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한판 붙자, 5성호텔… 두 장돌뱅이의 도전

동아일보

입력 2014-06-12 03:00 수정 2014-06-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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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동창생 강혁 씨(왼쪽)와 김종혁 씨는 ‘5성급 호텔’ 수준의 셰이크를 만들겠다며 ‘오성(五星)쉐이크’를 열었다. 4월부터 30㎡ 남짓한 가게에 안착했지만 지난해만 해도 푸드트럭을 타고 서울시내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정부의 푸드트럭 규제 완화에 대해 그들은 할 말이 많았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점포 계약을 마치고 인테리어업체를 선정하느라 정신이 없던 3월, 뜬금없이 ‘푸드트럭’이 신문에 자꾸 오르내렸다. 한 달 뒤면 가게 ‘오성(五星)쉐이크’를 여는 김종혁 씨(39)와 강혁 씨(37)는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규제개혁 토론회에서 푸드트럭이 논란이 됐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한때 그들도 푸드트럭을 몰았다.

인터넷으로 관련 동영상을 봤다. 대통령이 “규제를 풀라”고 지시하자 5일 만에 ‘손쉽게 화물차를 푸드트럭으로 개조할 수 있게 된다’ ‘푸드트럭이 합법적으로 영업할 수 있게 된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정부가 실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차 개조야 예전에도 다 할 수 있었지 뭐. 우리도 했는데.”

“그렇다고 구청에서 길거리영업 단속을 안 하겠어? 대기업이 운영하는 놀이공원에는 들어갈 수도 없고, 공공 유원지는 평일에 사람이 거의 없잖아. 어디서 장사를 하라는 말인지….”

두 사람에게 푸드트럭을 몰았던 지난해의 고달픔이 새삼 몰려오는 듯했다.


○ ‘장돌뱅이’ 신세 푸드트럭

늦더위가 이어지던 지난해 9월 중순 한낮. 그날따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우체국 안쪽 도로변에는 거리매점 앞을 빼곤 빈 공간이 없었다. 트럭 운전대를 잡은 김 씨가 난처한 표정으로 옆자리 강 씨를 돌아봤다. 일주일 전 광화문에서 여의도로 쫓기듯 옮겨왔을 때 거리매점을 운영하는 할머니가 매섭게 쏘아붙인 말 때문이었다. “매점을 가린 채 장사하면 구청에 신고하겠다”라고.

최대한 멀찍이 트럭을 대도 차가 매점을 약간 가렸다. “형, 괜찮을까?” 그렇다고 하루를 공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해보지 뭐….” 증권가 직장인들의 호응도 괜찮아 웬만하면 여의도에 자리 잡을 요량이었다. 셰이크 재료를 준비한 두 사람은 푸드트럭의 판매대를 펼쳤다. 햇빛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0여 분 지났을까. 영등포구청 가로정비반이 떴다. 두 사람은 별다른 항변도 못하고 조용히 판매대를 닫았다. 이골이 난 일이었다. 다만 그날은 첫 주문도 받지 못했을 뿐.

“이제 어디로 가지?” “장돌뱅이처럼 서울 바닥에서 웬만한 데는 다 가봤고 한두 잔 팔다 쫓겨 나온 지역도 수두룩한데…. 형, 더이상 갈 데가 없는 것 같아.”

두 사람은 서울 유명 사립대의 96학번 동기. 두 사람이 셰이크를 파는 푸드트럭 ‘오성쉐이크’를 함께 몰고 다니기 시작한 건 지난해 8월부터였다. 처음에는 해수욕장에서 장사를 시작하려 했다. 여름에 해수욕장만큼 인파가 몰리는 곳이 있으랴. 하지만 노점상끼리 정보를 나누는 웹사이트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뜯어 말렸다. 해수욕 시즌이 끝나가는 데다 이미 터를 잡은 노점상들의 텃세가 심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공략하기로 한 게 서울 도심이었다. 낮에는 청계천으로, 밤에는 북악스카이웨이로. 발전기를 켜고 판매대를 펼쳤을 때 눈에 들어왔던 첫 손님은 지금도 생생하다. 여덟 살쯤 됐을까. 남자아이가 셰이크를 사려고 손에 돈을 쥐고 있었다. 그날 판 셰이크만 27잔. “내가 만든 걸 사람들이 돈을 내고 사먹네.” 김 씨는 신기해서 연신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후로도 그날처럼만 잘됐다면….”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푸드트럭 운영자’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불법 노점상 신세였다. 주변 상인들의 민원 때문에 구청 공무원들에게 쫓겨 다니기 시작했다. 무단으로 도로를 차지한다는 이유로 도로교통법 위반, 영업신고를 하지 않아 식품위생법 위반. 단속당할 꼬투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하철 2호선 강남역 골목에서는 순찰을 도는 노점협회원이 위협적인 말투로 “협회에 가입된 사람만 여기서 장사를 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앞에선 폐쇄회로(CC)TV로 내다보던 경비원이 신고해 경찰차가 출동했다. 그렇게 ‘오성쉐이크’ 트럭은 서울시내 곳곳에 바퀴 자국을 남겼다.

아침에 출발할 때마다 형이 ‘오늘 어디로 갈까’를 묻는데 나중에는 그 질문을 듣는 것조차 싫더라고요. 하루 앞도 내다볼 수 없으니….”

