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유업 사태 여파 갑을관계 변화

동아일보

입력 2013-05-10 03:00 수정 2013-05-1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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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숙인 甲… “甲으로 찍히지 않게 몸조심 말조심하라”

현대백화점은 10일부터 3500여 개 협력사와 체결하는 모든 거래 계약서에 ‘갑’과 ‘을’이란 표현을 쓰지 않기로 9일 결정했다. 이 백화점은 계약서에 갑과 을을 빼고 백화점과 협력사로 표기하기로 했다. 또 임직원이 갑과 을이란 표현을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절교육까지 실시할 예정이다.

‘라면 상무’ ‘폭행 빵 회장’ ‘조폭 우유’ 등 전통적인 ‘갑을(甲乙) 관계’의 종기가 곪아 터지면서 기업을 중심으로 ‘갑’ 이미지 지우기 작업이 한창이다. 원래 이해당사자를 줄여 부르려고 사용하던 갑과 을이 상하, 주종관계처럼 잘못 인식돼 온 것에 대한 반성이다.


○ 고개 숙이는 甲

굴지의 대기업인 A사 K 부사장은 최근 임원회의 때마다 “너희가 회사 안에서만 상사고 갑이지 밖에선 임원이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기업은 건강검진 때 임원들에게 정신건강의학과 상담도 받도록 하고 있다. 수많은 부하직원을 다루는 ‘갑(甲)’의 직위에 젖어 밖에서도 돌출행동을 할 위험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B대기업은 최근 외부 전문가들을 강사로 초빙해 임원 대상 인성 재교육을 강화했다.

환자들에게 ‘갑’으로 통했던 병원의 간부급 의사들도 고객서비스(CS)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기존엔 간호사나 일반 직원 위주였지만 최근에는 가장 권위적인 원장급이나 교수 의료진도 CS 교육을 받고 있다. 이 교육을 받은 교수 의료진은 환자를 대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고 컴퓨터만 바라보거나 고압적인 말투를 사용하는 점을 조목조목 지적받으면서 고쳐나가고 있다. CS솔루션 최정아 대표는 “갑처럼 행동하는 의사는 의료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게 됐다”고 말했다.

롯데마트는 ‘라면 상무‘ 사건이 터지기 이전인 4월부터 모든 계약서상 문구를 롯데마트가 ‘을’로, 협력업체를 ‘갑’으로 바꿔 쓰고 있다.

한국야쿠르트도 수년 전부터 영업 일선에서 뛰는 ‘야쿠르트 아줌마’와 계약을 할 때 아줌마를 갑으로 표기하고 있다. 업체 관계자들은 “협력사나 영업사원을 회사 성장을 위한 동반자로 대우하고 예의를 지키기 위해 ‘갑’을 버렸다”고 말했다.


○ 목소리 높이는 乙

을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익명 트위터 계정인 ‘OO 옆 대나무 숲’에는 갑의 횡포를 고발하는 업계 종사자들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지난해 9월 ‘출판사 옆 대나무숲’을 시작으로 ‘디자인회사 옆 대나무숲’ ‘IT회사 옆 대나무숲’ 등 분야별 계정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출판사 옆 대나무숲에는 5일 “컴퓨터 고장 났을 때 고쳐준다는 명목으로 전 직원 컴퓨터에 원격제어를 깔게 하고, 사장이 그걸로 메신저를 쓰는지 안 쓰는지 감시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조교 대학원생 시간강사 등이 모인 ‘우골탑 옆 대나무숲’에는 7일 ‘나는 교수의 오분 대기조’라는 자조 섞인 글도 올라왔다.

신분이 불안정한 기간제 교사들은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위법이라며 국가를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기간제 교사 김민정 씨(31) 등 4명은 2일 2심 판결에서 1심에 이어 승소했다. 이들은 전국기간제교사협의회를 조직해 심부름꾼 취급하는 정교사와 학교를 상대로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술 취한 손님의 욕설과 폭행에 시달려온 일부 개인택시 운전사들은 최근 야간영업 거부를 택했다. 오후 11시에서 오전 2시 사이 영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개인택시 운전사 곽필한 씨(59)는 “나이 먹어서 젊은 애들한테 욕 들어가며 돈 몇 푼 벌기 싫어서 피크타임이지만 운행을 안 한다”고 말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의 갑을 관계는 오랫동안 고착돼 온 문화라 교육을 받는다고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며 “제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을’이 자신의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훈상·주애진·곽도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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