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위한 영상 더빙…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쉬운 나눔이죠”

김수연 기자

입력 2019-02-28 03:00 수정 2019-02-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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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더빙 서비스 ‘헬렌’ 만든 유니크굿컴퍼니 이은영-송인혁 대표

유튜브가 ‘제1의 검색엔진’이라고 불리는 시대다. 모든 것을 글이 아닌 영상으로 배우는 게 유행이 됐다. 영어를 몰라도 영상 아래 달린 자막으로 언어의 장벽 없이 명사의 연설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흐름에서 여전히 소외된 이들이 있다. 화면 속 자막을 읽기 힘든 시각장애인들이다.

이들을 위한 오픈 더빙 솔루션 ‘헬렌’이 등장했다. ‘열린 번역 시스템’(OTP)이 미국 비영리 재단에서 운영하는 강연 플랫폼인 테드(TED)나 유튜브에 손쉽게 자막을 다는 것이라면 ‘열린 더빙 시스템’(ODP)은 누구나 쉽게 자막을 더빙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이 서비스를 최근 론칭한 유니크굿컴퍼니의 이은영, 송인혁 공동대표를 18일 서울 성동구 공유오피스 헤이그라운드에서 만났다.

두 대표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송 대표는 삼성전자 엔지니어 출신이고, 이 대표는 신세계에서 11년간 일했다. 두 사람은 사내교육 담당자와 강연자로 처음 만났고, 2017년 유니크굿컴퍼니를 설립하며 사업 파트너가 됐다.

“2000년대 말 테드를 접하고 한국에 도입했어요. 우리나라 강연문화의 시초죠. 테드의 핵심은 ‘확산 가치가 있는 지식’인데, 틈틈이 테드 자막을 번역하거나 그 번역본을 리뷰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송 대표)

“대기업 교육담당자로서 ‘받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싫은 것 말고 더 나은 사회공헌은 없을까’ 항상 고민했어요.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있다면, 시각장애인을 위한 ‘더빙’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이 대표)

이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오픈 더빙 서비스의 이름은 ‘헬렌’이다. 우리가 아는 그 헬렌 켈러다. 다발성 장애를 가졌지만 기존의 벽을 뛰어넘은 상징적 의미가 큰 인물이다. 송 대표는 “장애인이면서 동시에 사회혁신 운동가이기에 그 뜻을 담아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헬렌의 작동 원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예컨대 명사의 강연이 올라오면 그 아래 해당 연설이 문장 단위로 쪼개져 나열된 것을 볼 수 있다. 녹음 버튼을 눌러 문장별로 더빙을 하고, 제대로 됐는지 재생해서 검토해볼 수 있다. 이 녹음 절차가 다 끝나면 시각장애인이 영상을 재생했을 때 자막이 더빙된 음성이 흘러나오게 된다. 앞을 제대로 못 보거나 글을 읽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영상을 즐길 수 있다.

시스템은 지난해 10월경 완성됐고, 출시된 지 얼마 안 됐지만 벌서 700여 개의 콘텐츠 더빙이 완성됐다. 틀에 박힌 봉사활동 대신 임직원들과 함께 더빙 작업에 참여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마이크와 노트북만 있다면 어디서든 가능하기 때문에 참여하기가 무척 간편하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각종 음향기술도 발달한 이 시대에 굳이 사람이 더빙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자막만 입력하면 곧장 음성으로 변환시켜 주는 기술은 지금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보통 기계로 처리된 음성은 길게 듣는 게 쉽지 않다. 인간 특유의 추임새, 감정 등은 기계가 쉽게 모방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누군가는 시각장애인이 점자로도 자막을 읽을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장애인의 속사정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송 대표는 “중증 시각장애인의 상당수가 후천적인 사고나 질병으로 시력을 잃은 케이스”라며 “아주 어릴 적 점자를 배우지 않은 시각장애인들에겐 점자로 된 자막도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특히 이들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큰 장벽을 느낀다. 외국어를 영상으로 배우는 시대에 이들을 위한 더빙 서비스가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헬렌 서비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재능기부 하듯 더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도 좋은 프로그램이다. 일단 영상을 보고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문장씩 녹음하는 과정에서 콘텐츠 습득력이 상당히 높아질 수 있다. 특히 학생들은 말하기 연습과 더불어 봉사활동을 통해 자의식이나 자존감을 높이는 효과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교육적 측면에서도 긍정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이 서비스는 지난해 말 SK그룹이 주관한 ‘사회적 성과 인센티브 프로젝트’ 참여 기업으로 선정됐다. 사회적 기업이 창출한 가치를 화폐 단위로 측정해 이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다. 또 내달 7일에는 사회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사회 혁신가들의 네트워크 행사인 제7회 SIT(Social Innovators Table)의 발표 사례로 콘퍼런스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혁신 방법―일상 속 참여 문화 확산의 새로운 가능성’이란 주제의 모범사례로 낙점된 것이다.

송 대표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헬렌은 외국인들도 우리말로 영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통로로 활용될 것”이라며 “단순히 장애인들이 더빙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뛰어넘어 직접 더빙에 참여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도록 공간과 교육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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