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마지막 한 대가 달릴 때까지… 사랑해, 엘란
동아일보
입력 2012-06-21 03:00 수정 2012-06-21 10:30
13년전 단종된 비운의 스포츠카 ‘엘란’을 타는 사람들
《 “한국 최초의 정통 스포츠카를 소개합니다!” 1996년 7월 1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리츠칼튼호텔의 신차발표회장에서 날렵한 빨간색 스포츠카가 눈부신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이 차는 어떻게 개발했습니까?” “몇 대나 팔 건가요?” 행사장에 몰린 400여 명의 취재진과 외부 인사는 기아자동차 사람들을 붙잡고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
평소 입버릇처럼 “1년에 차 100만 대를 만드는 회사가 스포츠카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느냐”며 주위를 다그치던 그였다. 스포츠카 제휴생산을 위해 일본 마쓰다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일, ‘적자가 뻔하다’던 회사 내부의 반대 등 엘란을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온갖 어려움이 머리에 스쳤다.
개발비 1100억 원. 영국 로터스의 기술과 생산설비를 인수해 1996년 출시. 불과 3년 만인 1999년 생산 중단. 누적 생산대수 1055대라는 상업적 실패. 그리고 기아차의 부도…. 기아차 최초의 정통 컨버터블(지붕 개폐형) 스포츠카 ‘엘란’. 그 끝없는 우여곡절의 시작이었다.
○ 자동차와 사랑에 빠지다
1996년도 대입시험을 갓 마치고 여유를 만끽하던 열여덟 살 고등학생 한웅수 씨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모델하우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곳에 놓인 매끈한 빨간색 스포츠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요동쳤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PC통신 ‘천리안’에 접속해 정신없이 게시판을 뒤졌다. ‘엘란’. 자나 깨나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대학생이 된 1997년 3월. 한 씨는 천리안 동호회 ‘엘란마니아’ 정기모임에 나갔다. 봄날의 경기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에는 5대의 엘란이 모였다. 기아차의 최윤수 엘란 개발팀 과장이 선두차량을 타고 행렬을 지휘했다. 한 씨는 그해 엘란을 샀다. 쏘나타 2대 값인 2750만 원. 서울예대에 다니던 중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 덕분에 돈을 마련했다. 배우 정우성 박신양 이미연 등과 함께 찍은 영화 ‘모텔 선인장’은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 아시아신인감독상, 스위스 프리보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히트를 쳤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 씨는 노란색 엘란을 처음 만났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차를 끌고 나섰다. 하지만 아뿔싸. 서투른 운전 탓에 차를 벽에 긁었다. 엘란을 타기 위해 오토 면허를 1종 수동으로 바꿔 딴 지 이틀 만이었다. 수동 운전에 익숙지 않아 방향을 제대로 못 틀고 직진만 하다가 낯선 시골동네까지 가버렸다.
그날 이후 한 씨는 엘란과 사랑에 빠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차를 끌고 다녔다. 운전 실력은 점차 늘었다. 기아차는 엘란 구매자들을 충남 아산시 시험주행장으로 불러 전문 드라이빙 교육을 해줬다.
자신감이 지나쳤을까. 1999년, 한 씨의 엘란은 팔당댐 앞 코너에서 미끄러져 높이 30m의 계곡 아래로 7바퀴 반을 굴러 떨어졌다. 차는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졌다.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기적이었다. 주인 대신 차가 죽은 셈이다. 몸보다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든 다시 엘란을 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 차대번호 1056번, 마지막 엘란
“뉴스를 말씀드립니다. 기아그룹이 부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뚜렷한 대주주가 없던 기아는 강성 노조와 사내 비리로 내홍을 겪어왔으며….”
한 씨가 새 차를 다시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외환위기로 휘청거리던 기아그룹은 1997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현대차에 인수됐다. 조립공정 대부분이 수제작(手製作)이고 판매량도 밑바닥을 기던 애물단지 엘란은 버려야 할 짐이었다.
