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밀어낸 국민연금, 떨고 있는 294개 기업들

김현수 기자 , 변종국 기자 , 이건혁 기자

입력 2019-03-28 03:00 수정 2019-03-2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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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주총서 이사 연임 부결… 대기업 총수 첫 대표이사직 박탈
의결권 행사 ‘연금행동주의’ 개막, 연금 지분 5% 넘는 기업들 긴장
정권 눈치 안보는 독립성 숙제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국민연금 등 일부 주주의 반대를 넘지 못해 대한항공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로 대기업 총수의 이사직이 박탈된 첫 사례다.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빌딩 5층 강당에서 열린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이 통과 기준(찬성률 66.67%)에 약 2.6% 모자라 부결됐다. 대한항공 정관에 따르면 사내이사 선임은 참석 주주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주총 전 사전 의결권 행사 명세를 살펴본 결과, 찬성률이 64.09%에 그쳐 따로 표 대결은 없었다. 전날 대한항공 2대 주주인 국민연금(지분 11.56%)이 조 회장의 연임안에 반대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날 주총에 관심이 쏠렸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위원회는 전날 회의에서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고 판단해 반대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조 회장은 1999년 부친인 조중훈 회장의 뒤를 이어 대한항공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에 대표이사직을 잃게 됐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조 회장이) 대표이사에서 물러나지만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고, 대한항공의 최대주주인 한진칼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어 경영권이 박탈당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등기 임원이 된 조 회장은 대한항공 이사회에 참여할 수 없어 경영권 행사에 제한을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에서는 조 회장의 대표이사직 박탈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국민연금의 반대로 총수가 대표이사직을 잃는 사례가 현실화하면서 같은 일이 앞으로 더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실적이 좋아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대주주라면 이사직을 잃을 수 있는 선례가 됐다는 의미도 있다.

이번 건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연금 행동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하며 기업 경영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왔다. 올해부터 지분 10% 이상을 가졌거나 보유 비율이 1%를 넘는 기업에 대해서는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 공시하기로 하면서 다른 투자자들의 의결권 행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강화 흐름에 기업들의 긴장감은 높아지고 있다. 27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4일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행사하는 지분 5% 이상 보유 상장사는 294개다. 재계 관계자는 “해외에서도 경영진의 윤리적 행위가 주주권 행사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면서도 “한국에서는 지나친 반기업 정서로 실제 행위보다 과한 사회적 지탄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정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김현수 kimhs@donga.com·변종국·이건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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