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기억하시나요 ‘영부인 우산’… 다시 활짝 펼 겁니다

동아일보

입력 2012-08-09 03:00:00 수정 2012-08-09 08: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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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중국산에 밀린 ‘66년 협립우산’… 재기 꿈꾸는 박삼근 회장

박삼근 협립제작소 회장이 대구 달서구 갈산동 집무실에서 ‘협립’이라고 적힌 우산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는 1970년부터 42년간 회장실을 지키고 있다. 대구=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 공장도, 판매부서도 없는 회사에는 종종 이런 전화가 걸려온다.

“중동 지역에 일하러 왔습니다. 강풍이 불어도 뒤집히지 않는 건 이 우산밖에 없네요. 하나 더 보내주실 수 있나요?”

“산 지 몇십 년 만에 양산 살이 부러졌는데 계속 쓰고 싶어요. 고칠 수 없을까요?”

전화를 응대하는 건 회장 비서의 몫이다. 몇 년 전 회사는 애프터서비스(AS) 문의를 연결해주던 자동응답 기능을 없앴다. 더이상 제품을 만들지 않는데 그런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비서는 “부품만 남아 있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끝까지 고쳐주는 게 회사 방침”이라고 말했다. 컴퓨터 한 대 없이 오래된 나무 책상에서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던 비서는 느릿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박삼근 회장(85)이었다. 그는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고 회장실에 들어섰다. 웬만한 가정집 거실만 한 회장실은 시계를 1970년대로 되돌린 듯한 모습이었다. 각종 상패와 오래된 자료, 벽에 걸린 훈장만이 이 회사의 ‘과거’를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
○ ‘영부인 우산’으로 불리던 시절

프란체스카 여사가 31년간 애용한 붉은색 협립우산이 정장과 함께 옷걸이에 걸려 있다. 협립제작소 제공
대구 달서구 갈산동 성서산업단지에 있는 협립제작소는 이름과 달리 지금은 아무것도 ‘제작’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세기 전엔 웃돈을 얹어주더라도 사고 싶은 양산과 우산을 만들던 업체였다.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1년 아들 인수 씨가 선물한 협립우산을 31년간 애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여사는 붉은색 기다란 우산을 어디든 가지고 다녔다. 자식들에게는 우산을 오래 쓰는 방법까지 일러줬다.

‘좌우로 흔들어서 펴고, 사용 후 그늘에 말려서 보관하고, 습기 많은 곳에 두지 말며, 중봉(우산대)이 휘지 않도록 주의할 것.’ 이 방법은 평생 근검절약했던 여사가 1992년 세상을 떠난 뒤 유품을 소개한 책자에 실려 공개됐다. ‘무겁고 투박하지만 태풍이 와도 끄떡 않는 우산’이라는 입소문과 함께 협립우산은 ‘영부인 우산’으로 불렸다.

원래 협립제작소는 자전거부품 생산 업체였다. 1946년 8월 설립 뒤 군수용품을 생산하다 1956년부터 양산 살대를 만들었다. 이것이 국산 양산 산업의 시초(始初)였다.

당시 협립제작소의 목표는 ‘양산 선진국’으로 불리던 일본의 제품을 따라잡는 것. 일제 양산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했다.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품질이 우수했다.

1970년 8월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박 회장은 그해 10월 우산 살대에 천을 붙인 완제품으로 일본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국내 업체 가운데 첫 일본 진출이었다. 이후 협립제작소는 해외 시장 진출에 공을 들였다. 한국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였고 때마침 정부는 외국산(일제) 살대 수입 금지조치를 내려 사업은 호기를 맞았다.

1970년 후반 일본의 양산산업이 정체되며 협립우산은 일본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 일본 사람들은 크기가 작고 오밀조밀한 일제 양산보다 태풍에 강하고 튼튼한 협립 제품을 찾았다. 값이 싸다는 점도 한몫했다.

협립 제품은 미국에서도 인기였다. 형형색색 우산 12개를 넣은 한 박스는 미국에서 ‘협립 원 다스(one dozen)’로 불리며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수출시장도 열렸다. 이곳에서는 골프용이나 해변용 양산이 많이 팔렸다.

이 무렵 협립제작소에 근무했던 직원은 400명에 달했다. 연매출도 100억 원을 넘었다. 전성기였다.

협립제작소는 1966년 장(長)우산에 이어 이듬해인 1967년 접이식 우산, 양산에 대해 국가인증마크인 KS마크를 획득했다. 우산과 양산에 KS마크가 새겨진 제품은 협립이 유일했다. 이후 20년 가까이 탄탄한 기술력을 인정받아 1984년 박 회장은 품질관리 유공자로 철탑산업훈장도 받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양산 공급 지정업체로 선정됐다.

협립제작소를 거쳐 간 기술자들도 자산이었다. 양산업계에서 ‘협립 인맥’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이곳에서 기술을 배운 직원들은 회사를 떠나 신민양산 제일양산 안심양산 시대양산 등 내로라하는 우산업체를 꾸리며 성공을 거뒀다. 전국에 흩어진 대리점들은 협립제작소의 든든한 판매망이었다.

