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국내 최장수 자동차 브랜드 ‘코란도’의 7전8기

동아일보

입력 2014-06-14 03:00 수정 2014-06-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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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7번 바뀌어도… ‘Korean can do’ 정신으로 질주

“손님들 얘기가 이 차는 성능이 좋으니까 어디든 다 갈 수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길이 있건 없건, 계곡이든 개천이든 막 가자는 거예요.”

1981년 강원 인제군 기린면에 쑥색 지프 택시가 등장했다. 해발 1000m를 넘는 산들이 둘러싼 이 지역은 도로의 80%가 비포장 산악도로였고 골짜기마다 마을이 있었다. 4륜 구동 코란도 택시는 주민들의 ‘발’이었다. 운전기사 이강의 씨(당시 50세)는 “개천에 빠진 경운기나 다른 차를 꺼내주다 보니 아예 차 꽁무니에 큼직한 견인고리를 달고 다녔다”고 말했다.

이 지프는 2년 뒤 ‘코란도’라는 이름을 달았다. 2012년 걸그룹 씨스타가 ‘코란도C’ 모델로 나서면서 코란도의 대중적, 여성적 이미지가 부각됐지만 사실 코란도는 태생부터 마초 혹은 군인 같은 거친 감성의 차였다.

쌍용자동차가 1983년에 도입한 ‘코란도’는 국내 자동차업계 최장수 브랜드다. 그사이 쌍용차는 일곱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지만 코란도는 살아남았다. 코란도(Korando)라는 이름의 어원인 ‘Korean can do(한국인은 할 수 있다)’ 정신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국산 SUV의 태동


코란도의 전신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신진자동차공업은 미국 카이저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첫 국산 지프 ‘CJ-5’를 생산했다. CJ는 ‘민수용 지프(Civilian Jeep)’의 약자다.

이후 신진자동차공업은 1974년 카이저를 인수한 AMC(아메리칸모터스코퍼레이션)와 지프전문 합작법인 신진지프자동차를 세웠다. 서진현 쌍용차 차체1팀 기술수석은 “당시 도면도 없이 공장에 실제 지프를 갖다놓고 자로 재가며 따라 만들었다”며 “차를 만들다 한 부분이 잘 안 맞으면 망치로 두들기고 철판을 자르고 납으로 용접해가며 다듬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요즘은 차체 철판 두께가 0.8mm 정도지만 당시 지프는 튼튼해야 한다고 해서 1.6mm를 썼다”며 “구둣발로 차도 차가 찌그러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출발은 깔끔했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건설현장용으로 개발했다가 젊은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라는 말은 없었다. 지프라고 했다. 지프는 1939년 미국 윌리스사가 전쟁에서 쓸 차량 이름을 ‘Jeep’라고 붙이면서 통용됐다. 당시 미국인들이 즐겨보던 신문 만화의 ‘뽀빠이’같이 생긴 주인공이 “cheep! cheep!(의성어의 일종)”라는 소리를 냈는데 윌리스사가 이와 발음이 흡사한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1982년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서 ‘코란도’ 브랜드가 처음 공개됐다. 당시 거화는 ‘KORANDO’ 로고를 그려 넣은 7개의 대형 기둥을 세우고 8대의 코란도를 전시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쌍용자동차 제공
코란도 전설의 시작

AMC는 신진지프차가 미국과 적대국인 리비아에 차를 수출한다는 이유로 기술제휴를 중단했다. 이에 신진지프차는 1981년 ‘거화(巨和)’로 사명을 바꿨다. ‘모든 것이 알맞게 조화돼 대화합을 이루고 많은 것이 모여 세상에 크게 기여하는 회사’라는 의미다. 1983년 ‘CJ’라는 브랜드를 ‘코란도’로 바꿨다.

이 회사의 사보에 따르면 코란도는 △‘Korean do it’(‘한국인이 했다’는 뜻으로 한국인이 자력으로 4륜 구동차를 개발했다란 의미) △‘Korea land over’(‘한국 땅을 넘는다’란 뜻으로 한국을 종횡무진 다니는 4륜 구동차란 의미) △‘Korean land dominator’(‘한국 땅의 지배자’란 뜻으로 한국을 지배하는 차 중의 왕자란 의미)에서 따왔다.

