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도 지역 주민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도시의 숲 정원[김선미의 시크릿가든]
김선미 기자
입력 2024-11-03 16:10 수정 2024-11-03 22:46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한독·제넥신 신사옥 정원’
올가을, 가보고 깜짝 놀란 정원이 있어 이 계절이 가기 전에 독자 여러분께 꼭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에 있는 한독과 제넥신의 정원입니다. 공식 명칭은 ‘한독 퓨처 콤플렉스 & 제넥신 프로젠 바이오 이노베이션 파크’입니다.
기업의 정원이지만 누구나 이 정원에 들어설 수 있는데요. 노랗게 잎이 물든 생강나무와 달콤한 향의 계수나무가 계절의 감각을 일깨우면서 신비로운 숲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예. 그러니까 이곳은 숲을 도시에 그대로 옮겨온 숲 정원이에요. 이끼와 양치식물, 누운주름잎 등이 바닥을 깔고 산부추와 쑥부쟁이, 소사나무와 피나무 등이 저마다의 키대로 공간을 채우며 기가 막히게 어우러집니다. 곳곳에 물확이 있어 새가 날아와 목을 축일 수도 있습니다. 아련한 연분홍 철쭉이 꽃을 피울 봄의 정원도 상상해 봅니다. 섬세하고 단아하며 여성적인 느낌입니다.
진짜 숲처럼 군데군데 흙 언덕도 있는 이 정원의 바로 밑이 주차장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정원에는 ‘아주 특별한 의자’들도 군데군데 놓여있어요. 이헌정 도예가의 도자 의자는 미적 감각을 일깨우는 한편 누구나 앉아서 쉴 수 있습니다. 숲을 닮은 정원에서 예술 작품을 일상품으로 누리는 경험, 신선합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의자가 반가워 이 도예가에게 연락하니 “너무 딱딱하지 않은 유기적 형태의 조형물이 그 장소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작업했다”고 합니다.
이 정원은 한독과 제넥신이 2022년 마곡지구에 신사옥과 연구소를 개발하면서 조성했습니다. 연구원들이 최적의 환경에서 신약개발에 몰입하도록 정원을 조성한 이 사옥은 지난해 말 대한민국 생태환경건축대상도 받았습니다. 김영진 한독 회장이 가장 공을 들인 곳이 바로 이 중정(中庭)이라고 합니다. 도심 속 작은 숲속 콘셉트로 만들어 연구원뿐 아니라 지역 직장인과 주민들의 휴식을 돕고 싶었다고 하네요.
예전에 읽었던 ‘수학자들’이란 아름다운 책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세계적 수학자 54명이 쓴 에세이인 이 책에서 부러웠던 게 있습니다. 프랑스 고등과학연구소와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등에는 수학자들이 연구하다가 언제든 거닐며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숲 정원이 있더라고요.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2010년 받은 프랑스 수학자 세드리크 빌라니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상에서의 여유는 정원에서 암탉들에게 모이를 주거나 화초에 물을 주며 찾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70724/85490105/1)
한독& 제넥신 정원을 조성한 권춘희 ‘뜰과숲’ 대표(60)와 함께 정원을 걸었습니다. 부산 F1963과 모모스커피 마린시티점, 서울 국제갤러리, 경기 양평 구하우스 등 멋이 흐르는 문화와 상업공간들의 정원을 만들어온 그는 말합니다.
“제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정원을 많이 봤잖아요. 그런데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진짜 숲이에요. 지금 하는 조경 작업들은 산에서 본 풍경들을 재현하고 있는 거예요. 숲 정원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산에 가서 숲을 찬찬히 관찰하는 겁니다. 산에는 인간이 만든 자연에서 진짜 자연으로 넘어갈 때의 경계 지점이 있거든요. 경계의 식물들은 복잡하고 어지럽지만 진짜 자연 속으로 들어서면 자연의 규칙이 보이기 시작해요. 계곡 주변 습한 곳에는 신나무가 많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조팝나무가 많지요. 이런 걸 적용해 도시에 숲 정원을 만듭니다.”
