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100년 농협… 농촌·농업·농민의 새 희망

최영해 기자

입력 2022-11-14 03:00 수정 2022-11-1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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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sight]
‘꼰대조직’ 뿌리뽑고, 디지털 혁신 심은 이성희 농협중앙회 회장
신참때 벽돌공장 운영 제안 ‘승부사’… 빗물에 쓸려간 농약병 건져내기도
젊은 직원과 소통-태블릿 회의 주도, 농축산물-김치공장 통합에도 힘써
도시민들 고향 기부땐 농산물 답례… 특산물 개발 이어져 지역경제 활로
“尹대통령도 스마트팜 중요성 인식, 젊은이들 귀농에 국가적 관심 절실”


《농협중앙회가 변신의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2020년 2월 ‘함께하는 100년 농협’을 주창하며 총사령탑에 오른 이성희 농협중앙회장이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 1971년 낙생농협에 입사해 평생을 농협 한 우물을 판 그는 유통 혁신과 디지털 개혁으로 농협의 체질을 바꾸는 전면에 서 있다. 지방이 소멸되고 농촌이 시들어가는 위기에 맞서 청년농부사관학교를 활성화하고, 고향사랑기부제에 많은 사람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농촌과 농업, 농민을 위해 힘쓰는 농협의 활동상을 들여다봤다.》


잘사는 농업인 목표 ‘유통개혁으로 조직에 활력’ 씨앗 뿌려
고향사랑기부-청년농부사관학교 통해 소득 향상 밑거름



2020년 2월부터 농협중앙회를 이끌고 있는 이성희 농협중앙회장(사진)은 한평생을 농협에서 근무했다. 1971년 경기 성남의 낙생농협에 입사해 지금까지 농협이라는 한우물만 팠다. 입사 27년 만인 1998년에 낙생농협조합장이 됐고, 2003년 농협중앙회 이사에 이어 2008년에는 감사위원장에 올랐다. 한평생 농협에만 몸담은 그는 농협 총사령탑이 된 지 2년 10개월째를 맞고 있다. 4년 임기의 절반 고개를 넘은 셈이다. 한시도 농업과 농촌을 잊어 본 적이 없는 이 회장을 2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농협중앙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 농협 4년차 직원이 모래장사를?


관료 조직 냄새가 나는 농협이지만 그에겐 청년 같은 기백이 엿보였다. 농협에 근무하면서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하자 예기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농협에 근무한 지 4년쯤 되는 1975년 일입니다. 당시 새마을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전국에서 지붕개량 사업이 정부 주도하에 이뤄졌어요. 김치열 내무장관이 지방을 순시하다가 ‘저기’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게 바로 주택 개량을 하라는 신호였지요. 그때 제가 낙생농협에서 벽돌 공장을 운영해보자고 했습니다. 농협이 주택개량 사업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죠.”

벽돌공장은 농협의 목적사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이성희 사원은 이게 돈 되는 사업이라며 벽돌공장을 만들어 ‘브로크’를 찍어냈다. 시멘트 한 포대에서 찍어내는 벽돌이 120개쯤 될 때 그는 80개만 찍어냈다. 그만큼 단단한 벽돌로 승부를 본 것이다.

장사는 예상보다 잘됐다. 이 회장은 “농협의 고유사업이 아니다 보니 회계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며 “농협중앙회를 찾아가 한 달 동안 회계 처리하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고 회고했다. 서울대 상과대학을 나온 중앙회 간부는 그에게 친절하게 회계를 가르쳐줬다고 한다. 당시 주택개량 사업엔 모래가 필요했고, 이 때문에 ‘모래장사’라 불렸는데, 회계 처리 방법이 마땅찮아 고심했다고 한다.

농협의 사업도 아닌 분야를 찾아내 회계 처리까지 익히면서 한 벽돌 사업은 1975년 대장마로 벽돌과 기계가 다 떠내려가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엔 농약을 사무실 한편에 쌓아놓고 팔 때입니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 지하에 물이 차는 바람에 농약병이 둥둥 떠다녔어요. 농약이 귀할 때였어요. 나는 웃통을 벗은 채 팬티만 입고 뛰어들어 물에 떠있는 농약병을 건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감전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벌써 50년 가까이 흐른 일이네요.”