1999년 10월 31일. 한 씨는 안산시 기아모텍 공장을 찾았다. 기아모텍은 엘란 생산을 도맡던 기아그룹의 계열사였다. 엘란 전담수리반의 서광모 반장은 엘란을 다시 타고 싶어 하는 한 씨에게 차를 조립해 주기 위해 창고에 있던 차체 뼈대를 꺼냈다. 차대번호 1056번. 엘란의 공식적인 생산대수는 1055대. 서 반장이 한 씨에게 비공식적으로 조립해준 차가 마지막 엘란이었다. 기아모텍은 이 차의 출고를 끝으로 공장 문을 닫았다. 퇴진 압박에 시달리던 김선홍 회장은 사표를 냈다.
엘란 개발팀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재고물량은 30%를 할인해 ‘떨이’로 팔았다. 기아모텍은 2000년 이름을 모텍코리아로 바꾸고 재기를 시도했지만 이듬해 부도가 났다. 엘란 공장은 2002년 법원 경매에 올랐다. 감정가 369억 원. 엘란 개발비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공장은 용지, 설비 등으로 뿔뿔이 나뉘어 팔렸다. 전형석 엘란 개발팀장은 공장의 설비 일부를 인수하고 재기를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개발진의 땀과 눈물로 얼룩진 설계 도면은 전 씨의 평촌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 “나는 아직 달릴 수 있어요”
공장은 멈춰 섰지만 서 반장은 한동안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비소를 찾아와 이런저런 주문을 늘어놓는 동호회 ‘클럽 엘란’ 회원들 때문이었다.
서 반장은 2000년 기아모텍에서 퇴사해 자동차 수리(AS) 업체를 차렸다. 이름은 ‘카메딕’. 자동차(Car)와 위생병(Medic)을 합친 이름이다. 기아차는 경기 시흥 정비소에 엘란 전담반을 만들어주고 서 반장에게 일을 맡겼다.
서 반장은 수출물량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판매된 엘란 800여 대를 모두 만져봤다. 엘란을 타며 자동차 전문 지식을 쌓은 클럽 엘란 회원들의 수리 요구조건이 만만치 않았다. 기아차는 더이상 구할 수 없는 부품을 대주기 위해 수억 원을 들여 새 설비를 만들어야 했다.
업체 직원과 고객으로 만난 사이는 시간이 흐르며 ‘형님, 아우’로 바뀌었다. 엘란의 주인들은 고장 문제를 놓고 티격태격하다가도 이튿날이면 음료수를 들고 찾아왔다. 변변한 냉방 설비도 없는 정비공장에 선풍기를 놓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엘란 주인들의 발길은 점차 뜸해졌다. 서 반장은 일이 없을 때는 직원들과 함께 엘란 부품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기름때가 덕지덕지한 부품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나는 아직 달릴 수 있어요”라고.
그리움이 더해갔다. 서 반장은 중국으로 떠났던 전형석 엘란 개발팀장을 찾았다. 마음이 통했던 걸까. 전 팀장도 엘란을 되살리려 하고 있었다. 스포츠카를 제작하기 위해 2003년 ‘동풍기연’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엘란에 청춘을 바친 두 사람은 엘란을 재생산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투자자를 찾아서 백방을 뛰어다녔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 안녕, 엘란
“저… 이 차, 얼마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2008년 서 반장은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엘란을 팔았다.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을 줘야 했기 때문이다. 2005년 전기차 회사인 ‘세경이브이’를 차렸지만 사업이 쉽지 않았다.
그는 엘란의 빈 자리를 볼 때마다 마음이 뻥 뚫린 듯했다.
뒤늦게 사장의 차가 사라진 걸 알게 된 직원들은 폐차장에서 부품을 모아다가 서 반장에게 새 엘란을 조립해 주었다. 자동차 전문가들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서 반장은 기운을 차렸다.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전기차업체인 CT&T가 동풍기연을 인수해 시티스퀘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엘란을 고속 전기차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2010년 1월.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엘란 전기차의 시제품이 등장했다. 감개무량한 부활인가 싶었다. 엘란을 만들었던 ‘어제의 용사들’은 다시 뭉쳤다. 신바람이 나서 개발에 매달렸다.
하지만 엘란에 저주라도 걸린 걸까. 지독한 불운이 다시 찾아왔다. 엘란 전기차 출시를 준비하던 CT&T가 다른 전기차의 판매 부진으로 2012년 5월 주식시장 상장폐지가 결정된 것이다. 또 이보다 한 달 앞선 4월, 카메딕의 엘란 전담수리 계약도 끝났다. 쓰던 장비와 기술은 새로 엘란 수리를 맡은 대성공업사에 넘겼다. 그 모질던 명맥, 이제는 정말로 끝이었다.
