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이진석 기자의 Car in the Film]그 아름다운 차와 절망의 끝에 서다

동아일보

입력 2012-06-21 03:00 수정 2012-06-2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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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 230SL/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커다란 먹구름이 조금씩 내려앉네요. 난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

세계적인 가수 밥 딜런이 부른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nockin’ on Heaven’s Door)’의 한 소절입니다. 만약에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어쩌면 절망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눈앞에 드러나는 게 아닐까요.

밥 딜런의 진혼가(鎭魂歌)와 같은 제목을 가진 토마스 얀 감독의 1997년작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시한부 판결을 받고 삶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두 남자의 여정을 담은 로드무비입니다.

뇌종양에 걸린 마르틴(틸 슈바이거)과 골수암 말기 판정을 받은 루디(얀 요제프 리퍼스). 같은 병실에서 만난 이들은 함께 바다로 떠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천국에는 별다른 얘깃거리가 없어. 그저 바다의 아름다움과 석양을 얘기할 뿐이야.” 마르틴의 이 한마디에 루디의 마음이 끌린 겁니다.

이들은 병원 주차장에서 바다처럼 아름다운 차를 발견합니다. 하늘색의 1967년형 메르세데스벤츠 230 SL. 천 재질의 멋들어진 지붕을 열어젖히면 언제라도 하늘을 볼 수 있는 2인승 소형 스포츠카입니다.

차 이름 SL은 독일어 Sport Leicht(가벼운 스포츠카)의 약자입니다. SL은 차체를 입체골조 방식으로 설계해 소형 스포츠카의 약점인 강성을 확보하면서도 무게를 크게 줄여 고속주행에 강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1954년 최초 모델이 출시된 SL 시리즈는 5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SLK’ ‘SLS’ 등으로 그 계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훔친 230 SL은 다름 아닌 마피아들의 차였습니다. 트렁크에는 무려 100만 달러(약 11억6000만 원)가 실려 있었죠. 게다가 상태가 잘 보존된 1967년형 230 SL이라면 클래식 중고차 경매에서 수십만 달러는 충분히 받아낼 수 있을 겁니다.

뜻밖의 ‘횡재’를 만나 마지막 소원을 이뤄가며 즐거워하던 이 둘에게는 조금씩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마르틴의 잇단 발작과 마피아들의 추격. 우여곡절 끝에 벌인 인질극으로 경찰의 수배령까지 떨어지며 이들의 상황은 점차 어려워집니다. 결국 마피아들에게 붙잡혀버린 마르틴과 루디. 그러나 뜻밖에도 마피아 보스는 이들을 풀어줍니다.

풀려난 이들은 걷고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간신히 바다에 도착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천국의 문 앞에 앉아 테킬라를 나누어 마시며 삶의 끝을 맞이합니다.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의 뒷모습을 담은 엔딩은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을 만합니다.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밥 딜런의 원곡을 독일 그룹 젤링(Seling)이 다시 부른 겁니다.

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해안선의 끝에는 과연 천국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지금도 저 하늘의 구름 위에 앉아서 바다와 석양을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천국의 문을 두드려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죠. 천국을 향해 펼쳐진 도로가 있다면 230 SL을 타고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진석 기자 ge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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