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이진석 기자의 Car in the Film]웃음이 있는 장례식 그리고 부자간의 여행

동아일보

입력 2013-03-28 03:00 수정 2013-03-2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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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그랜드 마퀴스’/ 엘리자베스타운

‘나의 장례식은 어떤 풍경일까.’ 가끔씩 생각해봤습니다. 남겨진 이들이 슬픔에 잠긴 모습만큼은 정말이지 보고 싶지가 않더군요. 차가운 땅 속에 몸을 가두기도 싫고요. 혹시 누군가 구슬픈 장송가라도 부른다면 당장 무덤에서 뛰쳐나와 입을 틀어막을 겁니다.

캐머런 크로 감독의 2005년작 ‘엘리자베스타운’은 이러한 공상이 시작된 계기였습니다. 이상(理想)에 가까운 죽음을 맞기 위해서는 참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기도 했죠.

유명 신발업체의 디자이너 드류(올랜도 블룸 분)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자신이 디자인한 신발이 실패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직업을 잃습니다. 곧바로 오리건에서 3700km 떨어진 켄터키의 작은 마을, 엘리자베스타운에 사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습니다. 아버지가 생전 즐겨 입던 파란색 양복을 들고 드류는 비행기에 지친 몸을 싣습니다.

객실승무원 클레어(커스틴 던스트 분)는 혼자 있고 싶은 드류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신상을 시시콜콜 캐묻다 못해 행선지까지의 약도를 그려주고 전화번호까지 남깁니다. 기진맥진해 켄터키에 도착한 드류는 지금은 사라진 포드 산하 브랜드 머큐리의 대형 세단, 2004년형 ‘그랜드 마퀴스’ 렌터카에 몸을 싣습니다. 왜 하필 이 평범한 차냐고요? 크로 감독의 영화에 나타나는 공통점입니다. ‘금지된 사랑’의 쉐보레 ‘말리부’나 ‘바닐라 스카이’의 뷰익 ‘스카이라크’처럼, 그는 전형적인 미국차를 스크린에 담습니다.

동네 주민들의 뜻밖의 환대는 늘 유쾌했고 삶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유산입니다. 조금씩 떠오르는 유년기의 추억. 장례식장은 웃음으로 채워집니다. 유족과 아버지의 친구들은 레너드 스키너드의 명곡 ‘프리버드’를 신명나게 연주합니다.

드류는 클레어가 준비한 여행 경로를 따라 화장된 아버지의 유골을 차에 싣고 대륙 횡단에 나섭니다. 늘 미뤄왔던 부자(父子)간의 여행, 미국의 아름다운 대자연과 풍광 속에 아버지를 조금씩 흘려보냅니다. 뒤늦은 회한과 눈물, 오랫동안 놓쳐왔던 소중한 삶의 가치가 드류의 빈 가슴에 내려앉습니다. 슬픔을 걷어낸 그의 눈에는 새로운 세상이 보이겠죠. 인생, 아름답게 떠나기 위해 살아갈 만하지 않을까요.

이진석 기자 ge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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