○ 마지막 한 대가 달릴 때까지
“이걸 어떻게 돈으로 따지겠어요. 내 몸의 일부인데….”
19일 경기 하남시 망월동. 고등학교 때 엘란에 반했던 한웅수 씨(34)는 이제 자동차 튜닝업체 플랜비모터스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엘란을 만나 알게 된 자동차의 즐거움, 부품 하나하나를 바꿔가며 새 생명을 얻어가는 차를 볼 때의 기쁨을 알리고 싶어 이 사업을 시작했다. 한 씨는 이제 수십 대의 차를 갖고 있다. 엘란은 1년에 한두 번쯤 타는 정도다. 그래도 가끔 옛 생각에 사로잡힌다. 동호회원들이 수십 대의 엘란을 타고 떠난 MT(수련회),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밤마다 동호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던 서울 청담도로공원….
경기 여주군에서 전기차 회사인 ‘세경이브이’를 운영하는 서 반장도 가끔 엘란에 대한 ‘향수’에 젖는다. 엘란을 수리해주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동호회 ‘클럽 엘란’ 사람들도 그립다.
엘란의 생산대수 1055대 가운데 독일과 일본에 각각 100대가 수출됐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팔렸다. 아직까지도 300여 대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5월 20일. 경기 광주시 곤지암리조트에서는 클럽 엘란의 연례 정기모임인 ‘엘란 데이’ 10회째가 열렸다. 100여 대의 엘란과 동호회원 및 가족 15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회원들은 10주년을 자축하며 차량 100여 대로 ‘로마자 10(Ⅹ)’을 만들었다. 이들은 ‘마지막 한 대가 남을 때까지’ 모임을 이어갈 계획이다.
하남·여주=이진석 기자 gene@donga.com
《 “한국 최초의 정통 스포츠카를 소개합니다!” 1996년 7월 16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리츠칼튼호텔의 신차발표회장에서 날렵한 빨간색 스포츠카가 눈부신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이 차는 어떻게 개발했습니까?” “몇 대나 팔 건가요?” 행사장에 몰린 400여 명의 취재진과 외부 인사는 기아자동차 사람들을 붙잡고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
평소 입버릇처럼 “1년에 차 100만 대를 만드는 회사가 스포츠카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느냐”며 주위를 다그치던 그였다. 스포츠카 제휴생산을 위해 일본 마쓰다에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일, ‘적자가 뻔하다’던 회사 내부의 반대 등 엘란을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온갖 어려움이 머리에 스쳤다.
개발비 1100억 원. 영국 로터스의 기술과 생산설비를 인수해 1996년 출시. 불과 3년 만인 1999년 생산 중단. 누적 생산대수 1055대라는 상업적 실패. 그리고 기아차의 부도…. 기아차 최초의 정통 컨버터블(지붕 개폐형) 스포츠카 ‘엘란’. 그 끝없는 우여곡절의 시작이었다.
○ 자동차와 사랑에 빠지다
엘란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한웅수 씨. 그가 13년째 타고 있는 엘란은 1999년 단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조립된 차다. 하남=이진석 기자 gene@donga.com
‘우와. 저건 무슨 차지? 페라리인가?’1996년도 대입시험을 갓 마치고 여유를 만끽하던 열여덟 살 고등학생 한웅수 씨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모델하우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곳에 놓인 매끈한 빨간색 스포츠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요동쳤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PC통신 ‘천리안’에 접속해 정신없이 게시판을 뒤졌다. ‘엘란’. 자나 깨나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대학생이 된 1997년 3월. 한 씨는 천리안 동호회 ‘엘란마니아’ 정기모임에 나갔다. 봄날의 경기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에는 5대의 엘란이 모였다. 기아차의 최윤수 엘란 개발팀 과장이 선두차량을 타고 행렬을 지휘했다. 한 씨는 그해 엘란을 샀다. 쏘나타 2대 값인 2750만 원. 서울예대에 다니던 중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 덕분에 돈을 마련했다. 배우 정우성 박신양 이미연 등과 함께 찍은 영화 ‘모텔 선인장’은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 아시아신인감독상, 스위스 프리보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으며 히트를 쳤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 씨는 노란색 엘란을 처음 만났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차를 끌고 나섰다. 하지만 아뿔싸. 서투른 운전 탓에 차를 벽에 긁었다. 엘란을 타기 위해 오토 면허를 1종 수동으로 바꿔 딴 지 이틀 만이었다. 수동 운전에 익숙지 않아 방향을 제대로 못 틀고 직진만 하다가 낯선 시골동네까지 가버렸다.
