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 블랙박스가 밝혀냈다, 반칙운전男들의 오리발
동아일보
입력 2013-06-03 03:00 수정 2013-06-03 09:07
■ “경찰이 폭주족으로 몰아” 사실은
“신호위반이나 위협운전을 한 적이 없는데 경찰이 폭주족이라며 단속했어요. 억울합니다.”
A 씨(38)는 지난달 25일 오전 4시 50분 중고차 매매사이트 ‘보배드림’에 이런 글을 올렸다. 친한 동생들인 B 씨 형제(29세, 23세)와 각자 차를 몰고 경기 광주시에서 서울 강남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을 뿐인데 경찰이 미행하더니 폭주족으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조회 수 6만 건을 넘기며 공분을 샀다. A 씨는 청와대와 경찰청, 국민권익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에도 잇달아 민원을 내며 ‘경찰이 부당하게 단속했다’고 호소했다.
A 씨 일행을 단속했던 서울 강남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 양유열 경장은 이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다. 양 경장은 지난달 27일 보배드림에 “부당한 수사가 아니다. 증거를 분석해서 사실관계를 정확히 규명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자신의 실명과 소속, 휴대전화 번호도 공개했다.
양 경장은 지난달 24일 밤 서울 강남구 경복아파트 사거리에서 폭주족을 단속하기 위해 자신의 싼타페 승용차에 타고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 오후 9시 반경 A 씨의 벤츠 SLK350, B 씨 형제의 람보르기니와 벤츠 SLK350이 연달아 중앙선을 넘어 불법 U턴하는 장면을 보고 추격해 이들을 단속했다.
양 경장은 단속 당시 A 씨로부터 임의제출 형식으로 블랙박스 본체를 통째로 받아뒀다. 또 자신의 캠코더로 추적 장면을 촬영했다. 블랙박스를 분석해보니 A 씨 일행의 외제 스포츠카 3대가 중부고속도로와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울 강남구 역삼동 식당까지 오는 동안 앞뒤로 줄지어 달리면서 집단으로 급차로변경(칼치기) 14회, 중앙선 침범(불법 U턴 포함) 3회, 보행자 위협 2회, 갓길 질주 및 골목길 역주행 각 1회 등을 일삼은 증거들이 녹화돼 있었다.
A 씨는 양 경장이 반박 글을 올리자 지난달 28일 오후 양 경장에게 전화로 “처벌받을 게 두려워 허위 사실을 인터넷에 적고 민원까지 제기했다. 모든 민원을 취하하고 인터넷에 사과 글을 쓸 테니 선처해 달라”며 꼬리를 내렸다. 다음 날엔 강남경찰서로 와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는 보배드림에 올린 글을 지우고 사과문을 올렸다.
인터넷에는 여전히 경찰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와 있고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지만 양 경장은 수사 자료임을 감안해 블랙박스 등의 동영상은 인터넷에 올리지 않았다. 강남경찰서는 A 씨 등 3명을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공동 위험행위)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2일 밝혔다. 엉터리 민원을 제기한 부분에 대해서는 A 씨가 반성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별도로 입건하지 않기로 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 “사고 차량에 나도 부딪혀” 진실은
4월 20일 오후 11시 55분경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동호대교 남단 압구정 고가에서 교통사고로 두 명이 숨졌다. 하행선을 달리던 김모 씨(32·회사원)의 K5 승용차가 중앙선을 침범하더니 마주오던 허모 씨(32)의 카니발과 부딪혀 두 운전자 모두 사망한 것이다. 당시 1차로를 달리던 김 씨의 차가 2차로에 있던 박모 씨(31)의 벤츠 S600과 부딪혀 중앙선 너머로 튕겨 나가면서 발생한 사고였다.
