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재계 실적부진 아우성에 정부-의회 ‘해외기업 옥죄기’

김지현기자 , 김창덕기자

입력 2014-05-21 03:00 수정 2015-04-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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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무역 벽 앞의 ‘수출 코리아’]

“2012년 이후 저가 철강제품 수입 증가로 미국에서 4000여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중국 한국 등 아시아 국가의 철강 덤핑 공세로 미국 철강업체 실적이 악화돼 현재 일자리 58만3600개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미국 제조업연합회(AAM)는 13일(현지 시간) 이같이 주장하면서 미 행정부에 적극적인 수입규제 조치를 발동해 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이 최근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하는 배경을 보여주는 사례다.


○ 점차 심화하는 해외 기업 때리기

미국의 보호무역 정책은 입법부와 행정부가 전방위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파괴력이 크다. 미 상무부는 17일 한국산 무방향성 전기강판(NOES·소형 전기전자 제품에 주로 쓰이는 철강제품)에 대해 6.91%의 잠정 반덤핑 관세율을 부과했다.

수입 제품에 대한 미국 철강업체들의 반덤핑 및 상계관세 제소 건수는 지난해 38건으로 2001년(55건) 이후 12년 만에 가장 많았다. 스콧 폴 AAM 회장은 덤핑 혐의로 제소된 한국산 강관이 최근 예비판정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자 “의회가 나서지 않으면 미국 내 에너지 개발 인프라를 외국 기업이 독차지할 것”이라며 강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조치들은 대부분 미국 기업들의 실적 부진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연간 철강 수입량은 2011년 2850만 t에서 지난해 3200만 t으로 12.3% 늘어났다. 수입이 늘면서 미국 철강업체들은 2012년과 지난해 각각 3억8800만 달러와 11억98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

현대자동차와 도요타에 물린 천문학적 규모의 배상금 역시 미국 자동차업계의 부진에 따른 반(反)외국기업 정서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 적지 않다. 제너럴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업계 ‘빅3’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2001년 65.8%에서 지난해 45.4%로 20.4%포인트 떨어졌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차가 미국 시장에서 단기간에 급성장하자 경쟁업체는 물론이고 미국 정부의 견제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 미국 내에 만연한 애국주의

지난해 8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삼성전자 특허를 침해한 애플 제품을 미국으로 수입하지 못하도록 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조치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ITC 조치를 미 대통령이 거부한 것은 26년 만에 처음이었다. 미국 정부는 ITC 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미국 경제의 경쟁 여건 및 미국 소비자에게 미칠 영향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산 세탁기가 너무 싼값에 팔려 손해를 본다며 미 정부가 반덤핑 관세 부과를 승인한 것 역시 보호무역주의의 일환이라는 시각이 많다. 지난해 1월 ITC는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한국 제품에 대한 반덤핑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 전자업계 관계자는 “최근 미국 산업계에서 나타나는 ‘애국심 마케팅’도 미국 정부의 보호주의적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과거에도 국내 경제사정이나 여론에 따라 보호무역 정책을 펼친 전례가 있다. 1980년대 말 미국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리처드 게파트 하원의원은 한국의 자동차수입 중과세 정책을 비난하는 TV 광고를 내보냈다. ‘포괄적 무역법안 슈퍼301조’(교역국의 불공정한 무역제도나 관행에 보복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법안)도 1989년부터 2년간 한시적으로 발효된 법안이었지만 미국 경기가 악화됐던 1994∼1997년, 1999∼2001년 두 차례나 부활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정치인들은 노골적인 자국 산업 보호정책을 만들고 있다. 2009년 경기부양법안에 ‘바이 아메리카’ 조항이 삽입된 것은 미국 철강업계의 지지를 받는 피터 비스클로스키 민주당 하원의원 작품이었다. 셰러드 브라운 민주당 상원의원도 최근 “미국 철강산업 보호를 위해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추가적인 수입규제조치를 예고하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올 3월 의회에 제출한 내년 예산안에서 상무부 산하 국제무역청(ITA)의 예산을 약 8% 늘렸다. 또 미국의 세계무역기구(WTO) 분쟁 제소 및 해결을 도맡고 있는 ‘부처 간 무역집행처(ITEC)’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15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입하기로 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학)는 “세계무역기구 등 다자간 협상을 통해 자유무역을 주도하던 미국이 자국 경기 하락으로 막상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뒤에는 보호무역주의로 급선회하고 있다”며 “미국의 정책방향 선회로 유럽연합(EU)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보호무역이 확산되고 있어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한국으로서는 적잖은 피해가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김창덕 drake007@donga.com·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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