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대둔산에서 북장단 맞춰 쉬었다 간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글·사진 논산=전승훈 기자

입력 2024-04-27 01:40 수정 2024-04-27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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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제2봉 낙조대 정상 일출. 운해가 첩첩이 쌓여 있는 산그리메를 헤치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단가 ‘사철가’ 중)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대둔산(大芚山)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다. 해발고도 878m 정상에는 봄이 늦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1000여 개 봉우리 6km 능선이 물결치듯 이어지는 산그리메(산그림자)를 헤치고 떠오르는 붉은 해는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대둔산 수락계곡으로 내려와 논산 산골마을에서 들리는 국악 장단은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쉬었다 가라고 손짓한다.


●낙조대 일출과 산그리메


대둔산은 충남 논산과 금산, 전북 완주에 걸쳐 있다. 충남 쪽은 숲과 계곡이 부드러운 ‘육산(肉山)’이고, 전북 쪽은 기암괴석과 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골산(骨山)으로 두 개의 매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가장 대중적인 코스가 완주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것이다. 걸어서 대둔산을 오르는 코스 중 가장 짧은 곳은 금산 태고사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길이다.

대둔산 제2봉 낙조대는 일출과 일몰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명소다. 일출 산행을 위해 낙조대를 찾았다. 낙조대 정상은 해발 859m인데 그 아래 산기슭에 자리 잡은 태고사 해발고도는 660m 정도다. 태고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산하면 넉넉잡고 1시간 안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오전 5시쯤 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등산객이 몰고 온 대여섯 대 차량이 눈에 띄었다. 랜턴 불빛에 의지해 산을 오르니 계곡에서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낙조대 부근 암봉(巖峰)과 암벽으로 이뤄진 생애대(해발 735m)도 일출 명소다. 바위에 자라는 소나무 옆에 걸터앉아 떠오르는 해와 함께 찍는 인증샷으로 유명한 곳이다.

진달래가 피어 있는 능선을 지나니 드디어 낙조대 정상이다. 첩첩이 쌓여 있는 산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다닌다. 그 안에 불그스름한 해의 기운과 푸른 산의 기운이 이리저리 흘러다닌다. 운해(雲海)는 구름의 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 운해 위에 떠 있는 산봉우리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리라. 지금 이 순간 아름다움은 곧 그리움이 되겠지. 내 인생의 산그리메를 새벽 대둔산에서 만났다.

낙조대 밑에 있는 천년 고찰 태고사는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12승지의 하나로 꼽은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원효대사가 이 절터를 찾고 기뻐서 사흘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할 정도다. 만해 한용운도 태고사의 전망을 극찬했다고 한다.

태고사 올라가는 길에는 일주문 역할을 하는 바위 틈 사이에 난 문을 통과해야 한다.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이 태고사에서 공부를 할 적에 썼다는 ‘석문(石門)’이라는 글자가 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대둔산 봉우리 밑에 자리 잡은 태고사의 극락보전, 삼불전 등은 수려함을 보여준다. 태고사를 둘러보는 동안 하얀 털이 보송보송한 강아지가 따라온다. 오랜만에 사람을 본 때문일까. 백구는 내 다리에 몸을 비비고, 신발을 가볍게 물어도 보고, 앞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기도 한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절에는 왜 누렁이나 검은 강아지보다 늘 백구가 많이 살고 있을까.


●얼쑤! 국악이 흐르는 산골마을



대둔산에서 수락계곡 방향으로 내려오면 논산시 벌곡면 덕곡2리가 나온다. 대둔산 월성봉 아래 있는 조용한 산골 마을에서는 흥겨운 북장단에 맞춘 판소리와 국악 연주가 바람결에 들려온다. 이 마을 공연장에서는 1999년부터 매년 말에 산골마을음악회(올해 24회째)가 열리고 있다. 전국 판소리, 가야금 병창, 거문고 대금 아쟁 산조, 한국무용가를 비롯한 국악 명인과 관객들이 600∼700명 몰려든다. 또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 축제에도 주민 300여 명이 모여 사물놀이 같은 농악 공연을 성대하게 펼친다.

