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55년 세월을 깎았다” 70대 가위손 작별 ‘화제’

동아일보

입력 2012-11-01 03:00 수정 2012-12-3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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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성장 1세대’들의 가위손 지덕용 씨… 서울 혜화동 문화이용원과 아쉬운 작별
이희승 이병도 조병화 이갑성이 ‘멋’낸 그곳…


지덕용 씨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문화이용원에서 손님의 머리를 염색하고 있다. 지병과 경영난으로 그는 조만간 55년간 지켜왔던 문화이용원의 문을 닫을 예정이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 전 광복회장이 생전 자주 찾던 곳.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을 지낸 이병도, 국어대사전을 편찬한 이희승 두 서울대 교수 역시 종종 들러 세상사를 논했던 곳. 산업보국의 꿈을 안고 기업을 일으켰던 조홍제 전 효성그룹 회장 같은 창업주들과 시대를 노래한 시인 조병화 등 문인들이 멋을 내던 곳. 대한민국 건국 이후 갖은 풍상 속에서도 이들이 즐겨 찾던 ‘사랑방’이 곧 문을 닫습니다. 잊혀져 가는 한국 1세대들의 체취와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곳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
‘사각사각.’

가위가 춤을 춘다. 55년 경력의 이발사 지덕용 씨(75)의 잽싼 손놀림에 노신사의 하얀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5분 남짓 됐을까. 지 씨는 가위를 내려놓고 이발도구함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때가 묻은 63년 된 이발도구함이다. 서랍 맨 위 칸을 열자 꾹꾹 눌려 담겨 있던 하얀 약봉지들이 스프링처럼 튀어나왔다. 서둘러 약봉지를 찢은 지 씨는 물도 없이 진통제 세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벌써 손가락이 시리네. 이제 정말 이발소를 팔아야 할 때가 됐나 봐.”

지 씨의 혼잣말에 이발 의자에 있던 노신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걸린 가위는 벌겋게 부어오른 지 씨의 손가락을 수술대 위의 메스처럼 차갑게 파고든다. 빗을 쥔 왼손은 관절염으로 손톱이 모두 흉하게 비틀어졌다.

지 씨는 요즘 오래 머리를 깎기 어렵다. 관절염에 걸린 손가락도 문제지만 10여 년 전 수술 받은 심장과, 낙상(落傷)으로 철심을 박은 다리 역시 오래 서 있어야 하는 그의 일을 버텨 내기 어려워졌다.

문화이용원. 젊은이들의 거리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자리한 지 씨의 이발소다. 50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켜 왔지만 말끔한 쇼윈도의 커피전문점과 샌드위치 가게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발소의 삼색 기둥은 낯선 손님처럼 어색하다.

지 씨가 지병과 힘겹게 싸우며 고집스럽게 문화이용원을 지켜 온 데는 이유가 있다. 1969년 그가 고용 이발사이던 시절 “이발소를 팔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가게를 인수할 거금을 선뜻 빌려 준 단골과의 약속 때문이다.

하지만 지 씨는 이제 단골과의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됐다. 그는 얼마 전 이발소 문을 닫기로 결심했다.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찾아오던 오랜 단골들이 한 명 두 명 세상을 뜨면서 더는 이발소를 ‘경영’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 ‘문화인의 기준’이던 문화이용원

문화이용원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는 지 씨도 알 수 없다. 그를 처음 문화이용원에 받아 줬던 주인 이발사가 “6·25전쟁 때 간판만 남아 있던 이발소에 들어가 영업을 시작했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 짐작건대 1940년대에 생겼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5개의 최신식 이발 의자를 갖추고 이발사 8명, 보조원 3명이 일하던 문화이용원은 서울 시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던 고급 이발소였다. 지금은 초고층 건물이 들어선 강남 일대 땅값이 3.3m²당 100원 안팎이던 1960년대 초 문화이용원의 요금은 70원이었다. 비싼 이발 요금에도 많게는 하루 100명 이상의 손님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문화이용원을 찾는 사람 중에는 유명인이 많았다. 당시 혜화동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에 견줄 만한 부촌(富村)이었던 덕에 문화이용원은 기업인 정치인 학자 문인 등 다양한 계층이 한자리에 모이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지 씨의 단골 리스트는 대한민국 성장을 이끌던 1세대의 인명사전에 가깝다.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 조홍제 전 효성그룹 회장 등 대기업 창업주는 물론이고 그들의 뒤를 이어 기업을 이끌고 있는 2세들 역시 젊은 시절 그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고 이병도 서울대 교수와 국어대사전을 편찬한 고 이희승 서울대 교수 등도 그의 단골이었다. 역사학계와 국문학계의 거목이던 동갑내기 두 사람이 찾아오면 이발소는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두 분이 들르시면 느긋이 머리를 깎던 제자들이 벌떡 일어나 서로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난리였지. 다들 졸업하고 교수가 된 제자들이었는데 흥이 나면 즉석 사은회 자리가 돼서 이발소가 시끌시끌해지기도 했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명인 고 이갑성 광복회장, 국회의장을 지냈던 시인 한솔 이효상 선생, 조병화 시인 역시 작고하기 전까지 문화이용원을 찾았다.


