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향해 동쪽으로 간 사람들… 태평양의 거센 파도가 만들어낸 도깨비 빨래판[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전승훈 기자
입력 2023-11-04 01:40 수정 2023-11-04 01:40
일본 미야자키 니치난 해변에 있는 호리키리 언덕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깨비 빨래판’ 지형. 해안가에서 파도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울퉁불퉁한 바위 기둥이 일렬로 늘어서 있어 거인의 빨래를 하는 곳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일본 규슈섬 남동쪽에 있는 미야자키현은 일본의 하와이로 불린다. 일본 고대신화 속 결혼과 출산의 땅이자 태양을 향해 출정에 나선 곳이라는 전설 때문에 일본인들의 신혼여행 1순위인 남국의 땅이다. 또한 연중 온화한 기후 덕택에 한일 프로야구 전지훈련장으로 각광받고 있고 골프와 서핑의 성지이기도 하다.
● 해안 주상절리와 도깨비 빨래판
도깨비 빨래판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미야자키의 니치난 해변도로에 있는 호리키리 언덕. 전망대에서 아열대 식물이 우거진 계단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 보니 웅장한 해안가에 수 km에 걸쳐 일렬로 수많은 금이 가 있다. 처음엔 김 양식장인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만들어낸 자연의 예술품이었다.
미야자키 아오시마(靑島) 해변에선 더욱 가까이에서 도깨비 빨래판을 볼 수 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거센 파도에 접한 사면은 매끄럽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반대편 부분은 깊이 파여 있다. 아빠와 아이가 바위에 살고 있는 작은 게와 조개를 잡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약 650만 년 전 바다에 층층이 퇴적된 사암과 이암층이 해변으로 융기했는데, 오랜 세월 파도의 침식으로 단단함과 연약한 층의 차이로 울퉁불퉁해졌다는 것이다.
아오시마 신사로 가는 다리를 건너니 신성한 곳이 시작됨을 알리는 붉은색 ‘도리이’가 일주문처럼 세워져 있다.
아오시마 신사 앞 해변 ‘도깨비 빨래판’의 울퉁불퉁한 바위에서 아이가 게를 잡고 있다.
아오시마는 둘레가 약 1.5km에 이르는 작은 섬이다. 아오시마섬은 도깨비 빨래판 지형에 퇴적물이 쌓여 섬으로 자라났고, 여기에 야자나무 씨앗이 떨어져 숲을 이뤄 ‘푸른 섬(靑島)’이 됐다고 한다. 섬에는 약 4300그루의 야자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숲속 신사에는 ‘커플 나무’가 있어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와서 조개껍데기를 던지며 소원을 비는 곳도 있다.
휴가곶에 있는 주상절리 협곡인 우마가세.
미야자키현 휴우가(日向)시에 있는 ‘우마가세’와 ‘크로스의 바다’는 바닷가에 세로로 서 있는 돌기둥 주상절리가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약 70m에 이르는 주상절리 절벽이 푸른 바다 앞에 우뚝 솟은 우마가세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다. 좁은 협곡으로 들이치는 파도는 아찔한 기분을 사진으로는 담기 어려운 것이 아쉬울 뿐. ‘우마가세(馬ヶ背)’는 ‘말의 등’이라는 뜻. 주상절리 바위의 색이 말의 밤색을 닮았고, 바다에서 바라본 형상이 마치 말의 등처럼 좁게 솟아올라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우마가세의 산책로는 태평양을 파노라마처럼 관망할 수 있는 휴가곶까지 이어진다. 인근에 있는 또 다른 전망대로 발길을 옮기면 파도의 침식으로 깎인 바위 협곡 사이로 푸른 바다가 십자가 모양으로 떠올라 있다.
‘크로스의 바다’에서 소원을 빌고 있다.
‘크로스의 바다’다. 근처에 위치한 작은 바위틈과 합치면 ‘叶’(이뤄진다는 뜻)자로 보인다고 하여 이곳에서는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비는 사람이 많다. 주변에는 하늘에 소원을 전달하는 종루도 있다. 백제촌이 있는 미야자키는 일본의 건국 신화가 담긴 땅이기도 하다. 우마가세에서 약 10분 거리에는 주상절리 암벽 위에 세워진 오미(大御)신사가 있다.
경내에는 일본의 국가에 나오는 ‘사자레이시(細石·조약돌)’가 놓여 있다. 이 돌은 일본의 초대 왕이 배를 타고 태양이 뜨는 쪽을 향해서(日向) 정벌에 나섰던 지점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래서 동네 이름이 휴가(日向)다. 미야자키란 이름도 ‘궁궐(宮)이 있는 곶(崎)’이란 뜻으로 일왕가와 관련이 있다.
바닷가 절벽 해식동굴에 자리 잡은 우도신궁.
