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우스 푸어의 6년 일기 “내 잘못된 선택 하루하루가 피폐한 시간”
동아닷컴
입력 2013-09-17 14:40 수정 2013-09-20 17:16
“3억 원 빌려 지른 집 가슴 짓누른 웬수 덩어리”
부동산 광풍이 한창이던 2007년 집을 샀다. 서울 중심에 자리하면서도 빈민가였던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에 있는 3층짜리 연립주택 한 호를 6억 원에 산 것이다. 대지 지분 3.75평(12.3㎡)에 실제 크기는 13평(42.9㎡) 남짓한,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되는 집이었다. 3억 원은 신혼 초에 사둔 서울 제기동 아파트를 급매해 마련하고, 나머지 3억 원은 은행 융자로 충당했다. 남들처럼 잘살고 싶어 미래에 발생할 근로소득까지 미리 당겨 일생일대의 투자를 한 셈이다.
재개발 무산으로 우울증 시달려
나는 집도 보지 않은 채 부동산중개소 여사장 말만 믿고 집을 샀다. 그때는 용산국제업무지구에 새 아파트를 분양받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사업이 빨리 이뤄져 보상받고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상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원주인은 그 집의 소유권이전등기를 했는데도 7개월 동안 공짜로 살다 우리가 내용증명을 3번이나 보낸 뒤에야 집을 비웠다.
나는 전 주인이 집을 비우고 나서야 집을 처음으로 봤다. 그 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외벽은 칠이 다 벗겨져 을씨년스러웠다. 옥상은 집을 짓고 한 번도 방수공사를 하지 않아 금이 쩍쩍 갈라져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물이 샜다. 벽지가 젖고 곰팡이가 핀 건 물론이다. 현관문을 닫으면 곰팡이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전 주인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집에서 35년 이상 살다니…. 남편과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집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800만 원을 들였지만 집은 여전히 문제가 많았다. 지인의 친척에게 수리를 맡겼는데도 공사비와 공사 기간이 늘어났다.
우리 가족은 집수리가 끝난 뒤부터 이 집에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어야 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을 차로 등·하교시켰다. 아이들 학교가 있는 서초구까지 거리상으론 멀지 않았지만 교통체증 때문에 하루에 왕복 통학시간만 2시간에 달했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집에 데려올 수도 없었다.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데리고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출금 3억 원과 그 이자를 상환하는 일도 버거워 아끼고 또 아꼈다. 경제권은 남편이 쥐게 됐고, 남편의 월급 70~80%는 은행 대출금과 대출이자를 상환하는 데 썼다. 우리 가족의 삶은 피폐해갔다. 아이들 옷도 사주지 못했고, 남편은 구두 하나로 7년을 버텼다. 그리고 빚을 모두 짊어진 남편은 힘들어했다. 다행인 점은 그 빚을 지난해 다 갚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처음 집을 사고 2년 동안은 용산 역세권 개발 사업이 진척을 보였다. 그 즉시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없었지만, 용산국제업무지구에 집이 생기면 우리가 투자한 돈은 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용산 역세권 개발 사업은 난항을 겪고 파행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피 말리며 기다리는 시간이 반복됐다.
지난 6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내 잘못을 생각했고 괴로워했다. 남편은 나를 원망했다. 남편은 그 집을 사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내가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샀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가족에게 피해만 입히는 짐 덩어리라는 생각에 죽고 싶었다. 나는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됐고, 사람을 피하게 됐다.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다. 말이 없어지고 집 안에서 고개를 숙인 채 울고 다녔다. 자꾸 이 집을 살 당시의 상황이 떠올라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나 자신을 학대하며 살던 중 2012년 8월 용산 역세권 개발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보상 계획을 진행하니 사무실로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고통이 끝날 것 같았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그동안 주민들을 따라다니면서 서울시청, 코레일(KORAIL) 사옥, 개발회사 드림허브 앞에서 ‘하루빨리 사업을 진행하라’는 시위도 수없이 했지만, 2013년 9월 5일 코레일이 드림허브에 토지대금을 반환하면서 사업은 없던 일이 됐다.
처음부터 집 욕심이 많았던 건 아니다. 1999년 결혼한 우리 부부는 남편 직장이 있던 서울 동대문구의 조그마한 원룸에서 가난하게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전세 3500만 원짜리 집이었다. 외벌이었던 터라 돈 1000원도 아끼고 저축했다. 그러다 2000년 제기동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당시 32평형(106㎡)의 분양가가 1억9890만 원이었는데, 청약을 하자 덜컥 당첨됐다. 남편은 분양대금을 마련하려고 3년 남짓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생해 건강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지만 다행히 분양대금을 다 갚았다.
