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구두’에 깃든 故 조양호 회장 경영철학…“소탈함으로 완성된 책임감”

동아닷컴 김민범 기자

입력 2019-05-08 06:45 수정 2019-05-08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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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세상과 작별한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남긴 소탈한 삶의 흔적들이 뒤늦게 주목받고 있다. 조 회장과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들은 검소하고 소탈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조 회장의 검소하고 소탈했던 모습은 평소 입고 신었던 옷과 구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조 회장은 평소 꼭 필요하지 않은 것 이외에는 낭비하지 않는 철칙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신발의 경우 한 번 구입한 구두는 10년 가까이 신은 것으로 전해졌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낡은 구두를 통해 조 회장의 소탈한 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조 회장은 고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시절 현지 상류층 자녀들이 여행을 갈 때 독특한 점을 발견했다. 금전적 여유가 있음에도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대신 직접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빌린 후 나중에 갚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 상류층 자녀들의 태도는 조 회장에게 큰 울림을 줬다. 조 회장의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은 학창 시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교 시절 나선 유럽 배낭여행길에서는 열차를 타고 다니며 1~2달러짜리 여인숙을 전전했다는 후문이다. 선친인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궁색하게 보이지 말라며 준 3000달러(약 350만 원) 여행비는 대부분 돌려준 것으로 전해졌다.
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신었던 낡은 구두
십여 년 전에는 구입한 지 10년이 넘은 서류 가방을 대신할 새로운 가방 구매를 고민하다가 결국 빈손으로 매장을 나선 일화도 소탈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기업 총수 자리에 오른 후에도 검소한 삶의 태도가 이어진 것이다.

소박한 음식 취향도 눈길을 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평소 조 회장은 간편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나 자장면을 즐겼다. 특히 임직원과 식사를 할 때도 이 메뉴가 자주 나왔다는 설명이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와 조직위원회 시절에는 소박한 조 회장 음식 취향이 올림픽 관계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소탈하고 검소한 성격은 업무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검소한 습관으로 잡념 없이 오로지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것이다. ‘일 벌레’로 알려진 조 회장은 무엇이든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취미 역시 모두 일과 연관됐다. 몇 안 되는 취미로 알려진 여행은 신규 수요 개척을 위한 업무 연장선이었다. 사진은 이를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 ‘플라이트 시뮬레이션(Flight Simulation)’이라는 게임을 종종 즐겼는데 이 역시 항공기 운항 업무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술과 담배를 멀리한 조 회장은 성실한 경영인으로도 잘 알려졌다. 출근 시간은 오전 7시 30분을 넘기지 않았다.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현상을 파악하고 분석해 행동을 추진하는 데 매진했다. 출장이나 휴일 등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아침 8시 반부터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 방식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임원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현안에 대해 가장 효율적이고 적합한 해결 방안을 도출하는 데 공 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조 회장은 시간 낭비도 경계했다. 특별한 약속이 아니면 간단하고 빠르게 식사할 수 있는 메뉴를 선호했다. 샌드위치를 즐겨 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아낀 시간은 현장에 쏟고자 했다. 조 회장은 회사를 이끌면서 소비자 요구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현장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사무실에 있는 시간보다 현장에 가는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

직원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지난 2010년에는 임파선암 판정을 받은 직원을 미국 암전문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도록 한 것으로 전해졌다. 퇴직한 임원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룹을 이끄는 막중한 역할을 맡으면서 결과에 대한 부담은 책임감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너경영’ 필요성을 줄곧 강조한 가장 큰 요인이다. 조 회장은 잠깐 머무는 전문경영인과 달리 오너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 영속성을 고민한다고 믿었다. 이는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녹아들었다. 조 회장은 일생 동안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을 특별하게 아꼈다. 아끼는 회사가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이를 통해 회사가 다시 성장하는 데 마음과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돌볼 시간을 갖지 못해 평생을 일궈낸 하늘로 돌아가게 됐다.

조 회장이 남긴 족적은 대한민국 항공 산업 역사에 고스란히 남았다. 다음 달 그가 일생의 숙원으로 여긴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연차총회가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최된다. IATA 연차총회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항공 산업의 위상을 높이는 역사적인 순간이지만 이를 이끌어 낸 조 회장은 그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됐다. 과거 조 회장이 말한 언론 인터뷰 내용이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조 회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대한항공이 ‘존경받을 수 있는 항공사(Respectable Airline)’으로 남길 바란다”며 “우리가 한다고 하면 다른 회사에서 대한항공이 한다고 하니 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이런 평가를 받는 게 목표다”고 말했다.
동아닷컴 김민범 기자 mb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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