새로운 브랜드와 함께 거화는 CJ 후속 모델로 ‘코란도4(4인승 오픈카)’ ‘코란도5(지프형 승용차)’ ‘코란도6(국내 유일의 6인승 승용차)’ ‘코란도 밴(3인승에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차)’ ‘코란도 앰블란스(병원용 차)’ 등을 내놓았다.

1984년 동아자동차가 거화를 인수하고 1986년 쌍용그룹이 동아차를 인수하면서 쌍용은 코란도에 ‘Korean can do’라는 의미를 더했다.

코란도는 출시되자마자 부유층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작업으로 만들다 보니 1시간에 1대밖에 생산을 못했지만 사겠다는 사람은 넘쳤다. ‘코란도를 누가 먼저 가져가느냐가 권력의 서열’이라는 얘기도 돌았다. 이부안 쌍용차 프레스생산팀 수석은 “1985년 입사했을 때 부산에서 59.4m² 아파트 값이 800만 원이었는데 코란도가 비슷한 가격이었다”고 떠올렸다. 박종노 쌍용차 도장2팀 기술수석은 “인기가 너무 많아 한 달에 잔업만 150시간을 했다”며 웃었다.

인기의 첫째 비결은 튼튼함이었다. 김인식 쌍용차 차량설계담당 상무는 “차를 생산하면 산악지형과 염소 성분이 많은 백사장을 마구 돌아다니며 시험했다”며 “차가 주저앉으면 고쳐서 다시 시험하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1985년 쌍용차 사보에는 코란도를 타고 8m 경사 아래로 추락했는데 다친 곳 없이 말짱했다는 독자의 감사 투고가 실리기도 했다.

1986년엔 보닛 앞에 코뿔소 엠블럼이 등장했다. 딱딱하고 날카로워서 보행자에게 위험할 수 있어 곧 사라졌지만 당시 사람들은 ‘코뿔소 없으면 안 사간다’고 했다. 사람들이 떼어가는 통에 ‘코뿔소 도난사고’도 일어났다. 그해 코란도는 국산 차 최초로 일본으로 수출됐다.

쌍용 코란도, 최초가 아니면 꿈꾸지 않았다

1986년 11월 쌍용그룹이 동아차를 인수하면서 김석원 쌍용 회장의 오너십 아래 코란도에 대대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1988년 나온 스테이션왜건(접거나 뗄 수 있는 좌석이 있고 뒷문으로 짐을 실을 수 있는 자동차) ‘코란도 훼미리’가 대표적이다. 서상열 쌍용차 선행연구개발담당 수석연구원은 “정통 오프로드는 스티어링휠과 브레이크 등을 둔감하게 만들지만 코란도 훼미리부터 승용차의 부드러운 주행감이 가미됐다”며 “2년 만에 판매량이 2만 대를 돌파해 김 회장이 쌍용차 직원들에게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1989년엔 코란도의 인기를 반영하듯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라는 영화도 나왔다. 젊은 남녀들이 대포와 로프 등을 장착한 코란도를 타고 다니며 인신매매 조직과 맞서 싸우는 내용이었다.

해외 업체와의 협업도 이뤄졌다. 1991년 쌍용차는 2498cc, 79마력의 푸조 ‘XD3P’ 디젤 엔진을 장착한 ‘코란도 RV’를 내놓았다. 1996년엔 3세대 코란도 ‘뉴 코란도’에 메르세데스벤츠 엔진을 달았다. 2년 뒤 벤츠와 공동 개발한 120마력 ‘터보 인터쿨러 엔진’을 장착했다.

유정상 쌍용차 프로젝트관리담당 상무는 “당시 국내 최초로 주행 중 이륜구동과 사륜구동을 조절하는 ‘시프트 온 더 플라이’를 적용했고 세계 최초로 사륜구동 차에 ABS(안티 록 브레이크 시스템)를 도입했다”며 “‘최초가 아니면 꿈꾸지 않는 회사’가 모토였다”고 말했다.

미국 진출 좌절, 매각, 파업


쌍용그룹이 자금난에 처하면서 1998년 대우그룹이 쌍용차를 인수했다. 당시 김우중 대우 회장은 유럽에 코란도 공장 신설, 폴란드 수출 등을 검토했다. 이탈리아에서 2.5L 디젤 터보엔진을 공수해와 시험해보게 하는 등 코란도에 애착을 보였다.