○ 부잣집 아들에서 이발사로

지 씨가 문화이용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4년. 평소 이발소 주변을 오가던 그를 눈여겨본 주인 이발사의 호의로 17세 때 문화이용원에 일자리를 얻었다. 이곳에 취직하기 전 그는 거리에서 미군의 구두를 닦으며 생활비를 벌었다.

지 씨의 삶이 처음부터 곤궁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3년 여섯 살의 나이로 서울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원래 충북 청주시 일대에 과수원과 정미소, 양조장을 갖고 있던 부잣집 아들이었다. 하지만 지 씨의 집안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대를 이어 집안 살림을 관리하던 머슴이 전쟁을 틈타 노름으로 땅문서를 모두 날린 채 야반도주하면서다.

지 씨는 이발소에서 먹고 자는 보조원 생활을 시작했다. 새벽 5시 손님들이 머리를 감을 물을 길어오는 일부터 머리 감기기, 면도하기, 드라이를 배우며 3년 반을 보내고 정식 이발사가 됐다. 그는 군대 3년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문화이용원을 지키고 있다.


○ 단골과의 약속 어겨야 하나…

지 씨는 1969년 문화이용원 사장이 됐다. 그가 문화이용원을 인수한 데는 단골들이 큰 역할을 했다. 지 씨가 이발소를 인수하길 원하는 연로한 주인 이발사의 바람을 전해들은 단골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당시로서는 거금인 150만 원의 인수자금을 빌려줬다.

지 씨를 도운 단골 중에는 삼성전자 초대 발기인으로 삼성중공업 회장을 두 번 역임하며 ‘중공업 입국(立國)’을 이끌었던 조우동 전 회장도 끼어 있었다. 조 전 회장은 그를 돕는 대신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나 죽을 때까지 이발소를 팔지 말게.”

43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지 씨는 아직 그 약속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 전 회장은 천수(天壽·100세)를 맞은 올해도 휠체어에 의지한 채 문화이용원을 찾는다. 올해 5월 마지막으로 조 전 회장의 머리를 깎을 때 지 씨는 이발소 문을 닫기로 한 자신의 결심을 알리지 못했다.

미안한 단골은 조 전 회장뿐만이 아니다. 몇 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대기업 회장도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문화이용원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그는 “형제들과 함께 머리를 깎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며 지 씨에게 술 한잔하자고 했다. 지 씨는 인사치레로 받아 넘겼지만 머리를 다 깎고도 좀처럼 지 씨를 놓아주지 않던 그 회장은 아쉬운 듯 이발소를 둘러보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며칠 뒤 지 씨는 신문에 난 그의 비보(悲報)를 접했다.

“그때 이발소 문 닫고 술 한잔 같이 했다면….”

돌이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을 뜬 대기업 회장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한 것이 지 씨는 못내 마음에 걸린다.


○ 대한민국 1세대와 함께 추억 속으로

1950, 60년대 대한민국의 기틀을 놓았던 1세대 기업인과 학자들의 사랑방이었던 문화이용원. 낡은 간판과 삼색기둥에서 이발소가 지나온 세월이 묻어난다(왼쪽 사진), 지덕용 씨가 사용하는 가위와 빗. 관절염을 앓고 있는 지 씨는 진통제를 먹으면서도 55년간 가위를 놓지 않았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지금도 지 씨를 찾는 단골들에게 문화이용원은 화려했던 그들의 젊은 시절을 담은 소중한 사진첩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문화이용원을 처음 찾았던 꼬마는 50대 대기업 임원이 되어 압구정동으로 이사 간 지금도 꼬박꼬박 문화이용원을 찾고 있다. 대전에 사는 60대 교수도 한 달에 한 번씩 지 씨를 찾아와 머리를 깎는다. 문화이용원의 이발요금은 10년째 1만3000원이지만 먼 곳에서 지 씨를 찾는 단골손님들은 혹여 그가 이발소 문을 닫을까 봐 2만∼5만 원씩 요금을 놓고 간다.

하지만 많은 단골이 그랬듯 문화이용원도 추억의 한 페이지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문화이용원은 이제 하루 12시간 동안 문을 열어도 하루 대여섯 명의 손님이 찾을 뿐이다. 전기료며 각종 비품 비용을 대고 나면 이발소에서 생기는 벌이로는 적자를 보지 않으면 운이 좋을 수준이다.

지 씨의 사정을 아는 부동산중개소들은 벌써 몇 년째 이발소 자리에 세를 놓자고 성화다. 성업 중인 주변 샌드위치 가게며 커피전문점 소식을 전하며 세만 놓아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수입이 생긴다고 채근한다.

“몸도 더 버티기 어렵고 55년간 이발소 했으면 할 만큼 했지. 단골들도 이해해 주실 거야. 누구든지 사겠다는 사람만 있으면 이제 팔아야지.”

이발소를 팔겠다는 결심을 되뇌며 지 씨는 이발소 소파 뒤에 숨겨 뒀던 사물함을 열었다. 1960년대 초부터 차곡차곡 모아둔 이발요금표와 모범이발사 표창장을 꺼내 보는 지 씨의 눈가에 아쉬움이 맺힌다.

“평생을 함께 보낸 이발소인데…. 그래도 후회는 없어.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분들의 머리를 깎아 줬다는 건 내 인생의 자랑이야. 다만 그분들이 남겨 놓은 체취가 이발소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야.”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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