, 빨래 후 정리할 때에도 돌돌 말아 보관한다. 그는 “양말을 소중히 다루면 스스로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여러 양말들을 보면 그 양말을 신었을 때, 살 때의 기분 등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문화심리학자인 김정운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전 명지대 교수)은 남성들의 이런 행동이 행복을 찾기 위한 ‘리추얼(의식)’이라고 풀이했다. 그가 정의하는 리추얼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행동의 패턴으로, 의미 부여 등을 통해 일정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단순한 습관과 다르다. 같은 양말을 신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신는 것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신는 것의 정서적인 효과는 크게 다르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미국 하버드대의 프란체스카 지노 등이 ‘심리과학’이라는 저널에 게재한 논문에 따르면, 두 그룹에 초콜릿바를 먹게 하는 실험이 나온다. A그룹에는 초콜릿바의 포장을 벗기지 말고 부러뜨려서 먹으라는, 일종의 리추얼에 해당하는 지시를 줬고, B그룹에는 평상시처럼 먹게 했다. 실험 결과 ‘초콜릿이 더 맛있다’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은 A그룹에서 2배나 많았다. 이는 실험뿐 아니라 삶에서도 마찬가지라고 김 소장은 강조한다. 이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 교수가 “인생에서 특별한 이벤트보다는 하루 중 기분 좋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가 행복감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한국 남자들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고 일상에 치이면서 고달픈 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엄숙함과 진지함을 버리고 재미와 자유로움을 추구하려고 하죠. 매일 아침 마시는 커피 한잔, 사랑하는 딸과의 뽀뽀처럼 화려한 양말 신기가 일상 속 리추얼이 될 수 있어요. 양말을 통해 사소하지만 즐겁고 풍요로운 기분을 느끼는 겁니다.”(김정운 소장)

김유영 abc@donga.com·김범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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