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요지경 가상통화’ 국가발행 시대, 기발하거나 기가 차거나…

주성하 기자

입력 2018-03-29 03:00 수정 2018-03-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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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서 시작… 각국으로 퍼진 열풍, 허와 실


올해 초부터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가상통화 열풍은 한풀 꺾였다. 그러나 최근 각국에서 정부 발행 가상통화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신성장 동력으로 삼기 위해, 지폐를 없애기 위해, 복지를 위해서 등 가상통화를 발행하려는 각국의 속사정은 제가끔 다르다. 일각에선 2018년이 ‘국가 발행 가상통화의 해’가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가장 주목받는 국가는 베네수엘라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법정화폐가 기능을 상실한 베네수엘라는 2월 20일 원유를 담보로 정부가 발행하는 가상통화 ‘페트로(PETRO)’를 발행해 19일까지 비공개로 사전 판매했다. 이달 23일부터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 15일간 개인과 기관에 공식 판매에 들어갔다.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페트로를 판매했다고 발표했다.


○ 베네수엘라 가상통화 페트로 완판?

베네수엘라는 사전 판매를 통해 20만927건의 페트로 구매가 이뤄졌고, 50억2000만 달러 상당의 페트로가 판매됐다고 발표했다. 애초의 판매 목표를 거의 달성한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애초에 “신용이 바닥에 떨어진 베네수엘라의 가상통화는 사기”라며 비웃던 세계의 시선이 크게 달라졌다. 급기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19일 페트로의 미국 내 거래와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내렸다.

페트로는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베네수엘라의 원유를 담보로 하며 1페트로의 가격은 석유 1배럴의 가치에 해당하는 60달러로 책정됐다.

베네수엘라는 발행 첫날에만 7억3500만 달러(약 7867억 원) 상당의 페트로를 판매했다고 발표했다. 페트로가 인기를 끌자 베네수엘라 정부는 지난달 21일엔 세계 4위 매장량을 자랑하는 자국의 금을 담보로 ‘페트로 골드(Petro Oro)’라는 가상통화도 발행했다.

베네수엘라 정부에 따르면 페트로의 사전 판매에는 세계 133개 국가가 참여했고 결제 수단은 달러(52.7%), 위안(22.59%), 유로(15.9%), 이더리움(7.9%), 비트코인(0.7%) 순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이 가상통화의 사용처가 베네수엘라 내로 한정됐음에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베네수엘라는 페트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각종 공공요금, 세금, 이자 납부 등에 페트로를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다음 달 20일부터 부동산 거래에서도 페트로를 사용할 수 있으며 식료품 의약품 분야의 34개 기업은 페트로로 거래를 시작할 예정이다. 또 정부는 페트로를 이용한 상품 및 서비스 유통이 가능한 4개의 페트로 경제특구 설립도 계획하고 있다.


○ 페트로에 대한 여전한 불신

그럼에도 페트로의 미래에 대한 불신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가상통화 발행국이 다름 아닌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한 베네수엘라이기 때문. 신용평가 무디스인베스터스서비스의 추산에 따르면 국제 항공사, 석유업체 등 베네수엘라 정부가 채권자들에게 갚아야 할 돈만 지난해 하반기 현재 약 1410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의 올해 인플레이션이 1300%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베네수엘라는 이미 지난해 대비 4000%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페트로를 관리하는 베네수엘라 정부의 부패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 연구소 브루킹스연구소는 “페트로는 가상통화의 기본인 ‘탈중앙화’와 달리 유가에 따라 변동하고 부패한 정부의 통제하에 놓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호주 공공 뉴스 사이트 ‘더컨버세이션’에 따르면 페트로는 가상통화 교환소에서 자유롭게 채굴되고 거래될 수 있는 화폐라기보다는 정부의 디지털 담보나 토큰에 가깝다. 모든 정보를 정부가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판매 수익에 대한 증거와 초기 투자자가 누구인지도 베네수엘라 정부가 밝히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다. 이 때문에 사전 판매가 성공적이었다는 베네수엘라의 발표도 확실히 검증되진 않는다.

외국인투자가들만이 페트로에 투자할 수 있는 점도 비판을 받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페트로를 판매할 때 유로나 달러 또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만을 취급하지만, 자국 내에서 외화 유통이 금지됐기 때문에 베네수엘라 국민은 합법적으로 페트로에 투자할 수 없다.

여기에다 페트로가 가치 기반으로 삼은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 자체의 신용도도 바닥이다. 베네수엘라의 최근 석유 생산량은 과거 대비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고, 주문이 들어와도 판매할 석유가 없는 상태다. 이렇다 보니 1페트로가 석유 1배럴의 가격과 동일한지도 의심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 가상통화 발행에 눈 돌리는 각국

그럼에도 미국의 강력한 제재를 받아 경제가 파탄 난 베네수엘라가 페트로를 활용해 50억 달러의 외화를 끌어들였다고 발표하자 러시아 터키 이란 등 다른 제재를 받는 국가들도 이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상통화에 관심을 가져 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10월 “‘가상루블’은 러시아에 대한 서방 제재의 압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란의 모하마드자바드 아자리 자로미 정보통신부 장관은 베네수엘라가 페트로를 발표한 다음 날인 2월 21일 “국영은행 ‘포스트뱅크’가 클라우드 기반 가상통화를 개발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터키도 2월 ‘튀르크 코인’이란 정부 차원의 가상통화 검토에 착수했다.

제재가 아닌 이유로 가상통화를 발행하는 국가도 있다.

태평양 섬나라인 마셜제도는 5일 세계 최초로 ‘소버린’이란 가상통화를 국가 법정 통화로 인정했다. 인구 6만 명의 마셜제도에는 자체 통화가 없고 미국 달러화를 사용한다. 마셜제도는 2400만 개의 소버린을 발행해 70%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핵 실험 피해 주민들의 복지 및 보상금으로 쓸 예정이다. 또 240만 개는 국민에게 무상으로 나눠준다.

가상통화를 새로운 국가 성장 동력으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캄보디아 멘 삼 안 부총리는 이달 초 프놈펜에서 열린 ‘아세안 2018 블록체인 서밋’에 참석해 정부 주도 가상통화 ‘엔타페이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엔타페이는 캄보디아 경제 성장의 핵심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국가 주도로 ‘현금 없는 사회’를 강하게 추진해 세계에서 제일 먼저 화폐가 사라질 것이란 예상을 받는 스웨덴도 중앙은행이 ‘e-크로나’ 시스템 도입을 적극 연구하고 있다.

미국 가상통화 전문매체 크립토 인사이더는 22일 “기능에 대한 의문과는 관계없이 2018년은 분명히 국가 발행 가상통화의 해라고 할 수 있다”며 “다만 이런 가상통화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또 다른 문제다”라고 전망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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