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넘어 마음까지 사로잡는 ‘통합의 지휘자’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

장윤정 기자

입력 2022-05-02 03:00 수정 2022-05-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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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sight]
직원 발 씻겨주고 노조위원장 직접 찾아 술잔
배려-섬김의 리더십으로 전직원 하나로 묶어


하나금융그룹 제공

2015년 9월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통합으로 탄생한 KEB하나은행이 공식 출범했지만 금융권에서는 두 은행이 진정한 ‘원 뱅크’로 거듭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하나의 은행으로 시너지를 내려면 단순한 물리적 결합이 아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화학적 결합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두 조직이 하나가 되기란 ‘고차방정식’과 같은 난제였기 때문이다.

남녀가 결혼해 한집에서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9300여 명의 하나은행과 7800여 명의 외환은행을 통합하는 일이었다. 두 은행의 성격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국은행에 모태(母胎)를 둔 외환은행은 엘리트 성향이 강하고 기업금융에 강한 조직이었다. 반면 한국투자금융으로 출발해 서울은행, 충청은행, 보람은행 등과의 합병으로 성장해온 하나은행은 승부욕이 넘치고 의사 결정이 빠른 공격적 성향이었다.

KEB하나은행 초대 행장으로 함영주 당시 하나은행 충청영업그룹 부행장이 김병호 당시 하나은행장과 김한조 외환은행장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추대됐지만 ‘깜짝 발탁’, ‘파격 인사’라는 평이었다. 아무리 함 회장이 영업통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해도 통합은행의 초대 행장이라는 역사적인 자리가 가진 무게감과 통합이라는 과제가 너무나 컸던 것이다.

하지만 통합 은행의 초대 행장이 된 함 회장은 한 지붕 두 가족이던 두 은행의 실질적인 통합 과정을 주도하며 주변을 놀라게 했다. 취임한 지 1년도 안 된 2016년 6월에 전산 통합, 2016년 9월에는 노조 통합, 2019년 1월에는 인사제도 통합을 이루는 등 물리적 통합은 물론 화학적 통합도 뒷받침한 것이다.

화려한 스펙은 없었다. 하지만 시골 촌놈다운 진심과 끈기가 통했다. 함 회장은 은행장 내정 뒤 첫 일정으로 다른 사람을 다 제치고 옛 외환은행 노조위원장부터 마주했다. 노조 통합을 앞두고는 옛 외환은행 노조를 설득하기 위해 주말마다 노조위원장을 찾아가 술잔을 마주하며 마음의 벽을 허물려고 노력했다. 또 자신의 비서실장 자리에 외환은행 출신을 선임해 직원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섬김과 배려’, 3년 7개월간의 통합 은행장 시절 그의 사무실에는 이름 대신 저 문구의 푯말이 걸려 있었다. ‘상명하달’ 식이 아닌 손님과 직원을 섬기는 행장이 되겠다는 함 회장의 의지가 담긴 문구였다.

배려의 아이콘이자 덕장(德將)으로 알려졌던 그가 이제 하나금융그룹 회장으로 전면에 나서게 됐다. 3월 25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취임한 그는 김정태 회장의 뒤를 이어 앞으로 3년간 하나금융을 이끌게 됐다. 취임과 함께 사자성어 ‘염구작신(染舊作新)’이라는 키워드를 화두로 내걸었다. 옛것을 물들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그가 기존의 하나금융그룹을 어떻게 물들여 새로운 비전을 현실화시킬 것인지 금융권의 이목이 함영주호(號)에 쏠리고 있다.
충청도 부여 소년의 인간 승리 드라마

하나금융그룹 제공
‘은행원을 꿈꿨던 충청도 시골 소년이 금융지주의 수장(首長)에 올랐다.’

한마디로 요약해도 드라마틱한 그의 사연은 금융권 내에서도 입지전적인 인간 승리 스토리로 회자(膾炙)된다.

그가 태어난 충남 부여군 은산면은 고등학교 2학년 때에야 비로소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시골이었다. 함영주는 넉넉지 않은 농부 집안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라면 자신 있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논산 강경읍 소재 강경상고에 진학했다. 당시 가난한 수재들이 모이던 학교로 1920년 개교 후 금융계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들을 배출한 명문 상고였다.