이후 남편이 지방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됐다. 남편은 가족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서울에 다시 올라오고 싶어도 집이 없어 못 올라온다며 집을 사두자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 친구가 추천해준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삼익아파트 부근 부동산중개소로 나를 데려갔다. 당시 삼익아파트 35평형(115㎡)은 6억3000만 원을 호가했는데 5억6000만 원으로 급매물이 나와 관심을 가진 것이다.
남편은 이 집을 사려고 했다. 부동산중개소 사장님은 계약서까지 다 써놓고 집주인을 부른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계약서에 사인하려는 남편을 째려보며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그 집은 은행 빚이 3억 원 들어 있는 상태. 우리는 그 빚을 껴안는 조건으로 현찰 2억6000만 원을 마련해야 했지만 영 버거웠다. 다행히 살고 있는 제기동 아파트 값이 올라 3억 원이 됐지만, 제때 팔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우리 아파트를 급매물로 내놓으면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설령 살던 집을 팔아 2억6000만 원을 마련해도 빚 3억 원을 갚을 자신이 없었다. 집이 대출이자를 낸 것만큼 오를까 싶어 걱정됐다.
결국 남편은 그 집을 포기했다. 이후 남편의 지방행이 취소됐고 관악구에 취직했다. 하지만 동대문구 제기동 집에서 출퇴근하자니 교통체증이 심했다. 제기동 집을 팔려고 했지만 팔리지 않아 전세를 주고 남편이 출퇴근하기 편한 서초구 잠원동 25평형(82㎡)에서 전세를 살았다.
그런데 전세로 옮겨온 지 4~5개월이 지나자 부동산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남편이 사려던 삼익아파트는 순식간에 1억, 2억 원이 뛰더니 급기야 12억 원까지 오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생활기반시설이나 치안상태가 좋아 언젠가 그곳에 내 집을 마련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속이 많이 상한 나는 그때부터 법원 경매와 부동산에 무섭게 몰두했다. 당시 4, 7세인 두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건강하게 자라 웃는 얼굴로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성실히 일하며 묵묵히 돈 벌어다 주는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은 채 집 살 기회를 놓친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부동산만 생각했다.
내가 재개발에 목매는 이유
날마다 부동산 관련 책을 읽고, 인터넷 법원 경매 사이트를 뒤지며, 경매 현장을 찾아다니고, 부동산중개소를 들락거렸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매물을 무수히 권했는데, 삼익아파트 일로 속이 상한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잠원동 전세가 끝날 쯤, 신혼부부가 그 집을 사는 바람에 다른 집을 구해야 했다. 우리는 1억6000만 원에 전세를 들어갔지만 이미 그 아파트의 전셋값은 2억5000만 원에 달했다.
물론 그때도 은행 대출을 받으면 그 아파트의 전세를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 전셋값이 싼 반지하방으로 이사를 가자고 졸랐다. 여윳돈을 갖고 있어야 아파트 청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약하려면 계약금과 중도금 등 수시로 돈 나갈 일이 많다. 결국 우리는 내 고집대로 전세 8000만 원에 교대역 다가구주택 반지하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판교, 동탄, 서울 등지 아파트에 청약을 했지만 다 안 됐다. 이내 나는 후회했다.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부자가 되리라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어느 날 반지하방에서 빨래를 개는데 남편이 퇴근하고 오더니 “여보, 우리나라에서 평당 제일 비싼 아파트가 어디인지 알아?”라고 묻곤 “당신이 사자고 했던 개포 주공아파트 3단지래”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내가 남편에게 그렇게 사자고 조른 아파트가 2년이 지나 제일 비싼 아파트가 되다니. 남편도 이때는 후회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반지하방에 살면서 아파트 청약에 계속 떨어지자 서부이촌동에 있는 연립주택을 샀다. 그리고 그 주택을 구매하면서 입주권을 받으려고 그곳에서 살았다. 하지만 큰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방 한 칸짜리 집에 사는 것을 너무 힘들어했다. 결국 3년 후 친정에서 돈을 빌려 잠원동에 있는 재개발 아파트로 2억8000만 원을 주고 전세로 이사했다. 우리가 살던 연립주택은 아파트 입주권 때문에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끼고 살면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집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잘살고 싶다는 욕심에 나는 엄청난 실수를 했다. 하지만 나는 과거를 더는 돌아보지 않고 미래도 계획하지 않은 채 오직 현재 이 순간에만 집중하면서 살고 싶다. 내 집을 장만하고 싶다는 욕심도 없다. 그냥 이대로 아이들이 학교 다니기 편한 지역에서 전세살이만 해도 감사하다. 마음고생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전미경(가명·서울 잠원동 거주)
부동산 광풍이 한창이던 2007년 집을 샀다. 서울 중심에 자리하면서도 빈민가였던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에 있는 3층짜리 연립주택 한 호를 6억 원에 산 것이다. 대지 지분 3.75평(12.3㎡)에 실제 크기는 13평(42.9㎡) 남짓한,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되는 집이었다. 3억 원은 신혼 초에 사둔 서울 제기동 아파트를 급매해 마련하고, 나머지 3억 원은 은행 융자로 충당했다. 남들처럼 잘살고 싶어 미래에 발생할 근로소득까지 미리 당겨 일생일대의 투자를 한 셈이다.