벤츠 운전자 박 씨는 사고 직후 경찰에 “K5가 갑자기 끼어들면서 내 차를 치더니 중앙선으로 튕겨 나갔다”며 자신이 피해자라고 진술했다. 사고 현장엔 폐쇄회로(CC)TV가 없는 데다 박 씨의 차량에도 블랙박스가 없었다. 구겨지고 조각난 K5 잔해 속에서 블랙박스를 찾아냈지만 사고장면은 녹화돼 있지 않았다. 박 씨의 진술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어 숨진 김 씨의 과실에 의한 사고로 결론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울 강남경찰서 강경원 경사는 박 씨의 진술에만 의존해 숨진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결론짓는 걸 망설였다. 강 경사는 증거를 더 찾아보기로 했다. 그는 사고 다음 날인 4월 21일부터 박 씨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조회하다 박 씨가 지인에게 “아, 죽겠다. 회장님 시켜서 경찰 눌러야겠다”라고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다. 박 씨와 지인이 동호대교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다 나온 말이었다.
강한 의문이 든 강 경사는 박 씨를 불러 거짓말탐지기로 조사했다. 결과는 거짓. 또한 사고 현장에 목격자를 찾는다고 붙여둔 플래카드를 보고 사고 당시 김 씨의 K5 뒤에서 운전하던 목격자가 찾아와 “박 씨의 벤츠가 김 씨의 K5 앞에 끼어들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고 진술했다.
확신을 갖게 된 강 경사는 지난달 10일 박 씨를 불러 대뜸 김 씨의 K5 잔해에서 발견된 블랙박스를 내밀었다. 블랙박스 안에는 사고 당시 장면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이를 모르는 박 씨의 눈빛이 흔들렸다. 강 경사가 카카오톡 대화 내용, 거짓말탐지기 결과, 목격자 진술을 연이어 제시하며 추궁했다. 명백한 증거 앞에 박 씨는 고개를 숙이며 범행을 시인했다. 박 씨의 벤츠 승용차는 사고를 낼 당시 제한속도 60km 도로에서 시속 120km로 과속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칫 범인으로 몰릴 뻔한 김 씨의 유가족은 억울함을 풀었다며 한 맺힌 눈물을 흘렸다. 김 씨는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박 씨를 업무상 과실치사와 교통사고 처리 특례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2일 밝혔다.
조동주·곽도영 기자 djc@donga.com
“신호위반이나 위협운전을 한 적이 없는데 경찰이 폭주족이라며 단속했어요. 억울합니다.”
A 씨(38)는 지난달 25일 오전 4시 50분 중고차 매매사이트 ‘보배드림’에 이런 글을 올렸다. 친한 동생들인 B 씨 형제(29세, 23세)와 각자 차를 몰고 경기 광주시에서 서울 강남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을 뿐인데 경찰이 미행하더니 폭주족으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조회 수 6만 건을 넘기며 공분을 샀다. A 씨는 청와대와 경찰청, 국민권익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에도 잇달아 민원을 내며 ‘경찰이 부당하게 단속했다’고 호소했다.
A 씨 일행을 단속했던 서울 강남경찰서 교통범죄수사팀 양유열 경장은 이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다. 양 경장은 지난달 27일 보배드림에 “부당한 수사가 아니다. 증거를 분석해서 사실관계를 정확히 규명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자신의 실명과 소속, 휴대전화 번호도 공개했다.
양 경장은 지난달 24일 밤 서울 강남구 경복아파트 사거리에서 폭주족을 단속하기 위해 자신의 싼타페 승용차에 타고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 오후 9시 반경 A 씨의 벤츠 SLK350, B 씨 형제의 람보르기니와 벤츠 SLK350이 연달아 중앙선을 넘어 불법 U턴하는 장면을 보고 추격해 이들을 단속했다.
양 경장은 단속 당시 A 씨로부터 임의제출 형식으로 블랙박스 본체를 통째로 받아뒀다. 또 자신의 캠코더로 추적 장면을 촬영했다. 블랙박스를 분석해보니 A 씨 일행의 외제 스포츠카 3대가 중부고속도로와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울 강남구 역삼동 식당까지 오는 동안 앞뒤로 줄지어 달리면서 집단으로 급차로변경(칼치기) 14회, 중앙선 침범(불법 U턴 포함) 3회, 보행자 위협 2회, 갓길 질주 및 골목길 역주행 각 1회 등을 일삼은 증거들이 녹화돼 있었다.