그날 이후 한 씨는 엘란과 사랑에 빠졌다. 하루도 쉬지 않고 차를 끌고 다녔다. 운전 실력은 점차 늘었다. 기아차는 엘란 구매자들을 충남 아산시 시험주행장으로 불러 전문 드라이빙 교육을 해줬다.
자신감이 지나쳤을까. 1999년, 한 씨의 엘란은 팔당댐 앞 코너에서 미끄러져 높이 30m의 계곡 아래로 7바퀴 반을 굴러 떨어졌다. 차는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졌다.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기적이었다. 주인 대신 차가 죽은 셈이다. 몸보다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든 다시 엘란을 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 차대번호 1056번, 마지막 엘란
“뉴스를 말씀드립니다. 기아그룹이 부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뚜렷한 대주주가 없던 기아는 강성 노조와 사내 비리로 내홍을 겪어왔으며….”
한 씨가 새 차를 다시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외환위기로 휘청거리던 기아그룹은 1997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현대차에 인수됐다. 조립공정 대부분이 수제작(手製作)이고 판매량도 밑바닥을 기던 애물단지 엘란은 버려야 할 짐이었다.
1999년 10월 31일. 한 씨는 안산시 기아모텍 공장을 찾았다. 기아모텍은 엘란 생산을 도맡던 기아그룹의 계열사였다. 엘란 전담수리반의 서광모 반장은 엘란을 다시 타고 싶어 하는 한 씨에게 차를 조립해 주기 위해 창고에 있던 차체 뼈대를 꺼냈다. 차대번호 1056번. 엘란의 공식적인 생산대수는 1055대. 서 반장이 한 씨에게 비공식적으로 조립해준 차가 마지막 엘란이었다. 기아모텍은 이 차의 출고를 끝으로 공장 문을 닫았다. 퇴진 압박에 시달리던 김선홍 회장은 사표를 냈다.
엘란 개발팀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재고물량은 30%를 할인해 ‘떨이’로 팔았다. 기아모텍은 2000년 이름을 모텍코리아로 바꾸고 재기를 시도했지만 이듬해 부도가 났다. 엘란 공장은 2002년 법원 경매에 올랐다. 감정가 369억 원. 엘란 개발비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공장은 용지, 설비 등으로 뿔뿔이 나뉘어 팔렸다. 전형석 엘란 개발팀장은 공장의 설비 일부를 인수하고 재기를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개발진의 땀과 눈물로 얼룩진 설계 도면은 전 씨의 평촌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 “나는 아직 달릴 수 있어요”
경기 여주군에서 전기차업체 ‘세경이브이’를 운영하는 서광모 대표가 자신의 애마인 ‘엘란’을 타고있다. 직원들이 부품을 모아 그를 위해 조립해준 차다. 한때 엘란 수리 전문업체를 차렸던 서 대표는 전기스포츠카 개발을 통해 엘란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여주=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반장님, 차 좀 어떻게 해주세요. 자꾸 비가 새잖아요.”공장은 멈춰 섰지만 서 반장은 한동안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비소를 찾아와 이런저런 주문을 늘어놓는 동호회 ‘클럽 엘란’ 회원들 때문이었다.
서 반장은 2000년 기아모텍에서 퇴사해 자동차 수리(AS) 업체를 차렸다. 이름은 ‘카메딕’. 자동차(Car)와 위생병(Medic)을 합친 이름이다. 기아차는 경기 시흥 정비소에 엘란 전담반을 만들어주고 서 반장에게 일을 맡겼다.
서 반장은 수출물량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판매된 엘란 800여 대를 모두 만져봤다. 엘란을 타며 자동차 전문 지식을 쌓은 클럽 엘란 회원들의 수리 요구조건이 만만치 않았다. 기아차는 더이상 구할 수 없는 부품을 대주기 위해 수억 원을 들여 새 설비를 만들어야 했다.