논산 벌곡면 덕곡2리 국악마을에서 만난 판소리 고법 무형문화재 김청만 명인.
대둔산 산골음악회가 성황을 이루는 이유는 이곳에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 보유자 김청만 명인(78)이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평생 타악을 연주해온 김 명인은 국립창극단 단원,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을 역임한 판소리 고법의 현존 최고수다. 그는 24년 전부터 대둔산 산골음악회를 이끌어 왔고 14년 전에는 이곳에 터를 잡아 거연당(居然堂)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판소리는 유파별로 무형문화재가 지정돼 있지만 북을 치는 고수로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람은 귀하다. ‘1고수 2명창’이란 말이 있듯이 4∼6시간 걸리는 판소리 완창을 이끌어 가는 데 고수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이 마을에는 고법을 배우는 사람들뿐 아니라 판소리 이수자 및 전수자, 연주자, 무용가 같은 다양한 전통예술인이 연간 200∼300명 찾아온다.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 고법의 역사를 알리고 보존하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김 명인은 “북장단은 판소리에만 7가지가 있고 유파별로 따지면 모두 35가지로 확대된다”며 “이렇게 다채로운 타악 장단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민속악이 얼마나 화려한 문화인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 예술인뿐 아니라 마을 사람도 인간문화재에게 북장단을 배우는 것이 이 마을의 놀라운 점이다. 주민들은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오후 3시에 김 명인에게 북장단과 소리를 무료로 강습받는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마침 강습날이었다. 사람들이 명인의 북장단에 맞춰 판소리 흥보가 ‘화초장 타령’과 ‘사철가’ 같은 단가를 불렀다.

“2020년에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김 선생을 찾아온 제자 중에 사철가를 잘하는 분이 계셨어요. 제가 옆에서 외워서 따라 불렀더니 김 선생께서 ‘입 모양 보고 따라 하는 건 알겠는데 너무 엉터리로 부르더라. 내일부터 와서 장단부터 배워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마을의 1호 제자가 됐어요. 원래는 국악을 전혀 몰랐는데 장단을 먼저 배워 박자를 맞추니 소리의 흥겨움과 재미를 느끼게 됐습니다.”(안영옥·59)

덕곡리에서 김 명인에게 고법을 배우는 주민들은 교사, 공무원, 회사원으로 일하다 은퇴해 귀촌한 사람들이다. 우리 음악과 한국화, 정원에서 즐기는 국궁과 파크골프(공원에서 하는 골프의 일종)까지 문화예술이 흐르는 덕곡리는 인구 소멸의 위기를 딛고 대전 등지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늘어나 덕곡2리라는 마을이 하나 더 생겼을 정도다.

전직 교사 출신 김남식 씨(72)는 “전국에서 김 선생의 고법에 맞춰 한 번이라도 노래하며 춤추고 싶어 하는 프로 예술인이 많은데 우리는 아마추어인데도 무형문화재에게 배우니 모두가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약 6만6000m²(약 2만 평)인 대둔산 국악마을 중심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정원이 꾸며져 있다. 이곳에 있는 함께하는 세상나눔터 도서관에서는 국악 강습 말고도 사진 전시와 한국화 강습도 열린다. 시냇물 소리와 어우러지는 북장단과 판소리는 멋진 풍류를 느끼게 한다. 함께하는 세상나눔터 김갑수 대표는 “우리나라 옛 정원은 단순히 꽃과 나무, 연못과 같은 자연을 감상하는 정자를 넘어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즐기는 문화예술 공간”이라며 “문화예술을 배우고 즐기는 공동체로서의 국악 체험마을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대둔산이 비치는 수락저수지

논산 수락저수지 둘레길(2km)을 걸으면 물에 비친 대둔산 봉우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대둔산 등산 코스 중 하나인 논산 수락계곡은 석천암에서 군자계곡을 거쳐 흘러드는 맑은 물과 수락폭포(화랑폭포) 및 선녀폭포 풍경이 압권이다. 벌곡면 수락계곡 입구에는 수락저수지가 있는데 마천대와 낙조대 같은 대둔산 봉우리가 물에 비친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둘레길이 있다. 농업용 관개용수를 대는 작은 저수지인데 주변에 총연장 2km가량의 나무로 된 길이 있어 아기를 안은 부부도 30분이면 편안히 일주할 수 있다. 대둔산 봉우리가 호수에 정확하게 데칼코마니처럼 비친 ‘반영 샷’을 찍을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다양한 봄꽃이 피고 지는 호수 주변에는 카페도 많이 들어서 있다.



글·사진 논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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