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땅… 신라의 숨결[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글·사진 경주=전승훈 기자
입력 2024-12-07 03:00 수정 2024-12-07 03:00
경북 경주 남산은 자연 속 박물관이다. 금오봉과 고위봉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로 이뤄진 남산 곳곳에 신라시대 100여 곳의 절터, 8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그야말로 부처님의 땅 ‘불국토(佛國土)’다. 내년 10월 말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경주. 남산에 올라 신라인의 숨결을 느끼고 왔다.
● 남산 위의 저 소나무
경주에도 남산이 있다는 말을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마련이다. 그럼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서울인가, 경주인가. 실제로 경주 남산의 능선에도 구부러지고 뒤틀리며 자라는 전형적인 한국의 소나무들이 많다.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경주 삼릉의 솔숲을 보고 혹자는 “소나무들이 사교댄스를 추고 있는 무도회장에 들어온 기분”이라 말할 정도다.
경주 통일전 부근 염불사지에서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동네나 산길이나 굴러다니는 돌들은 모두 석탑 부재고, 바위에 새겨진 것은 마애불이다. 산 입구에서 물이나 김밥이라도 사려고 했는데, 주변에 아무런 가게가 없다. 점심 도시락도 없이 산행을 잘 마칠 수 있을까.
호젓한 솔숲을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흘렀을까.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계단길에 빗자루질을 한 흔적이 선명했다. 이 산속에 누가 계단을 쓸었을까. 약수터 위 대안당(大安堂) 마루에 잠시 걸터앉아 쉬었다가 칠불암(七佛庵)에 도착했다.
구름이 걷히고 따스한 햇살이 비칠 때마다 더욱 또렷해지는 마애불의 얼굴 표정과 미소를 감상하고 있는데 암자 종무소에서 “식사하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웬 떡인가! 김밥을 준비하지 못해 하루 종일 굶으며 남산을 돌아다닐 생각을 했었는데, 너무나 반가운 소리였다. 암자 안으로 들어가니 감자 수제비 한 그릇이 빈속뿐 아니라 마음까지 꽉 채워준다. 부처님의 자비가 현현하는 순간이다. 댓돌 한쪽에 작은 커피 자판기까지 있어 공짜 커피도 마실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에 얼마 안 되지만 주머니에 있던 현금을 복전함에 넣고 왔다.
칠불암에는 눈이 맑고 푸른 비구니 스님이 계셨다. 12년 전 체코에서 숭산 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를 결심하고, 한국에 온 휴정 스님이다. 경북 청도 운문사에서 공부하고, 경주에 온 지 어느새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한국말을 정말 잘하는 휴정 스님은 마애불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칠불암 불상군 터는 오랫동안 숲에 가려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지역 주민들에 의해 발견됐다”고 설명해 주었다. 칠불암에서는 템플스테이도 많이 진행하는데, 외국인들이 특히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칠불암 우측 대숲을 지나 다소 가파른 계단을 따라 200m 정도 오르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나온다. 널찍한 경주 평야의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 벼랑 끝 바위다. 맞은편 토함산의 연봉들도 기운차게 흘러간다. 손에 용화 꽃가지를 들고,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이다. 아래쪽에는 동글동글한 구름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남산 자락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미륵보살상이다.
● 용장골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
경주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이다. 두 봉우리 사이에 남산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골짜기인 용장계곡이 펼쳐진다. 이곳에는 22곳의 절터와 11개의 석탑 유적지가 있다.
칠불암에서 용장계곡으로 넘어가는 삼화령 고갯길에는 억새가 하늘하늘 빛난다. 고갯길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 위가 지름 2m 크기 연꽃 모양으로 장식돼 있는 연화대좌가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 스님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했다는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이 있던 자리다.
용장곡 3층 석탑에서 아래쪽으로 10m쯤 내려오면 마애여래좌상과 삼륜대좌 석불좌상을 만나게 된다. 불상의 눈동자까지 보이는 보물급 마애여래좌상의 품격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더욱 놀라운 불상과 마주하게 됐다. 높이 4.65m의 대좌부터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신기한 모습이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가 시루떡도 아니고, 도넛도 아닐진대 세 개의 둥근 바퀴 모양의 돌이 탑처럼 쌓아 올려져 있다. 이른바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다.
용장사는 조선시대 생육신 김시습(1435∼1493)이 1462년 27세의 나이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던 곳이기도 하다. 용장골 계곡에는 설잠교가 놓여 있다. ‘눈 쌓인 봉우리’라는 뜻의 설잠(雪岑)은 매월당 김시습의 법호다. 금오신화는 조선의 금서(禁書)였다.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양생’ ‘이생’ ‘홍생’으로 ‘양 생원’ ‘이 생원’의 준말이다. ‘5세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산천을 유람하며 거짓 미치광이로 살았던 자신의 신세와 비슷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셈이다.
