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다시 뛰는 인비
동아일보
입력 2013-10-01 03:00 수정 2013-10-08 11:52
《 전설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1루, 2루, 3루 베이스를 밟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겠지요. 성공과 실패, 환호와 탄식이 교차하는 스포츠 세계. 오늘부터 게재하는 ‘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을 통해
고독한 승부사들의 희로애락을 담겠습니다. 첫 회의 주인공은 골프선수 박인비입니다. 》
지난 추석 연휴에 만난 기자의 여동생은 스포츠 문외한이다. 골프라면 버디와 보기의 차이나 겨우 구분할까. 그런 동생이 오빠에게 “박인비는 요즘 지쳤나 보다”라고 말을 건넸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인비(25)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새삼 확인한 순간이었다. 일반 국민이 특정 골프선수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것은 아마 1990년대 후반 박세리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박인비는 올 시즌 3회 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여세를 몰아 단일 시즌 메이저 4회 우승(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노렸지만 아쉽게 대기록 달성에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8월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는 공동 42위에 그쳤고 9월 에비앙챔피언십에서는 공동 67위로 부진했다.
흔히 스포츠 세계에서 패장은 말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박인비는 패배라는 단어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지난달 LPGA투어 일정이 없는 동안 일시 귀국한 그를 인터뷰했을 때였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고 씩씩하기까지 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오히려 후련해요. 원래 지난일은 참 빨리 잊는 편이거든요.”
올해 초 세운 박인비의 이번 시즌 목표는 LPGA투어 ‘올해의 선수상’ 수상이었다. “그랜드슬램은 원래 계획에 없다 중간에 툭 튀어나온 거였어요. 메이저 대회를 다 마친 만큼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겁니다.”
‘구성(球聖)’으로 불리는 보비 존스는 1930년 골프 역사를 통해 유일한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당시 4대 메이저 대회 중 2개는 아마추어 대회였다. 박인비는 존스 이후 83년 만이자 남녀 프로골프를 통틀어 사상 첫 메이저 4승을 향한 도전만으로도 전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마침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연수하고 있던 기자는 박인비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깨알 같은 현지 언론 보도를 접할 때마다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미국의 중소도시 지역신문에서도 박인비 사진을 쉽게,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박인비 덕분에 새삼 재조명된 존스는 ‘경쟁적인 골프는 주로 두 귀 사이에 있는 5.5인치 공간에서 이뤄진다’는 명언을 남겼다. 골프는 멘털 스포츠라는 말대로 두뇌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탁구 스타 출신인 현정화 한국마사회 감독의 골프 실력은 보기 플레이 수준. 현 감독은 “변화무쌍하게 날아다니는 탁구공도 쉽게 요리했는데 골프에 입문해서는 가만 서 있는 공을 치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박인비 역시 마음이 문제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랜드슬램과 엮이게 되면서 난생 처음 겪어보는 부담감이 심했어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었잖아요. ‘평소처럼 해야지’라고 다짐해도 몸은 다르게 반응하더라고요.”
박인비는 대회 2연패까지 걸려 있던 에비앙챔피언십에서 평소 72%가 넘던 그린적중률이 65%에 머물렀고 라운드당 평균 퍼트 수도 32개까지 치솟았다.
메이저 대회에서 통산 14승을 거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2008년 US오픈 우승 이후 5년 넘게 메이저 무관에 허덕이고 있다. 현미경 같다고 비유한 자신을 향한 주위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데다 잭 니클라우스가 갖고 있는 메이저 최다승 기록(18승) 경신과 맞물린 우승 강박증이 경기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박인비는 슬럼프 장기화에 대한 주위의 걱정에 대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선수가 늘 잘할 수만 있나요. 두 달 정도 핫하다가도 한두 달은 슬로하기도 하고. 스윙이나 퍼팅에 큰 문제가 없어요. 육안으로 드러날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박인비가 우승을 놓친 2개 메이저 대회에서 스테이시 루이스(미국)와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이 트로피를 안으며 올해의 선수 경쟁도 재점화됐다. 당초 올 시즌 6승을 거둔 박인비의 독주 양상이었지만 이젠 상황이 변했다. 박인비가 올해의 선수 포인트에서 281점으로 1위를 지킨 가운데 페테르센(204점), 루이스(183점)가 추격에 나선 형국이다.