업체 직원과 고객으로 만난 사이는 시간이 흐르며 ‘형님, 아우’로 바뀌었다. 엘란의 주인들은 고장 문제를 놓고 티격태격하다가도 이튿날이면 음료수를 들고 찾아왔다. 변변한 냉방 설비도 없는 정비공장에 선풍기를 놓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엘란 주인들의 발길은 점차 뜸해졌다. 서 반장은 일이 없을 때는 직원들과 함께 엘란 부품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기름때가 덕지덕지한 부품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나는 아직 달릴 수 있어요”라고.
그리움이 더해갔다. 서 반장은 중국으로 떠났던 전형석 엘란 개발팀장을 찾았다. 마음이 통했던 걸까. 전 팀장도 엘란을 되살리려 하고 있었다. 스포츠카를 제작하기 위해 2003년 ‘동풍기연’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엘란에 청춘을 바친 두 사람은 엘란을 재생산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투자자를 찾아서 백방을 뛰어다녔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 안녕, 엘란
“저… 이 차, 얼마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2008년 서 반장은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엘란을 팔았다.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을 줘야 했기 때문이다. 2005년 전기차 회사인 ‘세경이브이’를 차렸지만 사업이 쉽지 않았다.
그는 엘란의 빈 자리를 볼 때마다 마음이 뻥 뚫린 듯했다.
뒤늦게 사장의 차가 사라진 걸 알게 된 직원들은 폐차장에서 부품을 모아다가 서 반장에게 새 엘란을 조립해 주었다. 자동차 전문가들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서 반장은 기운을 차렸다.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전기차업체인 CT&T가 동풍기연을 인수해 시티스퀘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엘란을 고속 전기차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2010년 1월.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엘란 전기차의 시제품이 등장했다. 감개무량한 부활인가 싶었다. 엘란을 만들었던 ‘어제의 용사들’은 다시 뭉쳤다. 신바람이 나서 개발에 매달렸다.
하지만 엘란에 저주라도 걸린 걸까. 지독한 불운이 다시 찾아왔다. 엘란 전기차 출시를 준비하던 CT&T가 다른 전기차의 판매 부진으로 2012년 5월 주식시장 상장폐지가 결정된 것이다. 또 이보다 한 달 앞선 4월, 카메딕의 엘란 전담수리 계약도 끝났다. 쓰던 장비와 기술은 새로 엘란 수리를 맡은 대성공업사에 넘겼다. 그 모질던 명맥, 이제는 정말로 끝이었다.
○ 마지막 한 대가 달릴 때까지
“이걸 어떻게 돈으로 따지겠어요. 내 몸의 일부인데….”
19일 경기 하남시 망월동. 고등학교 때 엘란에 반했던 한웅수 씨(34)는 이제 자동차 튜닝업체 플랜비모터스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엘란을 만나 알게 된 자동차의 즐거움, 부품 하나하나를 바꿔가며 새 생명을 얻어가는 차를 볼 때의 기쁨을 알리고 싶어 이 사업을 시작했다. 한 씨는 이제 수십 대의 차를 갖고 있다. 엘란은 1년에 한두 번쯤 타는 정도다. 그래도 가끔 옛 생각에 사로잡힌다. 동호회원들이 수십 대의 엘란을 타고 떠난 MT(수련회),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밤마다 동호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던 서울 청담도로공원….
경기 여주군에서 전기차 회사인 ‘세경이브이’를 운영하는 서 반장도 가끔 엘란에 대한 ‘향수’에 젖는다. 엘란을 수리해주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동호회 ‘클럽 엘란’ 사람들도 그립다.
엘란의 생산대수 1055대 가운데 독일과 일본에 각각 100대가 수출됐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팔렸다. 아직까지도 300여 대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올해 5월 20일. 경기 광주시 곤지암리조트에서는 클럽 엘란의 연례 정기모임인 ‘엘란 데이’ 10회째가 열렸다. 100여 대의 엘란과 동호회원 및 가족 15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회원들은 10주년을 자축하며 차량 100여 대로 ‘로마자 10(Ⅹ)’을 만들었다. 이들은 ‘마지막 한 대가 남을 때까지’ 모임을 이어갈 계획이다.
하남·여주=이진석 기자 ge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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