경북 의성 과수원집 딸로 자란 권 대표는 어릴 적 산에서 뛰어놀며 온갖 감각을 접했다고 합니다. 산속 촉촉한 곳에 피어있던 노루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요. 성균관대에서 생물학, 고려대 대학원에서 원예학을 공부한 그는 서울 청계천의 헌책방에서 샀던 1980년대 문고판 ‘양화소록’ 이야기를 합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보면 식물 하나하나마다 습성이 다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야 어떻겠어요. 사람을 대할 때도, 자녀를 기를 때도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세계적 트렌드로서의 숲 정원을 말합니다.
“몇 년 전 이탈리아 밀라노 엑스포에 갔을 때, 전시 주제가 농업과 음식이었어요. 전시장 전체가 먹거리로 채워지고 정원에도 과일나무들이 심어 있었어요. 그중 오스트리아 전시관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ㅁ’자 회랑을 설치하고 가운데 중정을 만들었는데 오스트리아의 작은 숲을 그대로 옮겨놨더라고요. 우리나라 중부지방 숲과 비슷하게 계곡까지 전시장에 옮겨놓은 숲 정원을 보고 세계에서 온 많은 이들이 감동했던 게 기억납니다.”
요즘엔 가정집 정원 조성을 의뢰하는 고객들도 숲 정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무작정 마당에 깔던 잔디를 빼버리고 창을 통해 나무가 보이게 심으면 마당이 바로 작은 숲으로 변신하니까요. 마당에 무조건 심던 소나무와 향나무 대신 피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를 심고 작은 텃밭을 만들면 정원이 ‘모두가 숲속에서 함께 하는 공간’이 되는 것 같아요.
마곡지구에는 성냥갑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한독과 제넥신의 숲 정원을 보고 마곡지구에 대한 전체 인상마저 바뀌었습니다. 이 정원에서 만난 김상진 제넥신 부장도 “연구원들이 틈틈이 들러 호젓하게 걸어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더 많은 기업과 연구소들이 정원이 주는 안식과 치유의 힘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한독 퓨처 콤플렉스 & 제넥신 프로젠 바이오 이노베이션 파크’ 정원. 유명 도예가 이헌정의 의자들이 숲 정원에 있어 누구든 쉬어갈 수 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올가을, 가보고 깜짝 놀란 정원이 있어 이 계절이 가기 전에 독자 여러분께 꼭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에 있는 한독과 제넥신의 정원입니다. 공식 명칭은 ‘한독 퓨처 콤플렉스 & 제넥신 프로젠 바이오 이노베이션 파크’입니다.
기업의 정원이지만 누구나 이 정원에 들어설 수 있는데요. 노랗게 잎이 물든 생강나무와 달콤한 향의 계수나무가 계절의 감각을 일깨우면서 신비로운 숲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예. 그러니까 이곳은 숲을 도시에 그대로 옮겨온 숲 정원이에요. 이끼와 양치식물, 누운주름잎 등이 바닥을 깔고 산부추와 쑥부쟁이, 소사나무와 피나무 등이 저마다의 키대로 공간을 채우며 기가 막히게 어우러집니다. 곳곳에 물확이 있어 새가 날아와 목을 축일 수도 있습니다. 아련한 연분홍 철쭉이 꽃을 피울 봄의 정원도 상상해 봅니다. 섬세하고 단아하며 여성적인 느낌입니다.
새들을 부르는 한독과 제넥신의 숲 정원.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진짜 숲처럼 군데군데 흙 언덕도 있는 이 정원의 바로 밑이 주차장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정원에는 ‘아주 특별한 의자’들도 군데군데 놓여있어요. 이헌정 도예가의 도자 의자는 미적 감각을 일깨우는 한편 누구나 앉아서 쉴 수 있습니다. 숲을 닮은 정원에서 예술 작품을 일상품으로 누리는 경험, 신선합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의자가 반가워 이 도예가에게 연락하니 “너무 딱딱하지 않은 유기적 형태의 조형물이 그 장소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작업했다”고 합니다.
숲길을 걷는 느낌을 주는 한독과 제넥신의 신사옥 숲 정원.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 정원은 한독과 제넥신이 2022년 마곡지구에 신사옥과 연구소를 개발하면서 조성했습니다. 연구원들이 최적의 환경에서 신약개발에 몰입하도록 정원을 조성한 이 사옥은 지난해 말 대한민국 생태환경건축대상도 받았습니다. 김영진 한독 회장이 가장 공을 들인 곳이 바로 이 중정(中庭)이라고 합니다. 도심 속 작은 숲속 콘셉트로 만들어 연구원뿐 아니라 지역 직장인과 주민들의 휴식을 돕고 싶었다고 하네요.