미야자키시 우도신궁은 바닷가 절벽 해식동굴에 자리 잡은 신사다. 절벽 위 파도가 들이치는 바위 위에 자리 잡은 모습이 강원 양양 낙산사 홍련암과 비슷하게 보인다. 일본 건국신화에는 일본 초대 왕의 아버지가 이 동굴 속에서 태어나 암벽에 떨어지는 물을 마시고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우도신궁은 순산과 원만한 부부관계를 상징하는 명소다. 일본의 전통적인 신혼여행지 1순위로 꼽히던 곳이고, 지금도 한 해 100만 명이 찾아온다.
우도신궁 앞 바다에는 거북 모양의 바위 ‘귀암(龜巖)’이 있는데, 붉은색 점토를 구워 만든 ‘운다마(運玉)’를 던지며 소원을 빈다.
동굴 입구에서 200엔을 주면 운다마 5개를 살 수 있는데,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비는 것보다 좋은 생각이 아닐까 싶다. 천연 점토를 구워서 만든 돌이기 때문에 수거하지 못하더라도 바닷가의 자갈 중 하나로 되돌아갈 테니까 말이다.
● 야구, 골프, 서핑의 성지 미야자키
미야자키는 일본에서는 신혼여행지로 유명하지만 우리에겐 프로야구팀 동계훈련과 골프 여행지로 더 알려져 있다. 겨울에도 영상 10도 이상의 온화한 기후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미야자키는 야구의 도시다. 올해 10월 9∼30일 열렸던 미야자키 교육리그에는 한화, 삼성, 두산의 선수들이 대거 참가했다. 공식 명칭이 ‘미야자키 피닉스 리그’인데 일본 프로야구 12개 팀과 일본 독립리그 2개 팀, 한국 연합팀 등 총 16개 팀이 참가했다. 미야자키에는 실내외 야구 연습경기 시설이 풍부해 국내 프로야구팀의 동계캠프로 자주 이용되고 있고, 요미우리 등 일본에서 전지훈련 온 프로야구팀과 연습게임을 하기도 한다. 미야자키는 또한 겨울철 골프 여행지로도 인기가 높다. 미야자키에서 만난 골프리조트 관계자는 “전체 멤버십 회원 중 40∼50% 정도는 한국인”이라고 귀띔했다.
그래서 미야자키현에서는 스포츠 담당부서가 관광전략을 이끌고 있다. 요즘 미야자키의 최대 화두는 서핑이다. 한국은 양양이 서핑의 성지이듯 일본에서는 미야자키가 서핑의 성지다.
미야자키현이 서핑 성지가 된 것은 ‘파도의 질’과 ‘기후’가 가장 큰 요인. 태평양과 면해 있는 미야자키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약 400km에 걸쳐 해안선이 이어져 있다. 하와이를 방불케 하는 사람 키의 세 배 정도로 큰 파도가 규칙적으로 밀려온다. 또한 가로로 길게 일렬로 오기 때문에 서퍼들이 올라타 질주하기에 좋은 파도다. 겨울(12월부터 이듬해 3월)에도 영상 10도 이상의 기온이라 서핑 슈트를 착용하면 겨울 서핑도 즐길 수 있다.
미야자키는 늦가을에도 서핑이 한창이다. 아오시마 해변의 호텔에서 동트기 직전 새벽에 창밖을 보니 바다에 나온 서퍼들로 가득찼다. 이곳에서 만난 한 의사는 “매일 새벽에 나와 2시간 정도 ‘일출 서핑’을 즐기고 출근한다”고 말했다. 미야자키현에서 가장 대표적인 서핑포인트는 미야자키시 기사키하마 해변과 휴가시 오쿠라가하마 해변이다. 기사키하마 해변에는 지난달 5일 제57회 전일본 서핑챔피언십 대회가 열렸다. 연인원 5000명이 관람하는 서핑대회인데, 해변엔 솔숲과 샌드위치를 파는 푸드트럭 한두 대를 빼놓고는 어떤 편의나 유흥시설이 보이지 않았다.
서핑족들은 조용한 바닷가에서 그야말로 진지하게 서핑만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서핑 성지 강원도 ‘양리단길’이 클럽을 방불케 하는 떠들썩한 분위기인 것과는 사뭇 달랐다. 2013년 동일본대지진 이후로 해변 가까운 곳에는 편의시설을 새로 지을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미야자키현 관계자는 “일본에서는 서핑 역사가 100년이 넘어 오래된 서핑문화를 갖고 있다”며 “서퍼들이 인근 주민들에게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원칙을 잘 지키면서 서핑을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 가볼 만한 곳=휴가시 해변에 있는 ‘바다의 계단(Stairs of the Sea)’(사진)은 서핑족들을 위한 카페다. 1, 2층 건물에는 서핑 관련 기념품과 레스토랑이 있다. 서핑 캐릭터가 그려진 수제맥주가 유명하다. 아시아나항공은 2020년 운항을 중단했던 미야자키 노선을 9월 말부터 재개해 주 3회 일정으로 운항하고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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