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칼럼]차라리 상투를 트시오

동아일보

입력 2004-02-13 18:46 수정 2019-01-2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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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것이 착하고 미련한 사람이다. 나쁜 자라면 미워하면 그만이지만, 의도는 좋은데 결과가 시원찮은 이가 끼치는 해악을 열거하자면 이쪽이 죄책감 들기 십상이다.
다같이 잘사는 균형사회를 만들자, 환경과 윤리와 자주성을 지켜라 같은 주장은 ‘착하게 살자’는 말씀처럼 지당해 보인다. 실현이 힘들뿐더러 지금 시대와 세계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점만 빼놓으면 이처럼 도덕적인 이상향이 없다.
▼좌파의 꿈,시대와의 불화 ▼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는 사람마다 다를 터이다. 결함 있는 인간이지만 저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뛰면 결국 이로운 세상이 된다는 시각이 있고, 인간 본성도 상황 따라 변하므로 깬 자가 앞서 세상을 개혁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심리학 교수인 스티븐 핀커는 이를 좌우의 스펙트럼으로 분류해 전자를 우파, 후자를 좌파라고 했다. 여기서 좌파는 우리나라처럼 먼저 거론한 사람이 색깔론 조장하는 불순분자로 찍히는 ‘좌익사범이 아니다’. 외국선 거리낌 없이 쓰는 레프트(left)를 말한다.
좌파의 이상은 아름답다. 평등과 박애를 추구하고 인권과 환경을 사랑하며 경쟁과 전쟁에 반대한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제국주의이고 세계화란 테크놀로지와 맞물린 자본주의가 빈국을 착취하는 것이므로 결사 저항한다. 그들의 눈에 시장은 부도덕하다. 모든 문제는 강하고도 유모 같은 정부가 해결해 줘야 한다.
다만 문제는 이런 유토피아가 가능하냐는 점이다. 의인화해서 표현하면 사람은 착한데 답답한 소리만 하고 있는 형국이다.
선악의 개념 없이 연구결과로만 말하는 과학에 따르면 인간 본성은 우파에 가깝다. 인간이 불완전한데 완벽한 세상이 있을 수 없다. 똑같이 잘사는 사회를 내걸고 혁명했던 러시아 중국의 오늘과, 개인의 자유를 위해 정부 권한을 제한하는 헌법을 만든 미국을 보면 명확해진다. 보이지 않는 손이 결국 부와 선을 가져오는 시장경제, 개인의 자유에 간섭않는 작은 정부를 우파는 원한다.
1년 전, 외국 언론에선 당연한 듯 언급했으나 우리는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던 것이 좌파정권의 탄생이었다. 1970, 80년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좌파가 진보라는 이름으로 정치권과 시민사회 주류로 등장한 것이다.
우파는 이념논쟁 일으킨달까봐 상대를 좌파로 칭하지도 못한 채 고가(古家)를 연상케 하는 보수라 불리면서 수구 반동 꼴통으로 몰리고 있다. 우파를 대변하리라고 기대됐던 한나라당은 수백억원을 뜯어먹은 부도덕한 집단으로 판명돼 얼굴도 못 들 처지다. 나라 바깥은 탈규제와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우파가 휩쓰는데도 이 나라 우파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게 됐다.
90년대 중후반 유럽을 풍미했던연합(EU) 15개국 중 13개국에서 집권했던 좌파정권은 물론 중국 인도 남미국가까지 지금은 정부 역할을 축소하고 시장경제에 자리를 내주는 시대다. 경제난 때문이다. 아무리 시장에 결함이 있다 해도 정부의 전횡보다는 적다. 우파 정책을 추구한 서구가 1950년부터 2001년까지 연평균 2.8% 성장한 반면 좌파세계의 성장률은 2.2%에 불과했다. 경제개방과 삶의 질, 정치적 민주화는 동반자임이 유엔인간개발보고서에서도 확인됐다.
개인이 어떤 세계관을 갖느냐는 남이 상관할 바 아니되 ‘지배세력’이 되어서 이 같은 세계 변화에 눈감은 채 과거의 이상으로 국가를 경영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경제가 잘 돌아가는 평화시기라면 개혁이든 개벽이든 환영이지만 우리의 좌파 주류는 아무래도 시대를 잘못 만났다. 차라리 상투 틀고 도포 입고 다니면서 철 지난 비전을 설파한다면 답답하지나 않겠다.
▼'경제대통령'만 믿는다 ▼
지금 믿을 데는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이헌재 경제부총리밖에 없다. 그는 “우리 경제는 아마추어의 시행착오를 받아들일 만큼 여유롭지 않다”며 성장정책을 펼 것을 분명히 했다. 총선에 올인한 좌파정부에서의 운신이 쉽진 않겠지만 새 부총리마저 흔들리면 이 나라 경제엔 희망이 없다.
자유와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원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준다는 걸 세계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스스로 도덕적이지도 못하면서 국민에게 도덕을 강요하는 정부나 비정부기구는 압제자일 뿐이다. 국회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번 총선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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