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히또와 헤밍웨이, 올드카, 카리브해…여행지 쿠바를 가보니

뉴스1

입력 2024-02-16 17:47 수정 2024-02-1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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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트리니다드 풍경. 2017.11 ⓒ 최종일 기자=News1

한국과 쿠바가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공식 외교관계를 전격 수립했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꿈에 그리던 여행이 가까워진 것 같다”며 이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작은 국가를 직접 방문하는 설렘을 담은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기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2017년 11월에 쿠바를 휴가를 내 8일 간 다녀온 적이 있다. 당시에 수도 하바나를 비롯해 곳곳 다니며 썼던 여행기를 지금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새롭다. 쿠바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글을 다시 소개한다.
쿠바 아바나 도심 골목 2017.11 ⓒ 최종일 기자=News1

# 아바나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손때 묻고 낡았지만 위엄을 잃지 않고 있다. 첫날 자정에 가까운 시각,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갈 땐 가로등이 거의 없어 어둑한데다 행인들도 보이지 않아 긴장도 됐다. 처음 방문한 인도에서 뉴델리 공항을 빠져나올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아침에 도심으로 걸어 들어가자 딴 세상이었다. 옛 국회의사당 건물인 웅장한 카피톨리오 앞을 올드카가 지나갈 때면 그림엽서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올드 아바나 집들의 발코니에 널려있는 빨래와 벗겨진 페인트칠, 원색의 유럽풍 건물들, 그리고 그래피티들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아바나의 매력을 내뿜었다.

# 모히또

아침 댓바람부터 칵테일을 음미했다. 모히또와 다이끼리, 쿠바리브레, 피나콜라다까지. 쿠바의 대표 농작물인 사탕수수를 증류시켜 만든 럼주를 기본으로 한 칵테일들이다. 미국의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권했다고 말하고 싶다. ‘노인과 바다’를 쓴 헤밍웨이는 쿠바를 사랑했고 이곳에 수년간 머무르며 칵테일을 즐겨마셨다. 헤밍웨이가 ‘내 모히또는 라 보데기타에 있고, 내 다이끼리는 엘 플로리디타에 있다’고 쓴 글은 라 보데기타에 걸려 있다. 이 글은 시효가 아주 긴 저작권 같다. 두 바(bar)는 헤밍웨이의 명성 덕분에 늘 문전성시를 이룬다.
쿠바 아바나에 있는 말레꼰 2017.11 ⓒ 최종일 기자=News1

# 말레꼰

아바나의 중심인 오비스포 거리엔 흥겨운 음악이 끊이질 않는다. 밴드 연주가 흘러나오는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입구에서 살사 스텝을 멋들어지게 밟고 있는 노인도 보였다. 돈을 받고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거리 한쪽엔 와이파이에 접속해 인터넷을 하려는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모여있었다. 한 시간에 2000원 정도다. 환전소, 상점 수가 많지 않다보니 줄을 서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바나 혁명광장에는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였던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대형 얼굴 그림이 있다. 오후엔 석양이 내리는 말레꼰(방파제)을 한참이나 걸었다. ‘베사메무초’(Besame Mucho) 색소폰 연주가 머리에 맴돌았다.

# 혁명과 경제제재

쿠바는 숨가쁜 근현대사를 겪었다. 흑인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스페인의 약 400년 식민통치와 저항, 독립. 이어진 미국의 강점과 바티스타 정권의 독재(이 시기 쿠바의 토지는 미국 자본과 소수 대지주들에게 집중돼 있었고 부패한 독재정권에 대한 민중의 봉기는 미국의 비호 아래 진압됐다) 그리고 멕시코에 망명중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피델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 등과 3년간의 무장투쟁 끝에 1959년 성공시킨 공산혁명까지.

혁명군은 1956년 12월 멕시코에서 요트를 타고 쿠바에 들어왔다. 정원 25명의 요트 ‘그란마호’에는 82명이 타고 있었다. 도착 직후 혁명군은 정부군에 적발됐고 이중 12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농민들의 지원으로 세를 불려 3년 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혁명에 성공했다.

미국의 턱밑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혁명을 미국은 좌시하지 않았다. 미국이 카스트로 정권 타도를 위해 쿠바계 반공 게릴라를 침투시킨 ‘피그만 침공 사건’, 3차 대전으로 이어질 뻔했던 미사일 위기 등 현대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사건들이 일어났고 쿠바는 이를 막아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경제제재도 이 시기에 시작됐다.

