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아닌 플라스틱선 따라 데이터 전송… 5G망 ‘거리’ 늘리는 기술도[허진석의 ‘톡톡 스타트업’]

허진석 기자

입력 2023-09-16 01:40 수정 2023-09-16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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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형 반도체로 유선 통신 혁신하는 ‘포인투테크놀로지’
데이터가 점점 늘어가는 세상… 유선통신 속도의 중요성 포착
세계 최초 ‘플라스틱 통신’ 개발…내년부터 미국서 매출 증가 기대


포인투테크놀로지 박진호 대표이사가 11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플라스틱 재질의 회선을 따라 대용량 데이터를 고속으로 송수신할 수 있는 주문형 반도체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인공지능(AI)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데이터센터 구축이 정보기술(IT) 기업의 주요한 경쟁력이 되고 있다. 더 빠르게 많은 데이터를 적은 전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관건이다. 처리 속도를 높이기 위해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넘어선 신경망처리장치(NPU) 개발 경쟁이 뜨겁고, 많은 데이터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고대역폭 메모리(HBM)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이런 칩들이 들어간 컴퓨터 서버를 연결하는 제대로 된 통신선도 필요하다.

미국의 거대 빅테크들이 운영하는 데이터센터는 초당 400Gb(기가비트)를 처리할 수 있는 통신선이 필요하다. 구리선으로는 이런 초고속 데이터를 2m 이상 보내기 힘들다. 그런데 수십만 개의 컴퓨터 서버가 설치되는 데이터센터에서 서버들 간 거리는 3∼5m가 주를 이룬다. 어쩔 수 없이 광통신을 쓰는데, 전력 사용량이 많고 가격이 비싼 것이 흠이다.

데이터센터에서 대용량의 데이터를 고속으로 멀리 보내기 위해 개발된 컴퓨터 간 통신용 케이블 ‘E-튜브’. 포인투테크놀로지의 반도체 설계 기술로 만든 주문형 반도체가 케이블의 양 끝에 들어 있다. 포인투테크놀로지 제공
포인투테크놀로지(대표이사 박진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플라스틱 재질의 선을 통해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송수신할 수 있는 주문형 반도체(ASIC) 설계 기술을 상용화한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이다. 플라스틱선의 양쪽 끝에 부착해 초고속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용 반도체를 TSMC를 통해 생산하고 있다. 이 주문형 반도체를 세계적인 통신케이블 회사 몰렉스에 제공하면, 몰렉스가 아마존과 같이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회사에 케이블을 납품하는 방식으로 수출을 막 시작했다. 박 대표는 “인텔을 비롯한 미국의 여러 빅테크 기업들도 관련 연구를 하고 있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광통신 방식에 비해 비용이 절반 수준이어서 내년부터 본격적인 매출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구리나 광섬유가 아닌 플라스틱선을 이용한 통신 시장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플라스틱선 통해 신호 전송”
포인투테크놀로지는 작년 5월에 플라스틱 선을 이용해 400Gbps(초당 Gb) 초고속 통신이 가능한 ‘E-튜브’를 개발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통신선은 대부분이 구리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도체인 구리로 전류를 흘려보내 통신을 하는 방식으로는 초고속 통신을 구현하기 어렵다. 많은 데이터를 보내기 위해 고주파수를 사용하면 전류가 구리 표피로만 흐르는 ‘표피 효과’가 생기면서 신호를 제대로 주고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체 내에 전류가 흐르면 그 주변에 자기장이 생기고 이 자기장으로 인해 역전류가 생기면서 전류의 흐름을 방해한다.

E-튜브는 부도체인 플라스틱 선을 따라 전파를 보내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무선통신에 쓰이는 안테나가 플라스틱 선의 양 끝에 부착되고 안테나로부터 받은 전파를 주문형 반도체가 처리하는 방식이다.

플라스틱선 내부로만 전파를 집중해서 보냄으로써 공중으로 방사되는 일반적인 무선통신 방식에 비해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전파는 공기보다 상대적으로 밀도가 높은 플라스틱선 내부에 갇혀서 전송이 되는데 이를 ‘도파관 원리’라고 부른다. 박 대표는 “플라스틱 선 안에서 특정 방향으로만 전파되는 초지향성 무선통신을 구현한 셈”이라며 “이 새로운 통신 방식은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에 두 번이나 실렸다”고 했다.

