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거액기부 소식에 “우리도 인재 키워야” 기부액 2배 넘게 늘려

김하경 기자 , 강동웅 기자 , 사지원 기자

입력 2019-02-19 03:00 수정 2019-02-1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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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에 500억’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18일 서울대 행정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해동첨단공학기술원(가칭) 건립 및 운영기금 출연 협약식’에서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왼쪽 사진 오른쪽)이 오세정 서울대 총장과 감사패를 펼쳐 보이고 있다. 김 회장은 한국 전자산업 기술 개발에 헌신한 공로로 2010년 인촌상을 받았다. 서울대 제공·동아일보DB
1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행정관. 이 건물 4층에 있는 소회의실 문이 열리자 푸른 넥타이에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한 노인이 들어섰다. 그는 평소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에 의지했지만 이날만은 “직접 걸어보겠다”며 용기를 냈다. 그는 느리지만 한 발씩 뚜벅뚜벅 걸음을 내디뎠다. 회의실 벽면에는 ‘해동첨단공학기술원 건립 및 운영기금 출연 협약식’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서울대가 500억 원의 기부금을 기탁받는 자리였다.

기부자는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90)이었다.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 중인 김 회장은 이날 1시간가량 차를 타고 특별한 외출을 했다. 그는 협약식에서 “건물 짓는 데 그치지 말고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로 채워 달라”고 또렷하게 말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48학번)를 졸업한 김 회장은 그동안 꾸준히 모교에 기부해왔다. 이날 기탁한 500억 원을 포함해 누적 기부액이 657억 원에 이른다. 서울대가 개인한테서 받은 기부금으로는 역대 가장 많은 액수다. 김 회장의 기부금은 그동안 학내 건물 10여 동을 짓는 데 쓰였다.

전날인 17일 김 회장은 차국헌 서울대 공과대학장을 만난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다. 차 학장은 “김 회장이 뼈저리게 가난했던 젊은 시절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한이 맺힌 듯 눈물을 흘렸다. ‘어려운 학생들이 기회가 없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1948년 서울대 공대에 합격한 뒤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첫 학기만 마치고 휴학했다. 호텔 웨이터 등 궂은일을 하며 1년 넘게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터져 복학하지 못했다. 학도병으로 입대한 김 회장은 3년간의 전쟁이 멈춘 뒤 학교로 돌아왔다.

김 회장은 1972년 전자부품 업체인 대덕전자를 창업한 이후 기술인력 양성에 집중 투자했다. 회사는 성장을 거듭해 반도체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주요 부품인 인쇄회로기판을 생산하는 연매출 1조 원대 중견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삼성전자가 주 거래처다.

김 회장은 1991년 공학인재 양성을 위해 해동과학문화재단을 세워 본격적인 기부 인생을 시작했다. 전국 20여 개 공대에 도서관을 짓고 재단이 제정한 해동상을 받은 이공계 연구자 282명에게는 연구비를 지원했다. 지원 금액이 450억 원에 달한다. 김 회장은 한국 전자산업 기술 개발에 헌신한 공로로 2010년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가 수여하는 인촌상을 받았다. 당시 김 회장은 “일본을 오가며 기술을 배웠는데 그때 고생은 말로 하기 어렵다. 앞으로도 많은 과학인재가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김 회장은 상금으로 받은 1억 원도 “의학 연구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고려대 의대에 기부했다.

김 회장은 정작 자신의 삶에선 절제를 보여줬다. 김 회장 곁을 20년간 지켜온 박성한 해동과학문화재단 이사는 “김 회장은 옷차림이 수수해서 푸근한 인상의 동네 할아버지로 느껴질 때가 많다”고 말했다. 차 학장도 “김 회장은 기부금 관련 행사를 열 때마다 ‘화려하게 하지 말고 그 돈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도우라’고 하신다”고 전했다.

대덕전자 직원 등 주변 사람들은 김 회장에 대해 ‘따뜻하고 합리적인 리더’라고 했다. 직원 A 씨는 “회장님은 공장에서 직원들과 식사도 자주 하고 경조사 때마다 직접 불러서 격려해주셨다”고 말했다. 9년 차 직원 B 씨(34)는 “회장님은 ‘엔지니어로서 한 군데 갇혀 있지 말고 틀을 깨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했다. 김 회장이 입원해 있는 병원 관계자는 “김 회장은 한참 연하인 간병인에게 늘 존댓말을 쓴다. 간병인이 씻는 것을 도와줄 때는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한다”고 전했다.

창업 이후 30여 년간 서울대 공대에 157억 원을 기부해온 김 회장은 지난해 10월 “내가 구순이 넘어 얼마나 더 살게 될지 모르니 이제는 제대로 된 기부를 하고 싶다. 200억 원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학교 측에 밝혀왔다. 김 회장은 미국 금융회사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츠먼 최고경영자(CEO)가 매사추세츠공대(MIT)에 3000억여 원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올 1월 접한 뒤 기부 금액을 두 배가 넘는 500억 원으로 올렸다고 한다.

차 학장은 “김 회장은 건물이 완공된 후에도 계속 관심을 갖고 ‘시설 운영을 더 열심히 해 달라’고 조언하신다. 모교에 대한 애정을 넘어 국가의 공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하경 whatsup@donga.com·강동웅·사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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