하지만 혁명의 기세는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수그러들었다. 소련의 지원 중단과 미국의 계속된 경제 제재와 맞물려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 쿠바는 관광업 진흥과 점진적 시장개방으로 경제난을 타개하고자 했다.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한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은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경제는 순항하고 있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관계 정상화 선언과 쿠바 방문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 트리니다드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모습이 남아 있는 중부 트리니다드의 마요르 광장에선 쿠바 음악 손(SON)과 레게톤(reggaeton)에 흠뻑 빠졌다. 광장 인근 카페 ‘카사 데 라 무지카’에선 밴드가 늦은 밤까지 연주했다. 무대 앞에 자리 잡은 젊은 쿠바 청년들은 하나둘 일어나 유럽 관광객 여성과 살사 춤을 췄고 앉아 있는 몇몇도 몸을 주체 못했다. 한 남성은 짧은 머리에 ‘I’ll do it tomorrow(내일 하자)‘라고 적힌 셔츠와 군복 하의를 입고 있었고, 다른 남자는 성조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밤이지만 날은 여전히 더웠다. 차가운 쿠바리브레, 피나콜라다 칵테일 두세잔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해질녘 하나둘 모였던 관광객들은 어느새 돌계단을 빼곡히 메웠다. 액자 속 마을처럼 보여 낮에 한참을 돌아다녔던 돌길과 돌계단, 썩 밝진 않은 광장의 불빛, 그리고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3~4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내 태블릿은 여전히 와이파이를 잡지 못했지만 인터넷이 궁금하지 않았다.

# 저녁놀

해질녘 버스는 산타클라라를 떠난다. 에메랄드 빛 카리브 해를 만날 수 있는 바라데로까지는 3시간 거리. 도로환경이 크게 나쁘진 않다. 지친 배낭여행자들을 실은 중국산 버스는 촉촉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3차선 도로를 여유롭게 달린다. 버스 앞 유리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어폰에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찬찬‘이 흘러나오다. 저 멀리 보이는 야자수들이 저녁놀에 불타고 있다. 세상에 나온 지 50년은 넘었을 것 같은 올드카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이따금 지나간다. 내가 ‘혁명과 낭만’의 나라 쿠바에 와있구나.

# 카리브해

바라데로에 왔다. 소련 붕괴 이후 지원이 끊기자 관광업 진흥을 위해 쿠바가 1990년대에 조성한 도시다. 비수기라 서울 모텔보다 몇만원 정도 더 비싼 올인클루시브호텔을 예약할 수 있었다. 낡긴 해도 시설이 나쁘진 않다. 유럽인들이 적지 않게 해변을 즐기고 있다. 쿠바인들도 자주 보인다. 자본주의가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다는 징표로 보인다. 어찌 됐든 섬나라 쿠바에서 처음 바다를 만났다. 지금 눈 앞에는 카리브해가 펼쳐져 있다. 물은 차갑지 않지만 바람은 시원하다. 피나 콜라다가 더 달달하다. 바다 건너엔 미국이 있다.
쿠바 트리니다드에서 만난 티코 운전자 2017.11 ⓒ 최종일 기자=News1

# “쿠바의 방식”

쿠바 국민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HOLA(안녕)‘ 한마디에 이방인에 대한 벽을 허무는 것 같았다. 체 게바라의 유품에서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책이 있었다고 자랑스러워했던 터키계 프랑스인은 쿠바 국민들은 가난하지만 명예를 갖고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장기간 지속된 경제난으로 가슴에 뭉쳤던 응어리는 특유의 낙천적 성격으로 푸는 것 같았다.

어떤 쿠바인은 누적 70만km 달린 닳고 닳은 ’티코‘를 가리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떤 이는 기차 한 량을 뒤에 실은 트럭을 보며 놀라워하는 내게 “1000km 이상을 달리는 쿠바의 교통수단”이라며 자랑했다. 아바나에서 볶음밥과 비슷한 길거리 음식을 사먹을 때 점원은 “쿠바의 방식”이라며 종이 상자를 푹 찢어 숟가락 모양으로 만들어 건넸다. 환한 미소와 함께.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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