남산 열암곡에는 ‘5cm의 기적’으로 불리는 마애불이 있다. 600년 전 발생한 지진으로 쓰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불은 엎어진 불상의 얼굴과 바닥 사이에 불과 5cm의 틈밖에 없다. 암벽에서 떨어졌는데도 오똑하게 솟은 부처의 콧날이 그대로였다.
이후 1200년 가까이 자연스레 파묻혀 있던 덕분에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마애불 중 가장 완벽한 얼굴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이 불상을 세우자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쓰러져서도 얼굴 원형이 완전하게 보존된 기적의 불상을 보고자 하는 수많은 관람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경주의 야경 명소로는 월성(사적 16호)을 휘감아 흐르는 남천 위에 세운 월정교를 꼽을 수 있다. 웅장한 2층 문루와 곧게 뻗은 회랑이 조명에 빛나는 월정교는 특히 달이 뜨는 날에 운치를 더한다.
글·사진 경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남산 위의 저 소나무
경주에도 남산이 있다는 말을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마련이다. 그럼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서울인가, 경주인가. 실제로 경주 남산의 능선에도 구부러지고 뒤틀리며 자라는 전형적인 한국의 소나무들이 많다.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경주 삼릉의 솔숲을 보고 혹자는 “소나무들이 사교댄스를 추고 있는 무도회장에 들어온 기분”이라 말할 정도다.
경주 통일전 부근 염불사지에서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동네나 산길이나 굴러다니는 돌들은 모두 석탑 부재고, 바위에 새겨진 것은 마애불이다. 산 입구에서 물이나 김밥이라도 사려고 했는데, 주변에 아무런 가게가 없다. 점심 도시락도 없이 산행을 잘 마칠 수 있을까.
호젓한 솔숲을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흘렀을까.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계단길에 빗자루질을 한 흔적이 선명했다. 이 산속에 누가 계단을 쓸었을까. 약수터 위 대안당(大安堂) 마루에 잠시 걸터앉아 쉬었다가 칠불암(七佛庵)에 도착했다.
남산 문화재 중 유일한 국보인 ‘경주남산칠불암마애불상군’.
경주 남산의 수많은 문화재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경주남산칠불암마애불상군(慶州南山七佛庵磨崖佛像群)’이 눈앞에 나타났다. 절벽 바위에 아미타삼존불이 새겨져 있고, 그 앞 육면체 바위에는 동서남북 4개 면에 사방불(四方佛)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과 사방불을 합쳐서 ‘칠불암’이 된 셈이다. 한 시대에 한 명의 부처만 존재한다는 개념에서 사방불은 모든 공간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신앙으로 바뀌는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부처는 동서남북 사방은 물론이고 6방, 8방에도 존재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을 넘어 모든 세계에 존재한다는 개념을 보여주는 마애불이다.구름이 걷히고 따스한 햇살이 비칠 때마다 더욱 또렷해지는 마애불의 얼굴 표정과 미소를 감상하고 있는데 암자 종무소에서 “식사하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웬 떡인가! 김밥을 준비하지 못해 하루 종일 굶으며 남산을 돌아다닐 생각을 했었는데, 너무나 반가운 소리였다. 암자 안으로 들어가니 감자 수제비 한 그릇이 빈속뿐 아니라 마음까지 꽉 채워준다. 부처님의 자비가 현현하는 순간이다. 댓돌 한쪽에 작은 커피 자판기까지 있어 공짜 커피도 마실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에 얼마 안 되지만 주머니에 있던 현금을 복전함에 넣고 왔다.
칠불암에는 눈이 맑고 푸른 비구니 스님이 계셨다. 12년 전 체코에서 숭산 스님의 책을 읽고 출가를 결심하고, 한국에 온 휴정 스님이다. 경북 청도 운문사에서 공부하고, 경주에 온 지 어느새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한국말을 정말 잘하는 휴정 스님은 마애불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칠불암 불상군 터는 오랫동안 숲에 가려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지역 주민들에 의해 발견됐다”고 설명해 주었다. 칠불암에서는 템플스테이도 많이 진행하는데, 외국인들이 특히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칠불암 우측 대숲을 지나 다소 가파른 계단을 따라 200m 정도 오르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나온다. 널찍한 경주 평야의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 벼랑 끝 바위다. 맞은편 토함산의 연봉들도 기운차게 흘러간다. 손에 용화 꽃가지를 들고,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는 미륵보살이다. 아래쪽에는 동글동글한 구름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남산 자락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미륵보살상이다.