그의 어머니는 자취와 하숙 생활을 번갈아했던 아들을 위해 고향 마을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의 강경까지 반찬과 쌀 등을 갖다 주며 뒷바라지를 했다. 과거 한 강연에 서 함 회장은 “어머니가 버스를 세 번 갈아타면서까지 쌀 일곱 말을 직접 들고 하숙집을 찾아오셨다”며 “손수 농사지은 쌀을 아들에게 먹이고 싶어 굳이 하숙비를 쌀로 가져오셨던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당시에는 농사짓는 어머니의 모습을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부끄럽기도 했었다”며 “좋은 밥을 배불리 먹이고 싶은 어머니 마음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학업보다는 취업이 다급했던 당시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1980년 서울은행의 한 지점 텔러로 은행원 생활을 시작했다. 행원으로 일하면서 야간 대학에 진학해 단국대 회계학과를 졸업했다. 난다 긴다 하는 엘리트들이 숱한 금융권에서 지점 생활이 녹록지만은 않았다. 대졸 출신 행원들이 잘나간다는 본점 부서와 해외 영업점을 돌 때 그는 일선 영업점을 지켜야 했다. 이런 기간이 오히려 겸손과 배려 등 영업 기본기의 바탕이 됐다.

“시골에서 태어나 남 앞에 나서기를 수줍어했고 웃을 때도 입을 가리고 웃어서 ‘미스 함’이라는 별명이 붙었었죠. 그런데 그 시절이 어쩌면 나를 낮출 수 있는 계기였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챙기게 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영업력이 나의 무기” 현장 지키며 영업의 달인(達人)으로
그는 정통 하나은행 출신도 아닌 피인수 은행인 서울은행 출신이다. 2002년 하나은행의 서울은행 인수 당시 그는 서울은행 수지지점장이었다.

‘상고 출신’, ‘서울은행 출신’.

내세울 특별한 간판은 없었지만 함 회장에게 영업력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하나은행 내에서 영업 분야 달인 중 한 명으로 통할 만큼 가는 곳마다 뛰어난 실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분당중앙지점장, 가계영업추진부장, 남부지역본부장 등을 거쳤고 2013년에는 함 회장이 이끌었던 충청영업그룹이 영업실적 전국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충청영업그룹을 맡은 뒤 선보인 ‘지역사랑통장’, ‘1인1통장 및 1사1통장 갖기 운동’ 등은 지역밀착형 영업 사례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은행들이 가장 공을 들이는 금고 쟁탈전에도 뛰어들어 대전시금고와 세종시2금고도 따냈다.

‘시골 촌놈’이라는 별명에서 풍기듯 시골 사람 같은 편안한 이미지와 인간적인 모습이 함 회장의 트레이드마크다. 그 역시도 주변에 “직원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치열한 은행권에서 놀라운 영업 실적 뒤에 소탈하고 편안한 모습만 있었을 리 없다. 눈물나는 노력은 기본이었다. 매주 조깅과 산행 등을 하면서 조직을 다졌고 충청영업그룹 부행장 시절 직원들과 야간 등산을 마치고 직접 세숫대야 수십 개를 마련해 세족식 행사를 가진 것은 아직도 회자된다. 영업점 방문을 위해 충청지역 직원 1000여 명의 이름과 생일, 신상을 기억하고 병가 중인 직원을 병문안한 따뜻한 상사였다.
역사적인 초대 통합은행장 맡아 ‘원 뱅크’ 지휘
‘영업의 달인’ 함 회장은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통합으로 탄생한 KEB하나은행 초대 행장에 2015년 9월 취임했다. ‘통합 은행 만들기’라는 만만찮은 숙제를 받아들었지만 그는 3년 7개월 재임 기간 동안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리더십을 입증했다.

사실 은행 인수합병(M&A) 역사에서 노조 통합은 난제 중 난제였다. 과거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한일은행과 상업은행의 노조 통합 모두 진통 끝에야 가능했다. 신한은행과 조흥은행 노조 통합 역시 3년 가까이 걸렸다. 피인수 은행 노조원들이 인사상 불이익을 받지 않고 통합 은행의 비전에 확신을 가져야 가능한 것이 노조 통합이기 때문이었다.

