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만 원으로 ‘한 달 살기’ 가능…이집트 다합에 푹 빠진 사람들
다합=박민우 특파원
입력 2018-05-30 20:47 수정 2018-06-03 21:55
다합 풍경
“아들이 군 제대하고 장기 여행을 떠났거든요. 두 달 전에 이집트 다합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도무지 한국에 들어올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아들 생사를 확인하러 왔다가 저도 다합의 매력에 푹 빠져서 귀국 일정을 연기해버렸지 뭐예요, 하하!”이집트 시나이반도 남동쪽의 작은 어촌마을 다합에서 만난 권승율 씨(55)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내의 부탁을 받고 여행 중인 아들을 데리러 이곳에 왔다는 그는 요즘 아들과 함께 프리다이빙(스킨다이빙)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프리다이빙은 공기통 없이 맨몸으로 잠수하는 스포츠다. 노란색 티셔츠에 투명한 테두리의 선글라스로 멋을 낸, 50대 중반의 권 씨는 다합에 모여든 전 세계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집트 하면 대부분 고대 피라미드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세계를 누비는 젊은 배낭여행자들에게 다합은 피라미드보다 더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힌다. 다합은 수도 카이로에서 차로 약 8시간 떨어져 있다. 비행기를 이용해 샤름 엘 셰이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더라도 차로 한 시간가량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22일 찾아간 다합은 이집트의 여느 도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모세가 야훼에게서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나이산의 황량한 능선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고, 그 앞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모세가 바다를 가르고 출애굽(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해방돼 나온 일)을 했다는 홍해다.
다합 풍경
돌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 눈을 사로잡았지만 거리의 자유로움이 더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이슬람 성월(聖月)인 라마단(5월17일~6월14일)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무슬림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이집트는 전체 인구의 90%가 무슬림이기 때문에 라마단의 낮 시간에는 거리가 텅 빌 정도로 한산하다. 하지만 전 세계 여행자들로 붐비는 다합의 거리는 달랐다. 히잡을 쓴 여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비키니를 입고 일광욕을 즐기거나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합에 살면서 7년째 스쿠버다이빙 강사로 일하고 있는 김미영 씨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는 장기여행자들이 주로 이곳을 찾는다. 다합은 배낭여행자들의 허브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다합을 다녀간 여행자들은 이곳을 태국 방콕의 ‘카오산로드’와 파키스탄의 ‘훈자마을’과 함께 ‘세계 3대 블랙홀’로 꼽는다.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에서 온 말리카 자델 씨는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다합의 분위기가 좋아서 1년 반을 여기서 보냈다. 여기서는 태양과 바람, 산과 바다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다합은 홍해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홍해는 깊은 수심과 다채로운 지형을 갖고 있고 산호가 잘 보존돼 있어 스킨스쿠버를 즐기기에 좋다. 특히 다합에서는 해변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바로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게 매력이다. 김 씨는 “보트가 필요 없기 때문에 해변에서 쉬다가 언제든 원할 때 다이빙을 할 수 있다”며 “자유로움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에게는 최고의 장소”라고 귀띔했다.
직접 공기통을 메고 바다로 들어가 봤다. 푸른 바닷속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해안 절벽을 따라 영롱한 빛깔의 산호가 만개했고, 알록달록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고기들이 그 주위에서 헤엄쳤다. 홍해를 탐험하는 동안은 시간의 흐름도 멈춘 것 같았다. 러시아에서 왔다는 안나 미첸코 씨는 “그 깊이와 아름다움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다합 블루홀
다합의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블루홀’은 다이버들의 성지로 불린다. 블루홀은 바다에 생긴 동공(洞空·싱크홀)으로 지형이 급격하게 깊어지는 탓에 주변보다 짙은 푸른색을 띤다. 다합 블루홀의 깊이는 130m에 이른다. 능숙한 프리다이버들은 수심 70m까지 잠수해 ‘아치’라고 불리는 터널을 보고 올라오기도 한다. 러시아 출신 프리다이버 안드레이 세칼로프 씨는 “블루홀 속으로 몸을 맡길 때마다 무의식과도 같이 크고 깊은 바다에 경외심을 느낀다. 바다를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다합의 블루홀은 프리다이버에게 더 깊이 내려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그래서 다이버들의 천국인 동시에 무덤이기도 하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최근 10년간 150명이 넘는 다이버들이 다합의 블루홀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숨진 다이버들을 기리기 위해 근처 해변가에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다. 한 비석에 새겨진 ‘영원히 다이빙을 즐겨라(Enjoy your dive forever)’라는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합을 찾는 여행자의 십중팔구는 다이빙 삼매경에 빠진다. 다합에선 전 세계 어느 곳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다이빙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스쿠버다이빙의 경우 미국 달러로 400달러(약 43만 원)와 일주일 정도를 투자하면 초보자들의 입문과정인 ‘오픈워터’에 이어 강사 없이 독립적으로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어드밴스드’ 자격을 딸 수 있다. 다합에서 세 달째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고 있다는 박태진 씨는 “동남아보다 싸다고 해서 여기에 눌러 앉았다”며 “마스터 자격증까지 따고 돌아갈 생각”이라고 했다.
다합의 값싼 물가는 장기 여행자들에겐 커다란 매력이다. 대만에서 회사를 퇴직하고 세계 여행 중이라는 리앙 씨는 “(하루) 12~20달러 정도면 괜찮은 호텔을 구할 수 있고 단 돈 몇 달러로 먹고 마시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다합에서 값 싼 숙소를 찾는다면 50이집트파운드(약 3000원)에 하룻밤 묵을 수도 있다. 장기여행객들은 월세로 3000이집트파운드(약 18만 원) 정도면 전기세와 물세, 와이파이 사용료 등이 포함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추가 생활비를 고려할 때 우리 돈 40만 원 정도면 ‘한 달 살기’가 가능한 셈이다.
다합에 머무는 장기 여행자 중에는 한국인들도 많다. 인구 1만5000명 규모의 작은 마을이지만 100여 명의 한국 여행객들이 늘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다합에 도착했다는 이희천, 손정혜 씨는 29세 동갑내기 커플로 1년 동안 세계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이들은 “오랜 여행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러 왔다”며 “다합에는 한국인들이 많아 편하게 쉴 수 있다고 들었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다합을 찾는 한국 여행자들의 안전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2014년 2월 다합에서 약 140km 떨어진 시나이반도 타바에서 한국 관광객이 탄 버스가 폭탄테러를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부는 다합을 포함한 시나이반도 대부분을 특별여행경보지역으로 지정해 ‘즉시대피’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다만 여행금지국가 및 지역으로는 지정되지 않아 여행자들의 방문을 막거나 처벌할 법적 근거는 없다. 주이집트 한국대사관 김현수 영사는 “시나이반도의 치안이 불안정한 데다 다합은 외국인 밀집 지역이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테러 타깃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합=박민우 특파원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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