이런 분위기가 그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된다. “솔직히 편하게 갈 수도 있었는데…. 후회는 없어요. 다시 집중하면 그만이죠.”
평소 훈련량이 적기로 유명한 박인비는 추석 연휴에도 매일 연습장을 찾으며 컨디션 회복에 공을 들였다. 감기에 시달리면서도 지난달 29일 끝난 국내 투어 대회 대우증권 클래식을 공동 10위로 마쳤다. 박인비는 3일 중국 베이징에서 개막하는 레인우드클래식을 통해 LPGA투어에 복귀하려고 30일 출국했다. 이 대회에 이어 말레이시아, 한국, 대만에서 열리는 ‘아시안 스윙’은 박인비가 ‘골프 여왕’의 입지를 다시 굳힐 절호의 기회다. 올 시즌 남은 LPGA투어 6개 대회 중 5개 대회에 출전할 계획인 그는 “앞으로 한 번 더 우승한다면 200%, 300% 만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언젠가 브리티시여자오픈 또는 에비앙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오르면 그 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 아직 그의 나이 20대 중반 아닌가. 박인비는 만 19세였던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 후 4년 넘게 오랜 슬럼프를 겪었다. 허드렛일을 해도 골프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비참한 생각에 운동을 포기할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이겨냈다.
“한번 호되게 매를 맞았으니 앞으론 비슷한 상황에 부닥쳐도 다르게 대처할 겁니다. 실패에 따른 상실감이나 실망감도 덜 두려워하겠죠. 행복한 골퍼가 되고 싶어요. 올 시즌은 앞으로 다시 안 올지도 모를 특별한 한 해잖아요. 2013년을 뛰어넘기 위해 더 노력해야죠.”
심각하게 가라앉던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유명세를 물었을 때였다. “어디 나가면 많이들 알아보세요. 사인도 해달라고 하시고 사진도 찍고. 불편할 때도 있지만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평소 외출할 때 운동복에 슬리퍼 끌고 나가거든요. 치장은 거의 안하죠. 엄마가 막 뭐라 그러세요. BB크림이라도 바르고 나가라고. 호호∼.”
골프 코스에서 ‘침묵의 암살자’로 불리는 박인비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기만 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지난 추석 연휴에 만난 기자의 여동생은 스포츠 문외한이다. 골프라면 버디와 보기의 차이나 겨우 구분할까. 그런 동생이 오빠에게 “박인비는 요즘 지쳤나 보다”라고 말을 건넸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인비(25)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새삼 확인한 순간이었다. 일반 국민이 특정 골프선수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것은 아마 1990년대 후반 박세리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박인비는 올 시즌 3회 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의 위업을 이뤘다. 여세를 몰아 단일 시즌 메이저 4회 우승(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노렸지만 아쉽게 대기록 달성에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8월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는 공동 42위에 그쳤고 9월 에비앙챔피언십에서는 공동 67위로 부진했다.
흔히 스포츠 세계에서 패장은 말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박인비는 패배라는 단어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지난달 LPGA투어 일정이 없는 동안 일시 귀국한 그를 인터뷰했을 때였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밝고 씩씩하기까지 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오히려 후련해요. 원래 지난일은 참 빨리 잊는 편이거든요.”
올해 초 세운 박인비의 이번 시즌 목표는 LPGA투어 ‘올해의 선수상’ 수상이었다. “그랜드슬램은 원래 계획에 없다 중간에 툭 튀어나온 거였어요. 메이저 대회를 다 마친 만큼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겁니다.”