재개발 무산으로 우울증 시달려
나는 집도 보지 않은 채 부동산중개소 여사장 말만 믿고 집을 샀다. 그때는 용산국제업무지구에 새 아파트를 분양받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사업이 빨리 이뤄져 보상받고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상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원주인은 그 집의 소유권이전등기를 했는데도 7개월 동안 공짜로 살다 우리가 내용증명을 3번이나 보낸 뒤에야 집을 비웠다.
나는 전 주인이 집을 비우고 나서야 집을 처음으로 봤다. 그 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외벽은 칠이 다 벗겨져 을씨년스러웠다. 옥상은 집을 짓고 한 번도 방수공사를 하지 않아 금이 쩍쩍 갈라져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물이 샜다. 벽지가 젖고 곰팡이가 핀 건 물론이다. 현관문을 닫으면 곰팡이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전 주인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집에서 35년 이상 살다니…. 남편과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집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800만 원을 들였지만 집은 여전히 문제가 많았다. 지인의 친척에게 수리를 맡겼는데도 공사비와 공사 기간이 늘어났다.
우리 가족은 집수리가 끝난 뒤부터 이 집에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어야 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을 차로 등·하교시켰다. 아이들 학교가 있는 서초구까지 거리상으론 멀지 않았지만 교통체증 때문에 하루에 왕복 통학시간만 2시간에 달했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집에 데려올 수도 없었다. 초등학생인 아이들을 데리고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출금 3억 원과 그 이자를 상환하는 일도 버거워 아끼고 또 아꼈다. 경제권은 남편이 쥐게 됐고, 남편의 월급 70~80%는 은행 대출금과 대출이자를 상환하는 데 썼다. 우리 가족의 삶은 피폐해갔다. 아이들 옷도 사주지 못했고, 남편은 구두 하나로 7년을 버텼다. 그리고 빚을 모두 짊어진 남편은 힘들어했다. 다행인 점은 그 빚을 지난해 다 갚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처음 집을 사고 2년 동안은 용산 역세권 개발 사업이 진척을 보였다. 그 즉시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없었지만, 용산국제업무지구에 집이 생기면 우리가 투자한 돈은 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용산 역세권 개발 사업은 난항을 겪고 파행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피 말리며 기다리는 시간이 반복됐다.
‘하우스 푸어’에 대한 은행권의 사전 채무조정이 시행된 6월 17일 서울 시중 은행을 찾은 채무자가 상담을 받고 있다.
가난하게 시작해 내 집 갖고 싶어 지난 6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내 잘못을 생각했고 괴로워했다. 남편은 나를 원망했다. 남편은 그 집을 사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내가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샀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가족에게 피해만 입히는 짐 덩어리라는 생각에 죽고 싶었다. 나는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됐고, 사람을 피하게 됐다.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다. 말이 없어지고 집 안에서 고개를 숙인 채 울고 다녔다. 자꾸 이 집을 살 당시의 상황이 떠올라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나 자신을 학대하며 살던 중 2012년 8월 용산 역세권 개발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보상 계획을 진행하니 사무실로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고통이 끝날 것 같았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그동안 주민들을 따라다니면서 서울시청, 코레일(KORAIL) 사옥, 개발회사 드림허브 앞에서 ‘하루빨리 사업을 진행하라’는 시위도 수없이 했지만, 2013년 9월 5일 코레일이 드림허브에 토지대금을 반환하면서 사업은 없던 일이 됐다.
처음부터 집 욕심이 많았던 건 아니다. 1999년 결혼한 우리 부부는 남편 직장이 있던 서울 동대문구의 조그마한 원룸에서 가난하게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전세 3500만 원짜리 집이었다. 외벌이었던 터라 돈 1000원도 아끼고 저축했다. 그러다 2000년 제기동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당시 32평형(106㎡)의 분양가가 1억9890만 원이었는데, 청약을 하자 덜컥 당첨됐다. 남편은 분양대금을 마련하려고 3년 남짓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생해 건강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지만 다행히 분양대금을 다 갚았다.