당시 쌍용차는 북미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명은 ‘K115’. 개발, 양산, 성능 인증까지 모두 마치고 1999년 하반기(7∼12월) 출시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쌍용차를 포함한 대우 12개 계열사가 1999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시작하면서 북미 진출 꿈은 물거품이 됐다. 2000년 대우에서 분리된 뒤 주채권은행 조흥은행(현재 신한은행)을 새 주인으로 맞았다.

제너럴모터스(GM), PSA그룹, 중국 국영 석유화학그룹 란싱(藍星) 등과의 인수 협상이 줄줄이 어긋나면서 쌍용차는 2004년 상하이자동차에 팔렸다. 이듬해 9월 재기를 노리며 코란도를 단종시키고 ‘액티언’을 내놓았다. 결과는 참패. 유 상무는 “여성이 좋아하는 디자인이었지만 차체가 높아 치마를 입고 타기 어려운 실패작이었다”며 “당시 동북공정, 쓰레기 만두 파동 등으로 인해 ‘차이나 디스카운트’도 심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2007년 ‘수송 에너지 세제 조정방안’을 발표하면서 경유 가격을 휘발유의 85% 수준으로 올린 것도 악재였다.

쌍용차는 2006년부터 ‘4세대 코란도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2009년 하반기 출시가 목표였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닥치자 상하이차는 2009년 초 서울중앙지법 파산4부에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기술만 먹고 튀었다는 ‘먹튀’ 논란에 휩싸였다.

그해 5월 노조는 회사 구조조정 방침에 반대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이 직장폐쇄를 선언하고 공권력까지 투입되면서 77일간 공장이 멈췄다. 코란도 출시 계획은 무기한 연기됐다. 연구개발인력의 30∼40%가 회사를 떠났다. 김 상무는 “남은 엔지니어들은 협력업체, 자택, PC방에서 개발했다”며 “‘코란도C’에서 스티어링휠이 틀어진 상태에서 시동을 걸면 경고신호등이 켜지는 기능이 이때 아이디어로 나왔다”고 말했다. 파업은 3000억 원 이상의 경제손실을 내고 8월 6일 끝났다.

임직원들의 피와 눈물, 코란도C


공장은 일주일 만에 생산을 재개했다. 역경을 딛고 2011년 나온 모델이 코란도 4세대 모델 코란도C다. 유 상무는 “코란도C는 임직원들이 월급 반납하고 볼펜 하나까지 자기 돈으로 사가면서 만든 ‘임직원들의 피와 눈물’이었다”고 했다. 2010년 쌍용차의 새 주인은 인도 마힌드라&마힌드라로 바뀌었다.

2012년부터 아웃도어 열풍에 SUV가 주목을 받으며 코란도의 인기도 상승했다. 김 상무는 “가짜 SUV는 금방 질리지만 진짜 SUV는 처음 볼 땐 잘생긴 것도, 못생긴 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다”며 “그게 코란도의 바보 같은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쌍용차는 ‘코란도 아우’를 내세워 북미 진출을 다시 추진 중이다. 내년에 나올 소형 SUV ‘X100’을 통해서다. 여영구 차체2팀 기술수석은 “대규모 투자가 진행된지라 X100 개발은 기회이자 위기”라며 “파업 직후처럼 똘똘 뭉쳐 간다면 산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에필로그

코란도의 주인은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 신진지프자동차(거화)는 동아자동차에, 이어 쌍용그룹, 대우그룹에 인수됐다. 이후 조흥은행(채권단)이 주인이었다가 상하이차에 팔렸다. 다시 법원이 주인이 됐다가 마힌드라에 팔렸다. 칠전팔기다.

이런 우여곡절의 역사에 비해 코란도를 기록한 번듯한 사사(社史) 하나 없다. 이번 코란도 취재를 할 땐 1980년대 입사한 직원들과 단체 인터뷰를 진행했고 동아자동차 시절 사보, 자동차 관련 서적 등을 참고했다. 인터뷰에서 일부 직원들은 파업사태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유현 기자 yh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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