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cm 높이 턱이 큰 벽처럼 느껴져…5분 지체장애체험에 식은땀 ‘줄줄’
김자현 기자
입력 2018-12-26 10:43 수정 2018-12-26 11:06
“빵빵, 빵빵”.
귀를 울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불안감이 커지며 내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운전자는 빨간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운전석에 앉아서 경적을 눌러댔다. 내가 타고 있는 휠체어에 바짝 차를 댄 그는 ‘빨리 안 지나가고 뭐하느냐’고 묻듯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동시에 그는 차량의 흰색 라이트를 발사하듯 깜빡였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휠체어를 조종해 앞으로 가려 했지만 마음이 급하니 방향을 제대로 잡기 어려웠다. 비틀거리며 느리게 이동하는 휠체어에 앉아 ‘빨리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질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라는 말만 머리 속에 맴돌 뿐이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자꾸만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24일 본보 취재진이 가상현실(VR) 시뮬레이터를 통해 경험한 지체장애체험의 한 장면이다. 취재진은 경기 고양시 덕양행신장애인주간보호센터에서 27일 열리는 국내 최초의 VR 지체장애체험회를 앞두고 이날 서울 구로구의 VR 기술 협력사 ‘페리굿’을 방문해 직접 VR 지체장애 체험에 참여했다.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5분간의 장애인 체험에 식은땀 줄줄
가상현실 속 지체장애 체험에 걸린 시간은 약 5분. 먼저 전동휠체어 모형의 VR시뮬레이터에 앉아 고글을 착용하자 눈앞으로 가상현실 속 세상이 펼쳐졌다. 전동휠체어를 운전하듯 손가락 버튼을 누르며 가상현실 영상 속에서 휠체어를 움직여나갔다. 시작 장소에서부터 몇 가지 미션을 수행하면서 복지관까지 가는 것이었다.
먼저 보도에 불법 주·정차 차량을 피해 휠체어를 운전하는 간단해 보이는 미션. 보도가 협소해 자칫 차를 피하다가 차도 쪽으로 이탈 할 수도 있어 휠체어를 천천히 몰았다. 하지만 웬걸, 불법 주·정차 차량은 피했다 싶었는데 앞만 보고 가다보니 아래쪽 보도블록이 노후해 파여 있었던 것을 살피지 못했다. 휠체어가 휘청거리더니 파인 구멍에 바퀴가 빠져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다. 휠체어와 함께 몸도 기울어 위험한 상황이 됐다. 결국 주변의 도움을 받아 위기 상황을 넘겨야 했다.
이어 길 건너 편의점에 가는 미션. 직진이라 순탄하게 입구로 들어서려는 순간 다시 ‘덜컹’. 휠체어 앞에 약 20cm 높이의 턱이 있었다. 휠체어를 탄 기자에게는 그 작은 턱이 큰 벽이었다. 평소라면 한 걸음에 넘을 수 있는 높이인데 휠체어로는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경사로를 설치하고 겨우 들어가니 다시 한숨의 연속. 아무리 손을 위로 뻗어도 위쪽 매대에 있는 치약은 멀기만 했다. 연신 손을 허우적대다가 결국 점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시 편의점에서 나와 복지관으로 향하는 길.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지나 보도 위를 지나는데 반대편 코너에서 전동킥보드가 빠르게 달려왔다. “잠시만요”라고 말할 틈도 없이 “어, 어,” 당황하다가 결국 “꽝”. 눈앞엔 하늘이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으로 나뒹굴고 있는 휠체어. ‘아, 힘들다.’ 다시 주변의 도움을 받고서야 복지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5분, 길지 않은 시간인데 체험이 끝나니 이마와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추가로 올해 초부터 만들어 운영중인 시각장애 VR체험도 이어졌다. 눈에 얼룩이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려지는 ‘비특이성 시력장애’를 겪으며 10조각 남짓의 간단한 퍼즐을 맞춰야 했다. 평소 30초도 안돼 끝낼 퍼즐을 3분 넘도록 붙잡고 있어야했다. 안개가 낀 듯 눈앞이 뿌옇게 된 ‘매질혼탁’ 상황에서 마주한 화재상황은 더욱 끔찍했다. 가뜩이나 연기마저 가득한 상황에서 비상탈출용 망치를 찾거나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탈출시간이 오래 걸리니 이러다 꼼짝없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장애-비장애 벽 허무는 신기술
다행히 VR시뮬레이터에서는 기자가 VR 장애체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위기를 마주할 때마다 예상하기라도 한 듯 친절한 안내 멘트와 설명이 나왔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운전자들의 경적소리를 마주한 경우 “전동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은 안전을 위해서 서행합니다. 무심코 던진 시선이 장애인들에게는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안내가 나오는 식이었다. 평소 비장애 운전자 위치에 가깝던 기자에게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VR 기술과 접목된 장애체험은 기존 장애체험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공감대를 키우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획기적 시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기존의 장애체험이 휠체어를 밀고 턱을 넘는 등 불편을 경험해보는 정도에 그쳤다면, 가상현실 속에서는 실제 충돌사고 상황이나 화재 등 재난상황 까지 겪게 된다. 단순히 장애 ‘체험’이 아니라 가상현실 속에서 ‘나’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일상생활의 어려움과 재난상황을 직접 체험하게 돼 장애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최초로 VR 기술에 지체장애 체험을 접목한 덕양행신장애인주간보호센터는 앞으로도 VR 등 신기술을 장애인식개선 콘텐츠와 적극적으로 연결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상근 고양시 덕양행신장애인주간보호센터 사무국장은 “VR 기술은 비장애인과 장애인들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라며 “앞으로는 지적장애 체험 콘텐츠나 장애인들의 여행·스포츠 체험 등을 도울 수 있는 콘텐츠 발굴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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