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춘천~속초 고속철도 ‘갈등’… 뒤숭숭한 강원도 작은 마을
동아닷컴 정진수 기자
입력 2017-09-20 16:44 수정 2017-09-20 17:26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마을에는 고속철도 노선 변경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다.
#시커먼 먹구름은 하늘을 금방금방 삼켰다. 바람은 넓은 들녘을 거칠 것 없이 휩쓸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벼들은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았다. 서로서로 의지해 가며 용케도 다시 허리를 세우고는 했다. 그 슬기로움은 험한 기세로 몰려오고 있는 먹구름도 두려워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소설 아리랑 1편 ‘역부의 길’ 中).
19일 오후 3시. 국지성 호우가 예보된 강원도 인제군 용대2리(이하 백담마을)는 흐린 날씨만큼이나 마을 분위기가 어둡고 뒤숭숭했다. 백담마을 곳곳에는 정부 동서고속화철도 국책 사업에 반발하는 현수막이 설치돼 있었고, 주변 식당에서도 출입구에 붙인 팻말을 이용해 공통된 목소리를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소설 ‘아리랑’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했다.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강원 춘천 고속철도가 지난 7월 국토교통부 기본 사업 계획안이 발표 된 후 해당 지역사회와 주민들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서울~속초 동서고속화철도는 2조631억 원을 들여 춘천~속초간(서울~춘천간 2012년 개통) 고속철도를 추가로 건설하는 사업으로 완공하면 서울 용산역에서 속초까지 철도로 1시간15분이면 이동할 수 있다. 정거장은 화천·양구·인제·백담·속초 등 5개소를 신설될 예정으로 사업량은 92.34km다.
이번 정부 국책 사업으로 인제군 백담마을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군 관계자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마을 건너편 국도 46번에 ‘신호장(열차의 교차 운행이나 대피를 위해 설치하는 장소)’이 들어선다고 알고 있었다”며 “그런데 국토부는 군과 주민들의 의견수렴 없이 춘천 고속철도 기본 계획안에 백담역 신설을 새로 추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백담역 철도 노선이 마을 중앙을 가로질러 통과해 두 동강 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황재복 백담마을 고속철 외곽이전요구 비상대책위원장은 “기찻길이 마을을 관통하면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게 된다”며 “생존권과 환경권이 무시되는 국책 사업은 반드시 수정돼야한다”고 호소했다.
국토부는 지난 7월 강원 인제군 북면 백담마을을 관통하는 백담역 철도 노선을 기본 계획안에 포함시켰다. 사진 속 하얀 건물은 춘천~속초 고속철 백담 노선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철거가 불가피하다.
백담마을 고속철 외곽이전요구 비상대책위원회는 국책 사업 수정을 요구하는 홍보물을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
국토부에 따르면 백담마을부근 고속철도 노선은 인근 원통을 거쳐 만해마을에서 백담사 마을버스 정류장을 통과해 설악산국립공원 산 아래를 뚫고 속초로 향한다. 마을을 관통하는 백담역 노선이 폭 48~52m가 필요한 신호장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판단한 것이다. 국토부 계획대로라면 철길이 들어서는 만해마을(인제군 북면 만해로 91)~백담사 버스정류장 사이 민가를 포함해 숙박업소, 마을회관 등은 전부 철거 대상이 된다.
마을 주민들은 철길 외곽이전에 사활을 걸고 있다. 강원도와 인제군청 등 지자체에 민원을 제기함과 동시에 지난 8일에는 사업을 총괄하는 국토부 철도건설과를 찾아가 진정서 및 항의서도 제출한 상황이다. 이들은 기존에 고려됐던 신호장 위치(국도 46번 인근)를 기본·실시설계 시 반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인제군도 철길 외곽 이전 타당성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별도 용역을 고용해 조사를 벌였고, 오는 21일 공청회에서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건욱 용대2리 백담마을 감사위원장은 “관광지와 연계된 마을에 철도가 관통하는 것은 관광지 경관을 해칠 수 있다”며 “용대리 천혜의 자연환경과 관광자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거장과 노선을 외곽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분쟁 지역인 양구는 춘천고속철도 예정지 가운데 유일하게 역사 위치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국토부는 양구 하리 부근에 양구역을 신설할 계획이지만 지역 주민들과 양구군의 입장은 다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학조리와 대월1리도 거론되고 있다. 강원 양구군에 따르면 최근 양구군 사회단체협의회를 비롯한 6개 사회단체 대표들은 동서고속화철도 양구 노선을 지하화해 달라는 내용의 건의문을 국토부와 강원도, 양구군에 전달했다.
이들은 건의문을 통해 “군사시설인 봉화산 태풍사격장, 안대리 비행장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채 살고 있는 주민들은 동서고속화철도가 지역을 한 단계 도약시킬 발판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며 “안대리 비행장을 경유해 송청리에 역사가 들어서는 것이 가장 적합한 만큼 국가가 고민하고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강원도 양구군 학조리와 대월1리에는 양구역사 유치를 희망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양구군도 이들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군은 “다양한 전문가 의견과 지역 발전을 고려할 때 역사 위치는 비행장을 경유해 송청리가 가장 바람직하다”며 “국토부와 강원도는 지역의 실질적 가치를 높이고 지역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노선을 검토하고 반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현재 이들 지역 땅값은 고속철도 기대감에 크게 오른 것으로 파악됐다. 화천과 양구 등 역 주변 예정지는 이미 지난해부터 가격이 올라가 현재 30% 이상 오른 상태다. 양구는 배후령터널 개통에 이어 고속철도 역사 등 기대감 상승에 지가 상승률이 6% 상승, 도내 18개 시·군 중 두 번째로 높았다. 양구군 대월1리 한 공인중개소 대표는 “역사가 논의되고 있는 지역들은 평균 3.3㎡ 당 60만 원 정도 거래되고 있다”며 “하지만 주택을 지을 수 있는 200평 이내 소규모 땅은 매물이 나온 게 없다”고 했다. 이어 “상업시설 용도의 1000평 규모 단위로 부동산 업자들의 거래가 활발한 편”이라고 덧붙였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백담마을 주변 부동산중개업자 A씨는 “백담사로 가는 도로 양옆에는 3.3㎡ 당 100만 원 이상을 호가하지만 매물이 많지 않다”며 “백담사와 조금 떨어진 곳은 3.3㎡ 당 60만 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용대리는 백담사역이 확정되면서 5년간 토지거래계약허가구역으로 지정됐다. 이 지역에서 일정 면적 이상 토지를 거래할 때에는 토지의 실수요성, 이용목적의 적절성, 면적의 적절성 등에 대한 심사를 받아야 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주민 공청회에서 양구와 백담역과 관련해 여태껏 검토돼왔던 사안들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있을 것”이라며 “모든 갈등을 마무리 짓고 연말께 기본·실시설계에 돌입하겠다”고 말했다.
양구, 인제=동아닷컴 정진수 기자 brje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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