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Special Report]칼과 감투… 여진족 제압한 조선의 ‘화전양면’

고승연 기자 ,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입력 2016-12-05 03:00 수정 2016-12-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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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경진북정’ 국방정책

 1460년(세조 6년), 국경을 빈번하게 침략해 노략질을 일삼던 여진족들을 토벌한 ‘경진북정(庚辰北征)’이 이뤄졌다. 이 경진북정은 명나라와의 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사안을 ‘화전양면전술’을 활용한 외교전략과 정벌 전쟁으로 완벽히 해결한 조선 국방외교 정책의 대표적 성공 사례다. 세조가 즉위한 15세기 중반은 세종의 야인 정벌로 숨죽이고 있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의 땅과 물자를 노리며 국지적 침략을 감행해 오던 시기였다. 세조는 무조건적인 무력 정벌부터 시작하지 않고 여진족 내부의 동정을 신중하게 살폈다. 강대국인 명나라 국경에서 벌어지는 분쟁이기에 외교적 전술도 준비했다. 그리고 결국 여진족 내부를 분열시키고 침략하는 부족들을 완전히 진압했으며 명나라와의 갈등도 예방했다.

 이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째, 리스크에 대한 대처와 관리를 최대한 유연하고 신속하게 해냈다. 리스크가 동일하다고 해서 이에 대한 관리방식도 항상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게 당시 조선 조정과 세조의 생각이었다. 여진족을 어르고 달래던 조선은 여진족이 어느 선을 넘어 리스크의 양상이 변하자 전혀 다른 대응방식을 쓰기 시작했다. 선물과 벼슬 등으로 반항적인 부족의 핵심 리더들을 달래던 조선은 그들이 결국 조선을 배신하자 강경책으로 선회한다.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인 신숙주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정벌에 나선다. ‘이번에도 역시 회유하려 할 것’이라고 오판했던 여진족은 적잖게 당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둘째, 전쟁이 시작되자 현장 지휘관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예부터 훌륭한 리더는 방향을 말해 줄 뿐 그 길로 가는 방법은 현장에 맡겼다. 이때도 그랬다. 세조는 현장 사령관인 신숙주가 인력과 물자를 자유롭게 동원할 수 있도록 해당 지역의 모든 수령이 신숙주의 명령에 따르도록 했으며 그가 재량껏 ‘현지의 관리들에 대한 징계와 처벌’을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세조는 다른 대신들이 ‘상황이 달라졌다’며 정벌 중단을 주청했을 때에도 “내가 신숙주에게 맡겼으니 다른 이들이 아뢰는 것은 따르지 않겠다”고 말한다.

 셋째, 위기 해결을 위해 조직의 역량을 한 가지 목표, 즉 ‘여진족과의 분쟁을 반영구적으로 해결한다’는 목표에 맞게 정렬하고 모아냈다. 우선 여진족 내부 분열을 위해 조선에 저항하지 않는 여진족에게는 벼슬과 하사품을 늘려주고 침략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부족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또한 자신들의 국경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명나라와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명 선대 황제들의 칙서를 활용해 ‘정당한 정벌’임을 내세웠다. 명나라 역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 전체가 여진족 내부 분열과 명나라와의 갈등 해결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는 얘기다.

 조선 국방외교 정책의 최고 성공 사례로 꼽히는 ‘경진북정’은 급박하게 변화하는 경영환경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 나아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정치인들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기업인들은 물론이고 정치인들도 다시 역사를 들여다봐야 할 때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정리=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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