이 회장의 일화는 그가 농협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근무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장맛비에 비록 벽돌과 기계가 떠내려가 버렸지만 그가 농약병을 붙잡기 위해 몸을 던진 것을 보면 평생 농협맨이 되려고 작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래 장사’ 같은 엉뚱한 일을 한다면서 중앙회에서 혼도 났지만 그의 도전 정신은 누구나 쉽게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 ‘꼰대 조직’ 농협을 바꾸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2020년 초 농협 회장에 취임한 그는 농협의 문화를 젊게 바꾸는 일에 먼저 매달렸다.

“외부에서 보는 농협은 어떤 조직일까? 뭔가 늙어 있는 것 같고 구태의연함? 뭐 이런 조직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한마디로 ‘꼰대’ 느낌이 강한 그런 분위기로 비치는 것부터 고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회장은 먼저 젊은 직원들과 소통의 문을 활짝 열었다. 젊은 세대들과 만나 토론회를 열고 그들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했다. 새로운 발상을 통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MZ세대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패턴을 아는 것이 경영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미래의 고객인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생각도 읽어내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취임 첫해인 2020년 7월 이사회 때 제가 먼저 패드를 갖고 들어갔어요. 다른 이사들에겐 종이 문서를 나눠주고 앞으로 패드로 회의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하려면 시대의 변화에 맞춰야죠. 디지털 혁신은 제가 취임 이후 줄곧 강조해 온 분야입니다.”

이 회장이 취임 후 천명한 슬로건은 ‘함께하는 100년 농협’이다.

요즘 대기업들이 ‘함께’와 ‘100년 기업’을 자주 쓰는 것도 농협의 브랜드를 따라 온 것이라고 이 회장은 자부했다. 이 회장은 100년 농협을 위해 다섯 가지 핵심 가치를 내걸었다. 제일 먼저 꼽은 것은 농업인과 소비자가 함께 웃는 유통혁신이다.

두 번째가 미래 성장 동력을 창출하는 디지털 혁신이다. 이 회장은 “쿠팡이나 마켓컬리 같은 거대 온라인 유통회사가 사업을 시작한 것이 6, 7년 전의 일”이라며 “유통개혁과 디지털 혁신으로 빠른 속도로 공룡 온라인 유통회사를 따라잡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 번째 핵심 가치는 경쟁력 있는 농업과 잘사는 농업인. 농업소득이 실질적으로 농산물 판매소득이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도록 농협과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지역과 함께 살고 싶은 농촌, 마지막으로 정체성이 살아 있는 농협을 핵심가치로 삼았다. 임기 반환점을 돈 지금 이 회장은 자신이 내건 핵심가치를 실현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 유통혁신으로 농민과 소비자 ‘윈윈’


이 회장은 무엇보다 농민은 농축산물을 제값에 팔고 소비자는 합리적인 가격에 농축산물을 살 수 있도록 유통구조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지난해 11월 유통 자회사를 통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농협유통 충북유통 부경유통 대전유통 등 4개를 농협유통으로 통합해 농축산물 유통의 변화를 도모한 것이다.

4월에는 전국에 산재한 김치 가공공장을 하나로 통합해 100% 국산 농산물로 만든 ‘한국농협김치’라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선보였다. 전국 8개 공장을 하나의 법인으로 통합하고 배추김치 총각김치 갓김치 수출김치 등으로 특화하는 공장을 만들어 유통구조를 효율화했다.




● 고향사랑기부제로 애향심 높이고 농축산물로 답례


서울 농협중앙회 회장 집무실 입구에 설치된 전국의 농협특산물 전시부스에서 이 회장이 우리 농산물을 자랑하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이 회장은 내년에 도입되는 고향사랑기부제에 많은 국민들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도시로 나온 지방 출신들이 고향이나 원하는 지자체에 기부를 하면 세제 혜택과 함께 기부금의 일정액만큼 지역농산품 등으로 답례품을 주는 제도다.