기존의 광통신은 전기 신호를 빛으로 변환하고 빛을 전기 신호로 바꾸느라 비싸고 전력 소비도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이 문제를 해결한 새로운 방식을 상용화한 것이다.

● KAIST 연구팀과 공동 창업

박 대표는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워싱턴주립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통신용 반도체 설계 회사인 마벨에서도 일했다. 데이터센터가 본격화되기 전이었지만 통신 업계에서는 초고속 데이터 전송의 새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이들이 있었다. 대학 동기인 KAIST 배현민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등과 2016년 포인투테크놀로지를 창업한 배경이다. 이 기술은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KAIST 송하일 박사가 그즈음에 쓴 논문에서 시작됐다. 송 박사는 현재 E-튜브 개발팀장을 맡고 있다.

연구실 기술을 상용화하는 데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박 대표는 “독보적인 기술을 상용화하는 과정에 또 다른 많은 노력과 기술이 필요했다”며 “통신선의 양 끝에 부착하는 신호 처리 반도체 기술, 신호를 송출하고 수신하는 안테나 기술, 관련 부품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기술, 저비용 고효율의 플라스틱선을 만드는 기술 등으로 지금까지 200여 개의 특허를 출원했고 현재 39개의 특허가 등록된 상태”라고 했다. 긴 시간 동안 회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 잠재력을 믿고 투자를 해 준 투자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리즈B 단계인 이 회사는 지금까지 누적으로 424억 원가량을 투자받았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케이블 제조 회사인 몰렉스도 포함돼 있다.

● 광통신 전송 거리 늘리는 기술도 확보
포인투테크놀로지는 E-튜브로 급속도로 늘고 있는 데이터센터 시장을 노리고 있다. 박 대표는 “데이터센터 한 곳이 들어설 때 최소 수십만 개의 통신선이 필요한데, 1개 회선에 필요한 주문형 반도체로 100달러가량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E-튜브는 가격이 광통신의 절반가량인 것은 물론이고 전력 사용량도 광통신에 비해 절반 수준이다. 400Gbps의 경우 광통신에는 20W가 필요하지만 E-튜브에는 9W만 쓰인다. 환경 이슈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E-튜브의 수요가 늘 것이라고 포인투테크놀로지는 기대하고 있다. 내년부터 본격화될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엔비디아 등에서 일한 30년 이상의 세일즈 전문가 등을 영입해 두고 있다.

E-튜브는 전력 소모가 적고 가볍다는 특징이 있다. 무게를 줄일 필요가 있는 전기차용 통신케이블과 초고해상도 벽걸이 TV용 통신선으로도 시장을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

5G 네트워크에 쓰이는 광통신망의 전송 거리를 늘려주는 25Gbps 광분산 보상 칩. 이 칩을 활용한 보조장치만 부착하면 통신사들은 광통신망을 새로 까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 포인투테크놀로지 제공
E-튜브가 만능은 아니다. 초고속으로 데이터를 보낼 수 있는 한계가 15m이다. 그 이상의 거리에서는 여전히 광통신이 유효하다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광통신 시장을 겨냥해서는 5세대(5G) 통신을 제공하는 통신회사의 고민을 덜어줄 기술을 개발했다. 5G 통신은 속도가 10Gbps에서 25Gbps로 진화 중인데, 이렇게 속도가 빨라지면 광통신을 활용하더라도 15km 이상으로 데이터를 보내기 힘들어진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광신호가 흐릿해지는 광분산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포인투테크놀로지는 광분산을 보상해 원래 신호만큼 또렷하게 만들어 주는 반도체칩을 올해 2월 개발해 전송 거리를 40km대로 늘렸다. 기존 광통신 네트워크를 파헤칠 필요 없이 중계를 담당하는 기기에 반도체칩을 장착만 하면 된다. 두 기술은 2025년경이면 20조 원으로 추산되는 데이터센터 인터커넥트 시장을 겨냥한 것이다.

박 대표는 “포인투테크놀로지의 ‘포인투’는 두 점이라는 뜻으로, 두 지점을 연결하는 유선통신을 상징한다”며 “데이터가 늘어가면서 더 중요해질 유선통신에 집중해 기술과 시장을 혁신하는 회사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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