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에 쉬면 가슴답답… 나도 몰래 출근병”
동아일보
입력 2014-02-20 03:00 수정 2014-02-20 03:00
[저녁을 돌려주세요]
<1>‘회사의 늪’에 갇힌 어느 대기업 대리
“오, 자네도 나왔는가.”
국내 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어느 토요일. 서울의 대기업 A사 인사팀 대리 B 씨(34)는 이날도 어김없이 출근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나 업무가 밀린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놀고만 있기가 불편했던 것. 놀더라도 차라리 사무실에서 노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B 씨 부서의 상무는 토요일에도 출근하겠다고 공언까지 한 상태였다. 직속 상관이 출근하는데 부하들이 쉴 수는 없었다.
“밀린 업무가 많아서요.” “허허. 다들 고생이 많구먼.”
인사를 받은 상무는 곧바로 TV를 켰다. 특별한 일이 없는지 이내 머리를 의자에 대고 잠이 들었다. B 씨도 회사 문서를 꺼냈지만 이내 졸음이 밀려왔다. 소설책을 꺼내 좀 보다가 컴퓨터로 ‘미드(미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 상무가 TV를 끄면서 말했다.
“다들 별다른 일 없으면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지.”
삼겹살로 시작된 이날 회식은 2차, 3차까지 이어졌다.
○ ‘일중독’ 전염병 바이러스
출근을 하지 않아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무는 주말에도 출근해 업무를 보다가 부하 직원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직원들은 휴일에도 24시간 휴대전화를 놓지 못한다.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싶었다. 그러나 상무의 전화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족들 앞에서 상무와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미안했다. 결국 상무의 전화를 견디다 못한 직원들의 마지막 선택은 출근이었다.
B 씨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턴가 휴일에 집에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때도 수시로 휴대전화를 쳐다보는 버릇까지 생겼다. B 씨도 결국 출근을 택했다. 집에 있을 때보다 사무실에 있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그는 “일중독도 전염병이라는 것을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 알았다”며 “이제는 쉬면 더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인사팀 업무는 원래 빡빡하기로 유명했다. 매년 3월과 9월 신입사원 채용공고가 나면 채용전형이 끝나는 5월과 11월 말까지 사생활은 없다. 채용전형이 끝나면 신입사원 연수와 직원 인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상무가 오기 전까지는 휴일에도 일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놀더라도 사무실에서 노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 사정을 모르는 경영진은 “인사팀이 열심히 일한다”며 칭찬을 한다. 물정 모르는 경영진의 칭찬은 ‘일중독 바이러스’를 더 빠르고 강하게 퍼뜨렸다. 이제는 아무도 “왜 일도 없는데 휴일에 나와야 하지?”라고 말도 못 꺼낸다.
○ “담배 피우는 시간도 아깝다”
월요일 오전. 회의가 시작됐다. 상무는 신입사원 채용전형을 예정보다 더 빨리 진행하라고 채근했다. 임원단 회의에서 그런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또다시 야근을 해야 했지만 예상했던 일이라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어차피 야근을 하는 건 똑같다.
이날도 팀 전체가 햄버거로 점심을 때웠다. 빨리 먹고 조금이라도 부족한 잠을 자는 게 더 낫다. 햄버거를 먹는 동안 B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내였다.
“다음 주에 우리 애 돌인데, 친척들하고 식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 시간 내 봐야지.”
다음 주 토요일은 신입사원 채용 적성검사 날이다. 언제 퇴근할지 가늠이 안 된다. 그렇다고 근무에서 빠질 수도 없었다. 막막한 마음에 담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과장이 한마디 했다.
“야. 담배 피우는 시간도 아깝다. 얼른 피우고 들어와.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이 생활 하려면 체력 관리는 필수야. 운동이라도 하라고.”
담뱃불을 끄면서 마지막으로 운동을 한 게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더듬어봤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 대답 없는 아내
오후 9시. B 씨는 자신의 업무를 모두 끝냈지만 일찍 들어가겠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상무가 사무실로 들어와 말했다.
“오늘 비도 오는데 맥주나 한잔하지.”
모두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어쩔 수가 없다. 경험상 회사 생활의 성공은 능력이 결코 아니다. 능력은 있어도 윗사람 눈 밖에 난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수도 없이 봤다. 취기가 오른 상무는 2차를 외쳤고, 3차 노래방까지 이어졌다. 한 주를 회식으로 시작하는 ‘월요일 회식’은 인사팀의 낯설지 않은 행사 중 하나다.
오전 1시. 노래방에서 몰래 빠져나온 B 씨는 경기 화성시 동탄행 버스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아내에게 전화한다는 걸 깜박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오후 11시만 넘기면 애타게 남편을 찾던 아내였다. 그러나 이날도 아내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내일은 오늘보다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거라는 소박한 꿈을 꾸며 B 씨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자기야. 얼른 일어나. 회사 가야지.”
30분 동안 울려댄 알람 소리 때문에 짜증이 났는지 아내가 먼저 깼다. 어제도 새벽에 돌아왔고, 아내는 이미 자고 있었다. 서로 대화를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마지막 부부 관계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했다.
2년 전 결혼을 할 때는 앞으로 날마다 아침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소꿉장난하듯 아내와 함께 아침을 만들어 먹고 입맞춤을 나눈 뒤 출근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매일 오전 8시까지 서울로 출근해야 하는 B 씨도, 아이에게 하루 종일 시달린 아내도, ‘아침밥’보다는 ‘아침잠’이 더 소중했다. 대충 몸단장을 마친 뒤 어제와 같은 셔츠와 슈트를 입고 7시에 집을 나섰다.
“나 다녀올게. 오늘도 늦을 거야. 먼저 자.”
