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간 좌절했다, 그래도 꺾이지 않았다…‘중꺾마’ 주인공 데프트

지민구 기자

입력 2022-12-12 11:10 수정 2022-12-1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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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첫 롤드컵 우승
월드컵 거치며 화제
“과정의 중요성 깨달아”


6일 오전 4시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e스포츠 구단 담원기아의 연습실. 늦은 시간까지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롤)를 연습한 프로 게이머 데프트(본명 김혁규‧26)는 같은 팀 선수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과 브라질이 맞붙는 카타르 월드컵 16강전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1-4 패배.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데프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동갑내기인) 황희찬 등 몇몇 젊은 선수들이 너무 잘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4년 뒤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너무 기대되더라고요. 말 그대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담원기아 사무실에서 9일 만난 데프트는 “아직도 마음이 들떠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달 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체이스센터에서 열린 리그오브레전드 세계 대회(롤드컵) 결승전에서 승리한 데프트(본명 김혁규)가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있다. 2013년 프로 무대에 데뷔한 데프트는 롤드컵에서 이번에 처음 우승했다. 라이엇게임즈 제공
10년간 좌절했다, 그래도 꺾이지 않았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

월드컵 기간 가장 화제가 됐던 문구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월드컵 방문 대회 사상 두 번째 16강 진출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대표팀을 보며 사람들은 ‘중꺾마’를 가슴에 새겼다.

“(중꺾마는) 정말 멋진 말이다. 선수들도, 우리 팀도, 국민들도 인생에서 꺾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카타르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손흥민은 7일 인천국제공항 입국 기자간담회에서 이른바 ‘중꺾마 현상’을 직접 이야기했다.

데프트도 손흥민, 조규성 등 중꺾마를 언급한 대표팀 선수들의 인터뷰 기사와 영상을 봤다고 했다.

“제 이야기를 계기로 나온 문구가 스포츠를 넘어 사회 전반적으로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으니 자랑스럽죠.”

데뷔 10년 차 게이머 데프트는 지난달 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체이스센터에서 열린 리그오브레전드 세계 대회(롤드컵) 결승에서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상대는 데프트의 서울 마포고 동창이자 이미 e스포츠 업계에서 ‘레전드’로 불리는 게이머 페이커(본명 이상혁)의 T1(옛 SK텔레콤 T1). 모두가 T1의 승리를 예상했다. 롤드컵 결승전에 처음 나서는 데프트와 달리 과거 3차례 우승한 페이커의 경험을 더 높이 평가했다.

“저도…. 예전엔 (페이커에게) 열등감 같은 감정을 어느 정도 느꼈죠. 밖에선 ‘마포고 듀오’라고 불렀는데, 롤드컵 우승을 한 적 없는 저와 비교할 선수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데프트가 속한 팀 DRX가 첫 경기를 내줄 때만 해도 결과는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게임 중반까지 점수는 1-2. 모두가 뒤집을 수 없다고 말할 때 DRX는 마지막 2경기를 연달아 잡아냈다. 예상을 깬 반전에 젊은 게이머들은 열광했다.

롤드컵이 시작할 때 데프트와 DRX가 우승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DRX는 지난해 한국 여름 리그에서 최하위(10위)에 머물렀고 올해 성적도 6위였다. 한국 리그에서 롤드컵에 갈 수 있는 것은 4개 팀. DRX는 순위가 높은 다른 팀과 두 번의 외나무다리 승부를 펼친 뒤 가까스로 롤드컵으로 향했다.

롤드컵에서도 DRX는 최약체였다. 조별리그에서 유럽의 강팀 ‘로그’에게 패배한 뒤 데프트는 말했다.

“저희끼리만 안 무너지면 (앞으로는) 충분히 이길 것 같아요.”

그의 말은 인터뷰 기사와 영상 제목에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한 번 더 다듬어져 쓰였다. 실제 대답과 조금 다른 표현이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10년째 롤드컵 우승을 향해 달려오면서 수 없이 좌절했지만, 아직도 그 꿈을 향해 도전하고 있는 데프트 자신의 삶을 잘 담아낸 문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난달 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체이스센터에서 열린 리그오브레전드 세계 대회(롤드컵) 결승전에서 데프트(왼쪽 첫번째·본명 김혁규)가 승리를 확정지은 뒤 같은 팀 DRX 선수를 끌어안고 있다. 라이엇게임즈 제공
결과에 앞서 과정을 봤다, 그래서 즐겼다

DRX가 유럽, 중국의 강팀을 연이어 꺾고 반전을 만들어내도 사람들은 ‘이변’이라 불렀다. 데프트는 “무너지지 말자”며 같은 팀 선수들을 다독였다. 지난해 롤드컵 우승팀인 에드워드 게이밍(EDG)을 8강에서 만나 0-2로 지고 있다가 3-2로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두자 데프트는 오랜 기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이번에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는데, 8강전에서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즐거웠어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8년 전 데프트는 중국으로 향했다. 낯선 언어와 환경이라는 장벽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강팀에서 롤드컵의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결과’만 낼 수 있다면 충분했다.
데프트가 이적한 EDG는 2015년 중국 리그(LPL)에서 우승했다. 이적 첫 시즌에 중국 리그에서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 최우수선수(MVP)에 오른 데프트는 물오른 기량을 증명했다.

많은 이의 기대를 받으며 출전한 롤드컵. 8강에서 데프트를 앞세운 EDG는 예상과 달리 유럽리그를 대표하는 구단 프나틱에게 0-3으로 완패를 당했다. 다시 1년을 준비해 도전한 2016년 롤드컵에서도 데프트를 앞세운 EDG는 8강의 벽을 넘지 못했다.

데프트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채 2년 만에 한국 리그로 돌아왔다. 한국팀 KT 롤스터에 합류한 뒤에도 데프트는 한동안 다른 선수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게임 전략과 방향을 요구했다. 그렇게 시간이 더 지난 뒤에도 데프트는 롤드컵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 한 번 더 팀을 옮겨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데프트 원맨팀’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땐 팀보다는 제가 우선이었어요. 저를 중심으로 게임을 진행했을 때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거든요.”

롤 경기는 5명이 각자 캐릭터를 골라 정해진 역할을 맡아 한 팀을 이룬다. 헤드셋을 낀 선수들은 실시간으로 각자의 상황과 판단을 공유하며 게임을 진행한다. 선수 1명이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워크’다. 완벽한 팀워크를 만들어내려면 결국 치열한 과정이 필요하다.

데뷔 후 늘 최정상급 기량을 유지했던 데프트도 여러 번 실패를 겪은 뒤 과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데프트는 “팀을 옮기고 새롭게 도전하면서 팀워크를 다지고, 과정을 쌓아가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달 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체이스센터에서 열린 리그오브레전드 세계 대회(롤드컵) 결승전에서 데프트(앞줄 왼쪽 두번째·본명 김혁규)가 인터뷰 중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눈물을 참고 있다. 라이엇게임즈 제공
“싸우지 않으면 절대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어요. 선수들이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어떤 전략과 선택이 맞는지 검증하고 확인해야죠. 이번 롤드컵 우승은 치열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결과였어요.”

청년 세대는 과정을 하나하나 만들어나가면서 롤드컵 결과라는 결과물을 일군 데스트와 16강 진출에 성공한 축구대표팀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DRX에 우승컵을 안긴 뒤 최근 담원 기아로 이적한 데프트는 이러한 현상에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뿌듯하다”고 했다.

“얼마 전까진 온라인 공간에서 부정적인 메시지를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최근 들어 희망적인 이야기가 늘어난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런 시간이 지나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더 많이 공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지민구기자 war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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