● 용장골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
경주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이다. 두 봉우리 사이에 남산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골짜기인 용장계곡이 펼쳐진다. 이곳에는 22곳의 절터와 11개의 석탑 유적지가 있다.
칠불암에서 용장계곡으로 넘어가는 삼화령 고갯길에는 억새가 하늘하늘 빛난다. 고갯길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 위가 지름 2m 크기 연꽃 모양으로 장식돼 있는 연화대좌가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 스님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했다는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이 있던 자리다.
남산 삼화령 연화대좌에서 바라본 전망.
연화대좌에서 내려다보니 고위봉과 태봉, 열반재, 용장골, 이무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몽골 초원에 있는 테렐지 국립공원에 갔을 때 산 중턱 사원에서 초원 계곡에 있는 거대한 거북바위를 바라봤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연화대좌에서도 우주의 에너지가 집중되는 장소의 느낌을 받았다. 경북 경주 남산을 상징하는 전망이 펼쳐지는 하늘 끝에 세워진 용장곡 3층 석탑. 해발 400m 지점의 능선에 자연 바위를 기단으로 세워져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불린다.
삼화령에서 용장계곡으로 내려가는 능선에 용장곡 3층 석탑이 푸른 하늘 위에 우뚝 서 있다. 탑의 높이는 4.5m에 불과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불린다. 해발 400m 절벽 자연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은 탑의 높이는 444.5m나 된다.용장곡 3층 석탑에서 아래쪽으로 10m쯤 내려오면 마애여래좌상과 삼륜대좌 석불좌상을 만나게 된다. 불상의 눈동자까지 보이는 보물급 마애여래좌상의 품격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더욱 놀라운 불상과 마주하게 됐다. 높이 4.65m의 대좌부터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신기한 모습이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가 시루떡도 아니고, 도넛도 아닐진대 세 개의 둥근 바퀴 모양의 돌이 탑처럼 쌓아 올려져 있다. 이른바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다.
‘삼륜대좌불.’ 석조여래좌상은 얼굴이 없다.
그 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얼굴이 없다. 어느 시대 목이 잘린 불상의 몸에 새겨진 아름다운 옷 주름은 더욱더 처연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삼국유사’에는 용장사에 살던 대현 스님이 불상 주위를 돌며 기도하면 불상도 그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바로 이 불상의 삼륜대좌 바퀴가 360도로 돌아가면서 기도하는 스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용장사는 조선시대 생육신 김시습(1435∼1493)이 1462년 27세의 나이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던 곳이기도 하다. 용장골 계곡에는 설잠교가 놓여 있다. ‘눈 쌓인 봉우리’라는 뜻의 설잠(雪岑)은 매월당 김시습의 법호다. 금오신화는 조선의 금서(禁書)였다.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양생’ ‘이생’ ‘홍생’으로 ‘양 생원’ ‘이 생원’의 준말이다. ‘5세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산천을 유람하며 거짓 미치광이로 살았던 자신의 신세와 비슷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셈이다.
남산 열암곡에는 ‘5cm의 기적’으로 불리는 마애불이 있다. 600년 전 발생한 지진으로 쓰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불은 엎어진 불상의 얼굴과 바닥 사이에 불과 5cm의 틈밖에 없다. 암벽에서 떨어졌는데도 오똑하게 솟은 부처의 콧날이 그대로였다.
이후 1200년 가까이 자연스레 파묻혀 있던 덕분에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 마애불 중 가장 완벽한 얼굴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이 불상을 세우자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쓰러져서도 얼굴 원형이 완전하게 보존된 기적의 불상을 보고자 하는 수많은 관람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경주 경북천년숲정원 거울숲 실개천 외나무다리.
● 가볼 만한 곳=경주 동남산 기슭에 있는 ‘경북천년숲정원’은 2023년 경북에서 1호이자 국내 5번째 지방정원으로 지정됐다. 입구에서 가까운 메타세쿼이아 숲길의 실개천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그곳에 서 있으면 실개천에 모습이 비치기 때문에 거울숲으로 불린다. 초겨울까지 단풍이 남아 있는 이곳엔 연인들끼리 인증샷을 남기려는 젊은이들로 긴 줄이 서 있다. 경주의 야경 명소로는 월성(사적 16호)을 휘감아 흐르는 남천 위에 세운 월정교를 꼽을 수 있다. 웅장한 2층 문루와 곧게 뻗은 회랑이 조명에 빛나는 월정교는 특히 달이 뜨는 날에 운치를 더한다.
글·사진 경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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