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로 찍히지 않으려면…” 밀레니얼 세대 공부하는 부장님들

김현수기자

입력 2019-06-28 14:58 수정 2019-06-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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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그룹 계열사의 한 최고경영자(CEO)인 A사장은 최근 화려한 프린트 무늬 셔츠와 발목 없는 양말, 뿔테 안경을 새로 구비했다. 아저씨 스타일 검정 구두는 이제 그만, 센스 있는 스니커즈가 기본이다. 1980년대 말에 입사해 패션에 관심을 둘 틈도 없이 일만 해왔던 그가 갑자기 스타일을 바꾼 것은 최근 그래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임원 사이에서는 외모부터 젊어야 소통을 잘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은근히 있다”며 “젊은 세대와 소통을 잘하느냐가 리더의 중요한 자질이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오너들도 젊어지고 있지 않나. 위고 아래고 나를 ‘꼰대’로 찍지 않게끔 외모도 바꾸고, 유연한 자세를 보이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중견기업 B 부사장은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 사이 태어난 세대)에 대해 독학하고 있다. 그는 올 초 서점에서 ‘90년대생이 온다’, ‘밀레니얼과 함께 일하는 법’과 같은 책을 샀다. B부사장은 “요즘 실무 직원 상당수가 밀레니얼 세대라 이들에 대한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다. 대기업은 조직문화 컨설팅도 받는다는데 우리는 그러기 어려워 독학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를 해도 이해가 안갈 때가 많다. 그는 “일하기 싫어 손놓고 있는 게 보이는데 그걸 ‘워라밸(워크 앤드 라이프스타일 밸런스)’로 포장하는 것은 당황스럽다”고 했다.

● 기업에 부는 밀레니얼 배우기 열풍

A사장, B부사장이 밀레니얼 세대 따라잡기에 나서는 까닭은 최근 기업 내 밀레니얼 세대 비중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주요 대기업의 경우 이미 밀레니얼 세대 비중을 30~40% 이상으로 보고 있다. 신생 정보기술(IT) 기업은 이미 절대 다수가 밀레니얼 세대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밀레니얼 세대 비중이 커지면서 기업마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소통 방식에 대한 갈증을 겪고 있는 상태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9년 생), X세대(1970년대 생), 밀레니얼 세대 등 세대별 명칭에 대한 정의는 주로 미국에서 왔다. 하지만 한국은 세대간 특성 차이가 미국보다 더욱 도드라진다는 게 주요 기업들의 설명이다. 한국은 압축성장을 겪은 만큼 경제적 풍요, 기술 친화도 등 성장 배경이 세대별로 급격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최근 기업마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강조하고, 소통을 강조하는 것도 내부의 세대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이다. 포스코그룹 포스코인재창조원은 올해 2월 그룹 내 리더급 직원을 대상으로 아예 ‘밀레니얼 세대 소통 가이드’를 만들어 나눠 줬다. 포스코는 ‘우향우’ 정신으로 통하는 불굴의 조직 문화가 유명한 기업이다. 포스코를 세운 고 박태준 회장이 “차관으로 지은 국민의 기업인만큼 제철소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한데서 나왔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에 무게를 두는 밀레니얼 세대는 우향우 정신을 이해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밀레니얼 세대에 맞는 소통방식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포스코 내 올해 밀레니얼 세대 비중은 36%지만 2024년 60%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까지 베이비붐 세대가 48%로 가장 많지만 5년 뒤에는 26%까지 줄어든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원들과 ‘행복 토크’에 나서며 소통을 강화하는 것도 뉴리더인 밀레니얼 세대가 중시하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며 혁신을 이끌려는 시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 “참아야 승진한다” VS “부장처럼 되기 싫은데”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나. 이겨내야 임원도 되는 거지.”

유통회사에 다니는 이 모 씨(26)는 말끝마다 팀장이 ‘그래야 임원 된다’고 할 때 속으로 생각한다. ‘당장 내일 그만 둘지도 모르는데, 임원이라니….’ 더구나 그가 모시는 임원은 주말에 사무실에 나오고, 가족과 행복해 보이지도 않아 임원이 되고 싶지도 않다.

기업마다 밀레니얼 세대 배우기에 나선다 해도 여전히 세대간 간극은 남아 있다. 특히 부장과 임원들은 ‘동기부여’가 가장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한 대기업의 김 모 상무는 사무실 방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가끔 놀란다. 시간은 오후 6시. 사무실에는 40대 팀장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일이 없어도 남으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진짜 일이 있는데도 개인 약속이 있다고 조용히 사라지는 직원을 보면 당황하다”며 “꼰대처럼 호통은 치면 안 되고, 미국처럼 해고 카드를 꺼낼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일을 시킬지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 식품업계 부장은 “승진도, 보너스도 밀레니얼 세대는 별 관심 없어 보인다”며 “이들에게 동기부여하기가 너무 어렵다. 어렵게 취업 관문을 뚫고 들어와 그만두는 직원이 많은 걸 보면 신기하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은 2012년 23%에서 2016년 28%로 높아지는 추세다.

● 최고의 상사는 ‘감정 노동의 달인’

밀레니얼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가 조직 내에서 부딪히는 것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조직 내에서의 성공에 중점을 둔다면 밀레니얼 세대는 ‘나의 행복’에 중점을 둔다. 밀레니얼 세대가 직장을 고를 때에도 돈보다 기업문화, 일하는 방식, 일의 의미를 쫓는다는 것은 다양한 연구에서 입증이 된 상태다.

2016년 미국 자산운용사 피델리티 조사에 따르면 밀레니얼세대는 ‘일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연봉 7600달러(880만 원)를 포기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의 질’이란 경력에 도움이 되는 일, 의미가 있는 일, 기업 문화가 좋은 직장, 워라밸 등을 말한다.

한국 밀레니얼 세대는 부장들의 하소연처럼 유독 워라밸에만 집착하는 걸까. 조직 전문가인 장은지 이머징리더십인터벤션즈 대표는 “밀레니얼 세대는 오히려 일에서 의미를 찾고 행복을 느끼고 싶어 한다. 하지만 회사에서 주어지는 일이 자신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좌절하고 냉소적으로 변하며 조직 밖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든다”고 했다. 이어 “그 모습이 상사들 눈에는 ‘휴가만 기다리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 대표는 “상사가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면서 자신의 성장을 돕는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또 이직하더라도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이 커리어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의미를 알려주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일일이 직원들의 관심사와 추구하는 가치까지 파악해가며 일을 시켜야 하다니…”라고 X세대 관리자는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20대에만 해도 신인류라며 “난 달라”를 외쳤지만 직장에서는 베이비붐 세대인 ‘돌격부대’에 호응하느라 자아 정체성까지 내려놓지 않았는가.

하지만 ‘감정 노동’이 이제 관리자의 주요 업무라는 주장이 나오는 시대다. ‘실리콘 밸리의 팀장들’의 저자 킴 스콧은 “솔직한 피드백 등 소통을 늘리려면 직원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최고의 상사는 감정노동의 달인”이라고 썼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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