예전에 읽었던 ‘수학자들’이란 아름다운 책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세계적 수학자 54명이 쓴 에세이인 이 책에서 부러웠던 게 있습니다. 프랑스 고등과학연구소와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등에는 수학자들이 연구하다가 언제든 거닐며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숲 정원이 있더라고요.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2010년 받은 프랑스 수학자 세드리크 빌라니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상에서의 여유는 정원에서 암탉들에게 모이를 주거나 화초에 물을 주며 찾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70724/85490105/1)
한독& 제넥신 정원을 조성한 권춘희 ‘뜰과숲’ 대표(60)와 함께 정원을 걸었습니다. 부산 F1963과 모모스커피 마린시티점, 서울 국제갤러리, 경기 양평 구하우스 등 멋이 흐르는 문화와 상업공간들의 정원을 만들어온 그는 말합니다.
이 숲 정원을 조성한 ‘뜰과숲’ 권춘희 대표가 이헌정 도예가의 의자에 앉았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제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정원을 많이 봤잖아요. 그런데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진짜 숲이에요. 지금 하는 조경 작업들은 산에서 본 풍경들을 재현하고 있는 거예요. 숲 정원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산에 가서 숲을 찬찬히 관찰하는 겁니다. 산에는 인간이 만든 자연에서 진짜 자연으로 넘어갈 때의 경계 지점이 있거든요. 경계의 식물들은 복잡하고 어지럽지만 진짜 자연 속으로 들어서면 자연의 규칙이 보이기 시작해요. 계곡 주변 습한 곳에는 신나무가 많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조팝나무가 많지요. 이런 걸 적용해 도시에 숲 정원을 만듭니다.”
2층 옥상 정원에서 내려다본 중정의 가을.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경북 의성 과수원집 딸로 자란 권 대표는 어릴 적 산에서 뛰어놀며 온갖 감각을 접했다고 합니다. 산속 촉촉한 곳에 피어있던 노루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요. 성균관대에서 생물학, 고려대 대학원에서 원예학을 공부한 그는 서울 청계천의 헌책방에서 샀던 1980년대 문고판 ‘양화소록’ 이야기를 합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을 보면 식물 하나하나마다 습성이 다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야 어떻겠어요. 사람을 대할 때도, 자녀를 기를 때도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한독과 제넥신 신사옥 정원에서 본 노란 생강나무 잎이 가을을 전한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그러면서 세계적 트렌드로서의 숲 정원을 말합니다.
“몇 년 전 이탈리아 밀라노 엑스포에 갔을 때, 전시 주제가 농업과 음식이었어요. 전시장 전체가 먹거리로 채워지고 정원에도 과일나무들이 심어 있었어요. 그중 오스트리아 전시관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ㅁ’자 회랑을 설치하고 가운데 중정을 만들었는데 오스트리아의 작은 숲을 그대로 옮겨놨더라고요. 우리나라 중부지방 숲과 비슷하게 계곡까지 전시장에 옮겨놓은 숲 정원을 보고 세계에서 온 많은 이들이 감동했던 게 기억납니다.”
한독 퓨처콤플렉스에서 내다보는 숲 정원 풍경.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요즘엔 가정집 정원 조성을 의뢰하는 고객들도 숲 정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무작정 마당에 깔던 잔디를 빼버리고 창을 통해 나무가 보이게 심으면 마당이 바로 작은 숲으로 변신하니까요. 마당에 무조건 심던 소나무와 향나무 대신 피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를 심고 작은 텃밭을 만들면 정원이 ‘모두가 숲속에서 함께 하는 공간’이 되는 것 같아요.
마곡지구에는 성냥갑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에 한독과 제넥신의 숲 정원을 보고 마곡지구에 대한 전체 인상마저 바뀌었습니다. 이 정원에서 만난 김상진 제넥신 부장도 “연구원들이 틈틈이 들러 호젓하게 걸어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더 많은 기업과 연구소들이 정원이 주는 안식과 치유의 힘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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