박 회장은 “협립 양산을 사기 위해 웃돈을 주는가 하면 간판에 ‘협립’을 내걸지 않고서는 장사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며 “밖에서는 중국과 대만산이 시장을 잠식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협립이었다”고 회상했다.

○ 대만산 중국산의 저가 공세

1970년대 협립 제품은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내세우며 세계 무대에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성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품질은 떨어져도 가격을 대폭 낮춘 대만제 우산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본과 미국, 유럽 등에 수출하던 물량이 대만제에 밀려 급감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공장에서는 인건비가 상승하며 일손마저 달렸다.

대만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협립제작소는 1980년 초 일본 우산회사와 손을 잡았다. 인력과 기술을 공유하며 버텨보려 했지만 대만 우산의 저가(低價) 공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일본 회사는 폐업했다. 협립제작소는 자구책으로 1980년 중반 대만 최대 우산업체와 특약을 맺었다. 품질이 우수한 협립 제품을 독점적으로 대만 업체에 공급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센 복병이 나타났다. 중국산 우산이었다.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무기로 내세운 값싼 중국제에 대만조차 손을 들었다. 대만 업체들은 앞다퉈 중국에 공장을 두기 시작했다.

때마침 국내 시장에선 외국 브랜드 우산과 양산을 찾는 수요도 늘기 시작했다. 국내 우산·양산 업체들은 외국 브랜드에 로열티를 주고 우산을 만들었다. 이러한 우산들은 백화점에서 비싸게 팔리며 고급품 대접을 받았다. 젊은 고객들은 잔 고장 없이 오래 쓸 수 있는 협립 양산보다 남들에게 과시할 수 있는 외국 브랜드 양산을 선호했다. 버티다 못한 협립제작소도 1990년대 들어 레노마 찰스쥬르당 마리오발렌티노 브랜드의 우산을 제작하기도 했다.

협립제작소는 2005년부터 중국에 공장을 마련했다. 중국 공장에서 만든 부품을 들여와 국내에서 조립하는 방식이었다. 중국의 싼 인건비를 활용하되 품질도 관리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원가를 낮췄지만 오리지널 중국산 제품의 저가 공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중국산 우산과 양산의 품질이 낮다는 것도 옛말이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우산은 어느새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처럼 돼 있었다. 협립이라는 이름도 자연스레 잊혀져갔다. 협립제작소는 2008년 회사 설립 이후 첫 적자를 기록했다. 적자는 3년간 지속됐다. 대구 곳곳에 흩어져 있던 제작공장의 문을 닫고 한 평 두 평씩 다른 업체에 임대해줬다. 어느새 제품을 팔지 못해 생긴 적자를 임대료로 메워 나갔다.

직원 월급을 못 줄 정도는 아니었으나 국내 시장점유율의 70%까지 차지했던 협립제작소의 자존심은 말이 아니었다. 이 회사의 주 종목은 임대업이 아닌 우산 양산 제조업이고, 판매업이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2010년부터 옥포에 공장을 둔 우산·양산 제작업체 진영인터내셔널에 3년 동안 협립의 판권을 과감히 팔았다. 본사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들을 모두 내보냈고 관리직 사원들만 남겼다.

○ ‘힘을 모아서 다시 세운다’…협립의 꿈

회사 휴가 기간이 끝난 다음 날인 7일 협립제작소 본사 사옥을 찾았다. 사무실은 적막했다. 한때 바이어들을 불러놓고 제품을 보여주던 전시실은 남은 우산과 양산을 보관하는 창고로 변했다.

창고 옆 회장실에서 박 회장은 재기(再起)의 꿈을 꾸고 있었다. 소파 한편에는 요즘 판매하는 우산과 양산이 수북이 쌓여 있다.

판권 계약기간이 끝나는 올해 말 그는 단출한 사무실을 얻어 본사를 이전할 생각이다.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다. 로열티와 임대료 수입으로 근근이 운영하던 데서 벗어나 다시 생산하고 판매에 나설 예정이다. 중국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면서 제품 사양과 제작 공정을 회장이 직접 꼼꼼하게 챙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박 회장은 “중국산 값싼 우산들과 가격경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소 비싸더라도 질 좋은 제품을 소량 생산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되찾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비 한 번 맞으면 고장 나서 버리는 게 우산이라고 합디다. 협립이라는 이름이 잊혀지는 것보다 우산과 양산의 가치가 바닥에 떨어진 게 마음이 아파요. 신발장에 꽂아두고 가족들이 두고두고 쓸 수 있는 우산을 다시 만들고 싶어요. ‘힘을 모아서 세운다’는 협립(協立)의 뜻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하루살이로 전락한 우산의 생명을 늘리는 것이다. 박 회장은 “이번이 66년 된 협립제작소가 다시 일어서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대구=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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