어디엔가 자리를 잡고 판매대를 펼칠 때마다 단속반이 뜰까 늘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보니 17년 지기끼리 목소리를 높이는 날도 있었다. 송도국제도시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오던 날 김 씨는 속상한 마음에 강 씨를 타박했다. “사람들 많이 다니는 곳도 모르는 동네에 왜 가자고 했어! 기름값만 들게!” 김 씨도 안다. 강 씨 탓이 아니라는 걸. 강 씨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자영업자 공화국’인 한국에는 큰길가뿐 아니라 작은 골목에까지 식당과 카페가 넘쳐난다. 기존 상인들에게 피해 안 주고 푸드트럭 장사를 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 물러설 곳 없는 두 남자의 실험

상가 주차장에 서 있는 푸드트럭 ‘오성쉐이크’는 지금 창고 역할을 하고 있지만 지난해만 해도 서울시내 곳곳을 누볐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김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광고기획자였다. ‘주님(광고주를 지칭하는 광고업계 속어)’의 비위를 맞추랴, 내부 직원들을 독려해 제대로 된 광고안을 만들랴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생활이 9년, 몸이 배겨나질 못했다.

지난해 5월 초 병원 신세를 지고 나서 김 씨는 마음의 외침을 들었다. “이렇게 죽도록 일을 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 받고 사는 게 진짜 사는 건가….” 퇴원하던 길로 한 달 휴직원을 냈다. 말이 휴직원이었지 회사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아내와 한 살, 세 살 난 아이들이 눈에 어른거렸지만 무슨 일이든 하겠지, 밥 굶기랴 싶었다.

강 씨는 그때 지인의 카페 일을 돕는 비정규직이었다. 한때 홍익대 앞 카페 ‘사장님’이었지만 적자가 불어나 4년여 만인 2012년 6월 가게문을 닫았다.

“같이 ‘우리 일’ 해볼까? 나는 마케팅 전문가고 너는 카페 전문가인데 둘이 합치면 뭐라도 팔지 않겠냐? 안 되면 이민 가지 뭐.” 나이차는 있지만 대학 때부터 죽이 잘 맞던 김 씨가 제안했다. 강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설 곳 없던 두 남자는 그렇게 의기투합했다.

창업을 하기로 했지만 두 사람이 끌어올 수 있는 돈은 고작 1000만 원씩밖에 안됐다. 번듯한 직장도 없는 30대 남성들에게 큰돈을 선뜻 빌려주겠다는 은행은 어디에도 없었다. 점포를 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푸드트럭 아이디어는 이런 절박함에서 나왔다. 실패한다 해도 위험 부담이 적었다. 싼 중고 트럭을 구하려고 전국을 뒤졌다. 대전에서 500만 원을 주고 산 트럭은 서울로 타고오던 중 고속도로에서 퍼졌다. 다시 돌려주고 이리저리 수소문하다 상태가 괜찮은 1t 중고 트럭을 1000만 원에 샀다. 차량 개조업체를 수소문해 찾아가 푸드트럭으로 만들고 나니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

비록 트럭에서 팔지만 고객에게 ‘5성 호텔급’ 셰이크를 제공하겠다는 뜻으로 지은 ‘오성쉐이크’. 이름에 걸맞은 제품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 황학시장 기계골목을 뒤져 품질이 괜찮은 셰이크믹서를 건졌다. 음료를 개발하느라 하루 7, 8잔씩 시음하다가 여름 내내 배탈을 달고 살았다. 이렇게 12가지 메뉴를 개발하고 미술을 전공한 강 씨의 여자친구가 그려준 두 사람의 캐리커처를 트럭 뒤에 붙였다.


○ 창업의 디딤돌 된 푸드트럭

이제 그들은 장돌뱅이 신세를 벗어났다. 서울 용산구 이촌로 신용산초등학교 맞은편 30m² 남짓한 가게가 두 사람의 새 터전이다. 50대 남자가 주문을 한다. “오레오 셰이크 하나, 딸기 셰이크 하나요.” 시간은 벌써 오후 9시 40분. 마감까지 20분. 두 남자의 손이 바빠진다.

가게 ‘오성쉐이크’는 4월 25일 열었다. “우리가 푸드트럭 장사를 하면서 그냥 장사만 한 게 아니었거든요. 어디에 터를 잡아야 실패하지 않을지 계산하고, 메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살피며 메뉴를 계속 업그레이드했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감이 생겼죠.” 김 씨의 말이다. 광고기획자 경험을 살려 22쪽짜리 사업계획서도 만들었다. SWOT(Strength, Weakness, Opportunity, Threat·강점, 약점, 기회, 위협) 분석과 출점비용 조달계획, 2호점 출점 및 법인화 목표까지 꼼꼼히 담았다. 은행에서 연리 7%로 대출을 받았다. 김 씨는 전세로 살던 아파트를 월세로 돌려 창업자금에 보탰다. 그렇게 마련한 돈이 1억9000만 원이었다.

아직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햇병아리 가게지만 두 ‘매니저’가 월급으로 250만 원씩 가져가자던 목표는 초과 달성했다. 한 유명 백화점에서 입점 제안을 받기도 했다.

‘오성쉐이크’ 트럭은 상가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지금은 창고대신 쓰이지만 다시 시동이 걸릴 날을 기다리는 것도 같다. “가끔 트럭을 끌고 나가서 장사하고 싶어요. 길거리에서 손님들이 몰려들 땐 활기가 넘치잖아요. 당시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만 지금은 점포가 있으니 푸드트럭을 해도 마음 편하게 장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강 씨가 말했다.

지금 이 시간, 수많은 푸드트럭은 여전히 정처 없이 도심을 떠돌고 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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