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마지막 유리천장 깨졌다

동아일보

입력 2013-12-24 03:00 수정 2013-12-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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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행장에 권선주 부행장 내정… 첫 여성행장 탄생

“제도를 정말 훤히 꿰뚫고 계시네요. 장관 하셔도 되겠습니다.”

11월 동아일보 주최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리스타트 잡페어’ 현장. 정홍원 국무총리는 IBK기업은행 부스에서 한 여성 간부의 설명을 듣고 이 같은 칭찬을 건넸다. 그는 기업은행이 은행권 최초로 시간선택제 채용을 도입하는 데 깊이 간여했다. 무슨 일을 맡아도 내용을 완벽히 꿰뚫는 그의 ‘주특기’가 발휘된 순간이었다.

총리에게서 ‘장관감’이라는 말을 들은 이 여성은 한 달 뒤 국내 최초로 여성 은행장 자리에 올랐다. 은행권의 마지막 남은 ‘유리천장’을 깬 여성은 권선주 기업은행 부행장(57·리스크관리본부장). 권 내정자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여성은 물론이고 모든 은행원에게 ‘평범한 사람도 은행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금융위원회는 23일 신임 IBK기업은행장으로 권 부행장을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했다고 밝혔다. “첫 여성 행장이라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그것이 시대정신이라면, 사회가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적극 이뤄내겠다”는 게 그의 각오다.

국책은행인 기업은행 행장은 금융위 제청과 대통령 임명을 거쳐 최종 확정된다. 국책은행과 시중은행을 통틀어 여성이 은행장에 오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권 내정자는 기업은행에서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전북 전주 출신으로 경기여고,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78년 기업은행에 여성 공채 1기로 입행했다. 프라이빗뱅킹(PB) 부사업단장, 카드사업본부장, 금융소비자보호센터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첫 여성 1급’ ‘첫 여성 지역본부장’을 마친 뒤 2011년 기업은행 역사상 첫 여성 부행장이 됐다.

금융권에서는 여성 은행장이 나온다면 권 내정자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그는 이성남 전 민주통합당 의원(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오순명 금융감독원 금융소비자보호처장 등과 함께 금융계의 ‘맏언니’로 통한다.

그는 대학 시절 영어교사와 신문기자를 꿈꿨지만 은행 지점장을 지낸 아버지의 뒤를 밟아 은행원이 됐다. 언니와 여동생도 은행에서 일한 은행원 집안이다. 권 내정자가 입행하던 때는 여성은 결혼하면 곧바로 사표를 내던 시절. 하지만 그는 결혼과 출산 뒤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대기업에 다닌 남편이 5년간 혼자 해외 파견생활을 할 정도로 나를 이해해 줬다”며 “남편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낮에는 창구에서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퇴근 후에는 금융연수원 교재로 집에서 ‘통신연수’ 공부에 전념했다. 휴일에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어 산후조리를 하면서 집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 비로소 ‘이게 낮잠이라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남자들보다 지점에서 오래 근무하고 승진도 늦었지만 “그때를 오히려 배우는 기회로 삼았다”고 회고했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일한 그는 기업은행에서 여성 최초로 기업여신 업무를 맡기도 했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상대하며 때로는 접대까지 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여자는 안 된다’고 했던 일이었다.

권 내정자는 “서비스업을 하는 은행은 고객을 기쁘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며 “(기업은행장으로서) 중소기업을 기쁘게 하는 은행을 만들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훈 january@donga.com·신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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