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좋은 일자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불쾌감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입력 2015-10-17 03:00 수정 2015-10-17 03:00
청년 구직자들이 채용정보 게시판을 보며 일자리를 찾고 있다. 동아일보DB
요즘에 이슈가 되고 있는 은유적 표현들을 보면 한국 사회는 지금 완전히 조선시대로 퇴행하고 있는 듯하다. 헬 ‘조선’이 그렇고, ‘죽창’이 그렇고, ‘개천에서 용’ 나지 못하는 사회가 그러하다. 물론 ‘금수저’ ‘흙수저’ 등의 수저 시리즈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서양의 격언에서 차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러시아인이면서 한국 유명 좌파 인사가 된 박노자는, 150년 전 조선의 한양 북촌 권문세도가 자녀들이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듯, 오늘날 ‘강남족’도 세습적 카스트를 이루어 거주지, 통혼권, 학습·유학 루트, 언어(영어 상용 선호), ‘웰빙’ 등의 차원에서 배타적인 세습신분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젊은이들이 ‘팔자’ 타령만 할 뿐, ‘헬 조선’을 타도할 죽창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는 대놓고 현대판 동학농민혁명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 자유 민주 사회에서 혁명을 선동한다는 것은, ‘죽창’이라는 구식 무기의 이미지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다.
그럼 소위 ‘삼포 세대’인 젊은이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들이 장난삼아 자조적으로 한다는 빙고 게임에서 자신이 흙수저임이 증명되는 것은 ‘집에 비데가 없다’, ‘고기를 주로 물에 끓여 먹는다’, ‘식탁보가 비닐이다’ 등의 항목이 한 줄로 이어질 때라고 한다. 최첨단 정보기술(IT) 관련 일을 하는 한 젊은 여성은 몸이 아파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금수저 아닌 20, 30대의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말한 후 여기에 ‘애 낳으라’는 말은 과로해서 죽으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아 열 받는다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렸다. 또 다른 여성은 “아이 낳고 키우는 것을 국가가 해 줄 것도 아니면서 남에게 결혼을 권하는 인간들이 과연 제정신일까? 도대체 그 애와 부모의 삶을 무슨 수로 보장한다고, 무책임하게 출산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남에게 쉽게 시집가라, 장가가라, 그러는 거 아니다. 정말 못된 인간들이다”라고 기성세대를 준엄하게 질타했다.
한 칼럼니스트는 이제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고, 용은 부모가 제공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고 말하며, 서울 시내 유명 국제중 한 곳에서 특목고, 자사고 등 명문고에 보내는 숫자가 일반중의 약 9배이고, ‘SKY’ 명문대의 절반이 자사고, 특목고 출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찢어지게 가난한 움막집 아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검사가 되었을 때 우리 신문들은 언제나 감격하여 ‘개천에서 용 났다’는 성공 스토리를 길게 싣곤 했었다. 그러니까 우리 국민의 의식 속에서 ‘용’이란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조선시대의 선비상이다. 더럽고 천한 일은 노비나 천민이 담당하고 양반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공부만 했으며 노비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노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 가혹한 신분제 사회의 계급의식이다.
대통령에서 좌파에 이르기까지 지금 누구나 하는 말 중에 가장 듣기 민망한 것은 ‘좋은 일자리’라는 말이다. 힘들고 천한 일이 아니라 30대 재벌 기업에서 양복 입고 사무 보는 직종만을 ‘좋은 일자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예 인권의 개념이 없는, 시대착오적이고 부도덕한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한없는 거부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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