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유영]‘한국판 슬로 TV’ 고독한 공부 생방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입력 2019-03-29 03:00 수정 2019-03-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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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다음 달 초 9급 공무원 시험을 치르는 A 씨는 매일 ‘공부 생방송’을 내보낸다. 유튜브에서 반나절 이상 자신이 공부하는 모습을 실시간 스트리밍한다. 화면에는 제본된 두꺼운 책을 공부하는 손만 등장한다. 얼굴은 아예 안 나오고 책을 넘기는 장면이 이따금씩 나올 뿐이다. 대화도, 자막도, 편집도 없다. 밥 먹으러 자리를 비울 땐 ‘식사 중’이란 표지판을 놓고 사라진다. 그래도 방송은 쭉 이어진다.

극도로 단조로운 영상인데도 구독자는 4만 명을 넘는다. 2017년 개설 이후 누적 조회수도 400만 건을 넘었다. 일명 ‘스터디 위드 미(Study with me·같이 공부해요)’ 방송이다. 한때 북유럽 한 방송사가 해안가 철로를 달리는 열차 밖을 7시간 동안 찍어서 내보낸 ‘슬로 TV’가 인기를 끌었는데, 공부 생방송은 ‘한국판 슬로 TV’라고 할 법하다.

A 씨는 관종(관심 종자)일까? 아니다. 그는 “남들이 지켜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그 나름의 합리적 이유를 갖고 방송에 임한다. 공부 생방송을 보는 수험생들의 심리도 비슷하다. 공부하려 앉으면 스마트폰으로 딴짓하고 싶어지는데,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켜놓으면 공부에 몰입하고 수험생을 보며 자극받는다는 것이다. 먹방을 보면 먹고 싶어지듯 ‘공방’을 보면 공부하고 싶어진다는 설명이다.

공부 생방송은 수험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사회적 지지 역할을 해준다. 화면 오른쪽 옆 채팅창에서는 ‘과도한 친목’을 금하기 위해 10분 이내의 대화를 권장하는데, 매일 500명 안팎이 접속해 ‘멘털 붙잡고 힘냅시다’, ‘졸리고 지치는데 방송 보니 힘이 나네요’ 등 응원 글을 쏟아낸다.

여럿이 24시간 공부 방송을 하는 채널도 있다. 세무사 시험 준비생이 운영하는 ‘내 옆자리 남자’에서는 운영자를 포함해 9명이 각각 공부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특정 링크를 클릭하면 자신이 공부하는 모습을 분할된 화면에 띄우는 방식이다. ‘올빼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에는 녹화한 공부 방송을 틀어 무한 방송을 이어간다. 언제나 같이 공부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이들 공부 생방송에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시험에서 못 벗어나는 ‘수험사회’ 한국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공무원 시험은 물론 교사 임용고시,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PEET) 등 다양하지만 수험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두고 판을 벌여 모여드는 이들에게 공부 생방송을 태운 유튜브는 고독(solitude)하게 공부할지언정 외로움(loneliness)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커뮤니티다. 설문조사 업체인 오픈서베이에 따르면 10, 20대는 유튜브를 하는 이유로 ‘댓글 등 다른 사람 반응을 보려고’(각각 56.1%, 48.6%)를 가장 많이 꼽았다. ‘궁금한 내용을 영상으로 보려고’ 유튜브를 하는 40, 50대(각각 61.5%, 70.7%)와는 다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하지 않거나 일하지 못하는 청년이 200만 명에 육박한다. 누군가는 청춘들이 수험 생활에 매달리는 것을 사회적 손실로 보고 누군가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 이들을 도전적이지 않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민간에 좋은 일자리가 충분치 않고 때때로 채용 비리, 채용 갑질 등이 빚어지는 마당에 학력·학벌에서 차별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나마 공정한 절차에 도전하는 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북유럽 슬로 TV의 해안가 풍광이 비좁은 책상 화면으로 치환된 지극히 한국적인 슬로 TV를 보고 안쓰러움이 밀려오는 것도 잠시, 답답하기 그지없는 현실에서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낸 청춘들의 건투를 빌기로 했다. 잘못은 수험사회가 했으니까 말이다.

김유영 디지털뉴스팀 차장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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