A 씨는 양 경장이 반박 글을 올리자 지난달 28일 오후 양 경장에게 전화로 “처벌받을 게 두려워 허위 사실을 인터넷에 적고 민원까지 제기했다. 모든 민원을 취하하고 인터넷에 사과 글을 쓸 테니 선처해 달라”며 꼬리를 내렸다. 다음 날엔 강남경찰서로 와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는 보배드림에 올린 글을 지우고 사과문을 올렸다.
인터넷에는 여전히 경찰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와 있고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지만 양 경장은 수사 자료임을 감안해 블랙박스 등의 동영상은 인터넷에 올리지 않았다. 강남경찰서는 A 씨 등 3명을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공동 위험행위)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2일 밝혔다. 엉터리 민원을 제기한 부분에 대해서는 A 씨가 반성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별도로 입건하지 않기로 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 “사고 차량에 나도 부딪혀” 진실은
4월 20일 오후 11시 55분경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동호대교 남단 압구정 고가에서 교통사고로 두 명이 숨졌다. 하행선을 달리던 김모 씨(32·회사원)의 K5 승용차가 중앙선을 침범하더니 마주오던 허모 씨(32)의 카니발과 부딪혀 두 운전자 모두 사망한 것이다. 당시 1차로를 달리던 김 씨의 차가 2차로에 있던 박모 씨(31)의 벤츠 S600과 부딪혀 중앙선 너머로 튕겨 나가면서 발생한 사고였다.
벤츠 운전자 박 씨는 사고 직후 경찰에 “K5가 갑자기 끼어들면서 내 차를 치더니 중앙선으로 튕겨 나갔다”며 자신이 피해자라고 진술했다. 사고 현장엔 폐쇄회로(CC)TV가 없는 데다 박 씨의 차량에도 블랙박스가 없었다. 구겨지고 조각난 K5 잔해 속에서 블랙박스를 찾아냈지만 사고장면은 녹화돼 있지 않았다. 박 씨의 진술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어 숨진 김 씨의 과실에 의한 사고로 결론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울 강남경찰서 강경원 경사는 박 씨의 진술에만 의존해 숨진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결론짓는 걸 망설였다. 강 경사는 증거를 더 찾아보기로 했다. 그는 사고 다음 날인 4월 21일부터 박 씨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조회하다 박 씨가 지인에게 “아, 죽겠다. 회장님 시켜서 경찰 눌러야겠다”라고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다. 박 씨와 지인이 동호대교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다 나온 말이었다.
강한 의문이 든 강 경사는 박 씨를 불러 거짓말탐지기로 조사했다. 결과는 거짓. 또한 사고 현장에 목격자를 찾는다고 붙여둔 플래카드를 보고 사고 당시 김 씨의 K5 뒤에서 운전하던 목격자가 찾아와 “박 씨의 벤츠가 김 씨의 K5 앞에 끼어들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고 진술했다.
확신을 갖게 된 강 경사는 지난달 10일 박 씨를 불러 대뜸 김 씨의 K5 잔해에서 발견된 블랙박스를 내밀었다. 블랙박스 안에는 사고 당시 장면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이를 모르는 박 씨의 눈빛이 흔들렸다. 강 경사가 카카오톡 대화 내용, 거짓말탐지기 결과, 목격자 진술을 연이어 제시하며 추궁했다. 명백한 증거 앞에 박 씨는 고개를 숙이며 범행을 시인했다. 박 씨의 벤츠 승용차는 사고를 낼 당시 제한속도 60km 도로에서 시속 120km로 과속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칫 범인으로 몰릴 뻔한 김 씨의 유가족은 억울함을 풀었다며 한 맺힌 눈물을 흘렸다. 김 씨는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박 씨를 업무상 과실치사와 교통사고 처리 특례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고 2일 밝혔다.
조동주·곽도영 기자 dj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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