이후 남편이 지방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됐다. 남편은 가족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서울에 다시 올라오고 싶어도 집이 없어 못 올라온다며 집을 사두자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 친구가 추천해준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삼익아파트 부근 부동산중개소로 나를 데려갔다. 당시 삼익아파트 35평형(115㎡)은 6억3000만 원을 호가했는데 5억6000만 원으로 급매물이 나와 관심을 가진 것이다.
남편은 이 집을 사려고 했다. 부동산중개소 사장님은 계약서까지 다 써놓고 집주인을 부른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계약서에 사인하려는 남편을 째려보며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그 집은 은행 빚이 3억 원 들어 있는 상태. 우리는 그 빚을 껴안는 조건으로 현찰 2억6000만 원을 마련해야 했지만 영 버거웠다. 다행히 살고 있는 제기동 아파트 값이 올라 3억 원이 됐지만, 제때 팔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우리 아파트를 급매물로 내놓으면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설령 살던 집을 팔아 2억6000만 원을 마련해도 빚 3억 원을 갚을 자신이 없었다. 집이 대출이자를 낸 것만큼 오를까 싶어 걱정됐다.
결국 남편은 그 집을 포기했다. 이후 남편의 지방행이 취소됐고 관악구에 취직했다. 하지만 동대문구 제기동 집에서 출퇴근하자니 교통체증이 심했다. 제기동 집을 팔려고 했지만 팔리지 않아 전세를 주고 남편이 출퇴근하기 편한 서초구 잠원동 25평형(82㎡)에서 전세를 살았다.
그런데 전세로 옮겨온 지 4~5개월이 지나자 부동산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남편이 사려던 삼익아파트는 순식간에 1억, 2억 원이 뛰더니 급기야 12억 원까지 오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생활기반시설이나 치안상태가 좋아 언젠가 그곳에 내 집을 마련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그 꿈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속이 많이 상한 나는 그때부터 법원 경매와 부동산에 무섭게 몰두했다. 당시 4, 7세인 두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건강하게 자라 웃는 얼굴로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성실히 일하며 묵묵히 돈 벌어다 주는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은 채 집 살 기회를 놓친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며 부동산만 생각했다.
내가 재개발에 목매는 이유
날마다 부동산 관련 책을 읽고, 인터넷 법원 경매 사이트를 뒤지며, 경매 현장을 찾아다니고, 부동산중개소를 들락거렸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매물을 무수히 권했는데, 삼익아파트 일로 속이 상한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잠원동 전세가 끝날 쯤, 신혼부부가 그 집을 사는 바람에 다른 집을 구해야 했다. 우리는 1억6000만 원에 전세를 들어갔지만 이미 그 아파트의 전셋값은 2억5000만 원에 달했다.
물론 그때도 은행 대출을 받으면 그 아파트의 전세를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 전셋값이 싼 반지하방으로 이사를 가자고 졸랐다. 여윳돈을 갖고 있어야 아파트 청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약하려면 계약금과 중도금 등 수시로 돈 나갈 일이 많다. 결국 우리는 내 고집대로 전세 8000만 원에 교대역 다가구주택 반지하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판교, 동탄, 서울 등지 아파트에 청약을 했지만 다 안 됐다. 이내 나는 후회했다.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부자가 되리라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어느 날 반지하방에서 빨래를 개는데 남편이 퇴근하고 오더니 “여보, 우리나라에서 평당 제일 비싼 아파트가 어디인지 알아?”라고 묻곤 “당신이 사자고 했던 개포 주공아파트 3단지래”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내가 남편에게 그렇게 사자고 조른 아파트가 2년이 지나 제일 비싼 아파트가 되다니. 남편도 이때는 후회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반지하방에 살면서 아파트 청약에 계속 떨어지자 서부이촌동에 있는 연립주택을 샀다. 그리고 그 주택을 구매하면서 입주권을 받으려고 그곳에서 살았다. 하지만 큰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방 한 칸짜리 집에 사는 것을 너무 힘들어했다. 결국 3년 후 친정에서 돈을 빌려 잠원동에 있는 재개발 아파트로 2억8000만 원을 주고 전세로 이사했다. 우리가 살던 연립주택은 아파트 입주권 때문에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끼고 살면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집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잘살고 싶다는 욕심에 나는 엄청난 실수를 했다. 하지만 나는 과거를 더는 돌아보지 않고 미래도 계획하지 않은 채 오직 현재 이 순간에만 집중하면서 살고 싶다. 내 집을 장만하고 싶다는 욕심도 없다. 그냥 이대로 아이들이 학교 다니기 편한 지역에서 전세살이만 해도 감사하다. 마음고생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전미경(가명·서울 잠원동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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