‘구성(球聖)’으로 불리는 보비 존스는 1930년 골프 역사를 통해 유일한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당시 4대 메이저 대회 중 2개는 아마추어 대회였다. 박인비는 존스 이후 83년 만이자 남녀 프로골프를 통틀어 사상 첫 메이저 4승을 향한 도전만으로도 전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마침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연수하고 있던 기자는 박인비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깨알 같은 현지 언론 보도를 접할 때마다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다. 미국의 중소도시 지역신문에서도 박인비 사진을 쉽게,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박인비 덕분에 새삼 재조명된 존스는 ‘경쟁적인 골프는 주로 두 귀 사이에 있는 5.5인치 공간에서 이뤄진다’는 명언을 남겼다. 골프는 멘털 스포츠라는 말대로 두뇌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탁구 스타 출신인 현정화 한국마사회 감독의 골프 실력은 보기 플레이 수준. 현 감독은 “변화무쌍하게 날아다니는 탁구공도 쉽게 요리했는데 골프에 입문해서는 가만 서 있는 공을 치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박인비 역시 마음이 문제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랜드슬램과 엮이게 되면서 난생 처음 겪어보는 부담감이 심했어요.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었잖아요. ‘평소처럼 해야지’라고 다짐해도 몸은 다르게 반응하더라고요.”
박인비는 대회 2연패까지 걸려 있던 에비앙챔피언십에서 평소 72%가 넘던 그린적중률이 65%에 머물렀고 라운드당 평균 퍼트 수도 32개까지 치솟았다.
메이저 대회에서 통산 14승을 거둔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2008년 US오픈 우승 이후 5년 넘게 메이저 무관에 허덕이고 있다. 현미경 같다고 비유한 자신을 향한 주위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데다 잭 니클라우스가 갖고 있는 메이저 최다승 기록(18승) 경신과 맞물린 우승 강박증이 경기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박인비는 슬럼프 장기화에 대한 주위의 걱정에 대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선수가 늘 잘할 수만 있나요. 두 달 정도 핫하다가도 한두 달은 슬로하기도 하고. 스윙이나 퍼팅에 큰 문제가 없어요. 육안으로 드러날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박인비가 우승을 놓친 2개 메이저 대회에서 스테이시 루이스(미국)와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이 트로피를 안으며 올해의 선수 경쟁도 재점화됐다. 당초 올 시즌 6승을 거둔 박인비의 독주 양상이었지만 이젠 상황이 변했다. 박인비가 올해의 선수 포인트에서 281점으로 1위를 지킨 가운데 페테르센(204점), 루이스(183점)가 추격에 나선 형국이다.
이런 분위기가 그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된다. “솔직히 편하게 갈 수도 있었는데…. 후회는 없어요. 다시 집중하면 그만이죠.”
평소 훈련량이 적기로 유명한 박인비는 추석 연휴에도 매일 연습장을 찾으며 컨디션 회복에 공을 들였다. 감기에 시달리면서도 지난달 29일 끝난 국내 투어 대회 대우증권 클래식을 공동 10위로 마쳤다. 박인비는 3일 중국 베이징에서 개막하는 레인우드클래식을 통해 LPGA투어에 복귀하려고 30일 출국했다. 이 대회에 이어 말레이시아, 한국, 대만에서 열리는 ‘아시안 스윙’은 박인비가 ‘골프 여왕’의 입지를 다시 굳힐 절호의 기회다. 올 시즌 남은 LPGA투어 6개 대회 중 5개 대회에 출전할 계획인 그는 “앞으로 한 번 더 우승한다면 200%, 300% 만족할 것 같다”고 말했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언젠가 브리티시여자오픈 또는 에비앙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오르면 그 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 아직 그의 나이 20대 중반 아닌가. 박인비는 만 19세였던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 후 4년 넘게 오랜 슬럼프를 겪었다. 허드렛일을 해도 골프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비참한 생각에 운동을 포기할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이겨냈다.
“한번 호되게 매를 맞았으니 앞으론 비슷한 상황에 부닥쳐도 다르게 대처할 겁니다. 실패에 따른 상실감이나 실망감도 덜 두려워하겠죠. 행복한 골퍼가 되고 싶어요. 올 시즌은 앞으로 다시 안 올지도 모를 특별한 한 해잖아요. 2013년을 뛰어넘기 위해 더 노력해야죠.”
심각하게 가라앉던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유명세를 물었을 때였다. “어디 나가면 많이들 알아보세요. 사인도 해달라고 하시고 사진도 찍고. 불편할 때도 있지만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평소 외출할 때 운동복에 슬리퍼 끌고 나가거든요. 치장은 거의 안하죠. 엄마가 막 뭐라 그러세요. BB크림이라도 바르고 나가라고. 호호∼.”
골프 코스에서 ‘침묵의 암살자’로 불리는 박인비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기만 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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