“고향사랑기부제도는 농촌과 농업인들의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이 제도를 도입한 일본에선 지난해 고향 기부 건수가 4447만 건, 금액으로는 8조3000억 원이나 돼요. 세금 공제를 받은 사람도 741만 명에 이릅니다. 2021년 10월 국회에서 고향사랑기부금법이 제정돼 내년부터 시행되는데 농축산물로 답례품을 줄 수 있어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관련 제도를 10여 년 전 도입한 일본에선 기부금이 해마다 꾸준히 늘고 있다. 예컨대 자신의 고향에 기부금을 내면 지자체가 기부금으로 주민복리 사업이나 농기계 단지 조성 등 고향 발전을 위한 다양한 사업에 투자하고, 지자체는 농산물로 기부자에게 답례하는 구조다. 이렇게 되면 지방 재정을 확충할 수 있고, 동시에 지역 특산물을 답례품으로 주면서 주민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소멸 위기에 처한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농협도 기부자에게 특색 있는 답례품을 개발해 상품화할 수 있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농협은 고향사랑기부제와 연계한 예금과 적금, 카드 등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일본의 고향납세제도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다. 이 회장은 “답례품선정위원회에 각 지역 조합장들이 적극 참여해 지역의 농축산물 등 특색 있는 상품이 답례품으로 선정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며 “일본 사례를 보면 고향기부제도 홍보만 제대로 되면 많은 지방 출신들이 고향에 기부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했다.

● 尹대통령, 반도체 못지않게 농업 중요성 인식


농협은 청년들이 농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청년농부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20대와 30대 등 364명이 졸업해 이 가운데 228명이 농촌에 정착했다. 이 회장은 “아직은 사업 초기 단계라 매출이 크지 않지만 연매출 2억 원을 올린 사람도 나오고 7000만¤8000만 원을 거두는 청년농부도 적지 않다”며 “스마트팜으로 매출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식량안보와 식량주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이 사실입니다. 윤석열 대통령께서도 반도체 못지않게 농업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윤 대통령이 경북 상주의 대형 스마트팜을 방문하면서 농업과 농가소득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고무적입니다. 정부에서 예산 지원을 탄탄하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농가소득은 4700만 원을 넘지만 실제 농산물을 판매한 농업소득은 1300만 원도 채 안 되는 게 현실입니다. 네덜란드처럼 농업소득을 많이 거둘 수 있도록 해야 젊은이들이 농촌에 정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이 소멸해가는 농촌을 살리는 데 앞장서고 적극적인 귀농이 되게 하기 위해선 국가적인 관심이 절실하다고 이 회장은 거듭 강조했다.

이 회장은 물가 안정에 기여하기 위해 36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국민과 함께하는 따뜻한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상생사업을 기획해 추진하고 있다. 물가 급등 100대 품목 특별할인 430억 원, 제철농산물 가격 할인에 220억 원, 농협주유소 유류 저가 공급에 830억 원, 축산농가 사료비 지원에 1080억 원, 조합원과 청년농 등의 금융 지원에 350억 원을 책정해 각종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현장을 중시하는 이 회장은 올해 발생한 산불과 태풍 등 자연재해 지역에 바로 달려가 농민을 위로하고 지원대책을 내놓았다. 3월 5일엔 산불 피해를 입은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을, 8월 12일과 14일엔 폭우 피해가 막심했던 경기 광주와 강원 횡성, 경기 양평 여주 등지를 찾아 이재민들을 돌보는 한편 병해충 방제 무상지원 및 무이자 재해 자금을 지원했다. 추석을 앞두고 태풍 힌남노 피해를 입은 경북 봉화와 경주 포항 등 침수 피해 현장에도 방문해 침수 주택의 도배와 장판을 지원하는 등 현장에서 피해 복구 대책에 노력을 다했다.


● 취임식 대신 홍천 딸기농장 간 회장님


이 회장이 2020년 2월 취임식 대신 강원 홍천의 한 딸기농장을 방문해 농촌 일손 돕기에 나선 적이 있다. 농업인 및 국민과 ‘함께 하는 100년 농협’이라는 비전도 그의 이 같은 현장 중시 경영에서 비롯된 것이다.

6월 이 회장은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국제협동조합농업기구(ICAO) 총회에서 상하니 인도비료협동조합(IFFCO) 회장과 경쟁한 끝에 새 회장이 됐다. 1951년 창설된 이 기구는 35개국에서 42개의 협동조합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농업 분야 세계 최고의 협동조합국제기구로 농업인의 권익 향상과 농업 발전에 기여하는 단체다.

“100년 농촌을 위해 농업인대회를 조만간 여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직 농업 농촌 농민만 보고 농협을 운영하겠습니다. 농촌 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 농촌이 지금의 열악한 상황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농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유통 개혁과 디지털 전환정책으로 농협이 앞장설 것입니다. 정부와 농협이 합심해 소멸 위기에 처한 농촌에 힘을 불어넣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인터뷰하는 시간 내내 그의 입에선 농촌과 농업, 농민이라는 단어가 떠나지를 않았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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