함 회장은 화학적 결합의 상징인 양 노조 통합을 취임 1년여 만인 2016년 9월에 해냈다. 그 역시 피인수된 서울은행 출신으로 외환은행 직원들의 심정을 이해했던 것일까. 취임하자마자 두 은행 간 ‘교차 발령’으로 직원들이 한 조직의 구성원으로 거듭나게 했다. 또한 각 지역본부장에게 인사·예산권을 줬다. 지역 영업 현장을 중심으로 두 은행 직원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자연스럽게 섞여들게 한 전략이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솔직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노조 통합을 이뤄냈다”며 “외환은행 직원들을 잘 독려하고 사기를 높여준 덕분”이라고 했다.

‘현장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전국 영업 현장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가 직원들을 칭찬했다. ‘성과 중심’을 강조하며 인사 실험도 단행했다. 성과가 뛰어났던 퇴직 지점장을 다시 채용하는가 하면 영업성과가 뛰어난 직원 1000명을 한꺼번에 승진시키기도 했다. 2015년 1조 원 안팎이던 은행 순이익을 2018년 2조1000억 원으로 3년 만에 두 배 이상 달성하면서 2조 클럽에 입성했다.
조직 위해서라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아

하나금융그룹 제공
통합은행장으로 승승장구한 그가 양지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은행권 채용 이슈 등 각종 악재가 터질 때마다 하나금융을 대표해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고개를 숙이는 등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행장 3연임을 눈앞에 두고 있던 2019년 2월에는 금융당국과의 갈등 해결을 위해 한발 물러서기도 했다. 채용 이슈 재판과 관련한 CEO(최고경영자) 리스크를 지적하며 금융당국이 우려를 표시하자 행장 3연임을 포기하는 결단도 내렸다. 당시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함 회장은 “조직을 위해서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때”라면서 “직원들이 서운해하고 안타까워해서 고맙고 미안하다”며 물러섰다. 당국에 서운한 감정이 없느냐는 질문에도 “그런 것은 없다”며 말을 아꼈다.

속이 쓰릴 법한 날에도 담담하게 자신을 낮추던 함 회장은 묵묵히 부회장직을 수행하며 ESG 등 하나금융의 주요 과제를 챙겼다. 그리고 결국 하나금융은 차기 리더로 함영주 회장을 선택했다.
새로운 하나금융의 미래 그린다
행원으로 시작해 책임자, 관리자, 임원을 거쳐 행장, 그리고 마침내 회장까지 오른 함영주 회장. 이제 그는 하나금융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 함 회장은 “임직원이 함께 이뤄낸 과거의 성과와 현재의 노력이 모여야만 하나금융의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며 “모두의 기쁨을 위해 앞장서 길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아시아 최고 금융그룹으로 도약하기 위한 3대 전략으로 △강점 극대화 & 비은행 사업 재편 △글로벌 리딩 금융그룹 위상 강화 △디지털 금융 혁신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은행과 증권 중심의 성장 엔진을 완성하고 카드·캐피탈·보험을 주력 계열사로 키울 계획이다. 또 비은행 부문 인수합병(M&A)과 관계사 간 기업금융 협업을 강화해 비은행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한다.

또 글로벌 리딩 그룹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현지화에 앞장서고 비은행 부문의 해외 진출을 확대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M&A와 지분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 미주, 유로존 등 선진 시장에서도 국내 기업과 연계한 기업금융을 강화한다는 포석이다.

디지털 금융혁신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그룹 내부와 외부 역량을 연결한 ‘개방형 디지털’ 혁신으로 금융플랫폼 회사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디지털 인재를 육성하고 혁신 스타트업에 투자해 외부 자원도 활용하기로 했다.

함 회장은 “직원의 성장이 곧 하나금융의 성장”이라고 강조했다.

“생각과 행동이 젊은 조직, 다 같이 도전하고 참여하는 역동적인 하나금융그룹만의 문화를 만들겠습니다.”

그가 이끄는 하나금융그룹이 또 한 번 새로운 시험대에 섰다.


함영주 회장 약력
1956년 충남 부여 출생

1980년 서울은행 입행

2008년 하나은행 충남지역본부장

2009년 대전영업본부장

2013년 충청영업그룹 부행장

2015년 하나은행장

2016년 하나금융그룹 부회장

2019년 하나금융나눔재단 이사장

2022년 하나금융그룹 회장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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