B 씨가 구두를 신으면서 말했지만 아내는 답이 없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1>‘회사의 늪’에 갇힌 어느 대기업 대리
“오, 자네도 나왔는가.”
국내 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어느 토요일. 서울의 대기업 A사 인사팀 대리 B 씨(34)는 이날도 어김없이 출근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거나 업무가 밀린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놀고만 있기가 불편했던 것. 놀더라도 차라리 사무실에서 노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B 씨 부서의 상무는 토요일에도 출근하겠다고 공언까지 한 상태였다. 직속 상관이 출근하는데 부하들이 쉴 수는 없었다.
“밀린 업무가 많아서요.” “허허. 다들 고생이 많구먼.”
인사를 받은 상무는 곧바로 TV를 켰다. 특별한 일이 없는지 이내 머리를 의자에 대고 잠이 들었다. B 씨도 회사 문서를 꺼냈지만 이내 졸음이 밀려왔다. 소설책을 꺼내 좀 보다가 컴퓨터로 ‘미드(미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 상무가 TV를 끄면서 말했다.
“다들 별다른 일 없으면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지.”
삼겹살로 시작된 이날 회식은 2차, 3차까지 이어졌다.
○ ‘일중독’ 전염병 바이러스
출근을 하지 않아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무는 주말에도 출근해 업무를 보다가 부하 직원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직원들은 휴일에도 24시간 휴대전화를 놓지 못한다.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싶었다. 그러나 상무의 전화는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족들 앞에서 상무와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미안했다. 결국 상무의 전화를 견디다 못한 직원들의 마지막 선택은 출근이었다.
B 씨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턴가 휴일에 집에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때도 수시로 휴대전화를 쳐다보는 버릇까지 생겼다. B 씨도 결국 출근을 택했다. 집에 있을 때보다 사무실에 있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그는 “일중독도 전염병이라는 것을 회사에 들어와서 처음 알았다”며 “이제는 쉬면 더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인사팀 업무는 원래 빡빡하기로 유명했다. 매년 3월과 9월 신입사원 채용공고가 나면 채용전형이 끝나는 5월과 11월 말까지 사생활은 없다. 채용전형이 끝나면 신입사원 연수와 직원 인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상무가 오기 전까지는 휴일에도 일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놀더라도 사무실에서 노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 사정을 모르는 경영진은 “인사팀이 열심히 일한다”며 칭찬을 한다. 물정 모르는 경영진의 칭찬은 ‘일중독 바이러스’를 더 빠르고 강하게 퍼뜨렸다. 이제는 아무도 “왜 일도 없는데 휴일에 나와야 하지?”라고 말도 못 꺼낸다.
○ “담배 피우는 시간도 아깝다”
월요일 오전. 회의가 시작됐다. 상무는 신입사원 채용전형을 예정보다 더 빨리 진행하라고 채근했다. 임원단 회의에서 그런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또다시 야근을 해야 했지만 예상했던 일이라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어차피 야근을 하는 건 똑같다.
이날도 팀 전체가 햄버거로 점심을 때웠다. 빨리 먹고 조금이라도 부족한 잠을 자는 게 더 낫다. 햄버거를 먹는 동안 B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내였다.
“다음 주에 우리 애 돌인데, 친척들하고 식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 시간 내 봐야지.”
다음 주 토요일은 신입사원 채용 적성검사 날이다. 언제 퇴근할지 가늠이 안 된다. 그렇다고 근무에서 빠질 수도 없었다. 막막한 마음에 담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과장이 한마디 했다.
“야. 담배 피우는 시간도 아깝다. 얼른 피우고 들어와.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이 생활 하려면 체력 관리는 필수야. 운동이라도 하라고.”
담뱃불을 끄면서 마지막으로 운동을 한 게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더듬어봤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 대답 없는 아내
오후 9시. B 씨는 자신의 업무를 모두 끝냈지만 일찍 들어가겠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상무가 사무실로 들어와 말했다.
“오늘 비도 오는데 맥주나 한잔하지.”
모두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어쩔 수가 없다. 경험상 회사 생활의 성공은 능력이 결코 아니다. 능력은 있어도 윗사람 눈 밖에 난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수도 없이 봤다. 취기가 오른 상무는 2차를 외쳤고, 3차 노래방까지 이어졌다. 한 주를 회식으로 시작하는 ‘월요일 회식’은 인사팀의 낯설지 않은 행사 중 하나다.
오전 1시. 노래방에서 몰래 빠져나온 B 씨는 경기 화성시 동탄행 버스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아내에게 전화한다는 걸 깜박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오후 11시만 넘기면 애타게 남편을 찾던 아내였다. 그러나 이날도 아내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내일은 오늘보다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거라는 소박한 꿈을 꾸며 B 씨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자기야. 얼른 일어나. 회사 가야지.”
30분 동안 울려댄 알람 소리 때문에 짜증이 났는지 아내가 먼저 깼다. 어제도 새벽에 돌아왔고, 아내는 이미 자고 있었다. 서로 대화를 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마지막 부부 관계가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했다.
2년 전 결혼을 할 때는 앞으로 날마다 아침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소꿉장난하듯 아내와 함께 아침을 만들어 먹고 입맞춤을 나눈 뒤 출근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매일 오전 8시까지 서울로 출근해야 하는 B 씨도, 아이에게 하루 종일 시달린 아내도, ‘아침밥’보다는 ‘아침잠’이 더 소중했다. 대충 몸단장을 마친 뒤 어제와 같은 셔츠와 슈트를 입고 7시에 집을 나섰다.
“나 다녀올게. 오늘도 늦을 거야. 먼저 자.”
B 씨가 구두를 신으면서 말했지만 아내는 답이 없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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