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선발로 달려나온 봄… 저 꽃잎에 반해 이렇게 설렜나

전승훈기자

입력 2021-02-27 03:00 수정 2021-03-1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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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아트로드]부안 변산반도



‘봄은/출발선이 없다는 것을/아는 꽃이 있다/발이 얼어붙어/떨어지지 않는다고/다들 호들갑 떨 때/봄내음보다 먼저/달려 나오는 꽃’(강민숙 ‘변산바람꽃’)

봄은 전북 부안 변산반도에서 시작됐다. 새해 첫 출항을 알리는 ‘위도 띠뱃놀이’의 띠배가 힘차게 돛을 올렸고, ‘변산바람꽃’은 한겨울 찬바람 속에서 꽃을 피워냈다.

한겨울 전북 부안 내변산 숲속에 핀 야생화 변산바람꽃



●봄을 알리는 야생화, 변산바람꽃
서해바다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변산반도 내변산의 깊은 숲 속에 들어갔는데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걷다보니 나뭇가지와 낙엽만 앙상한 어두운 숲에서 갑자기 찬란한 조명을 밝힌 듯 야생화 몇 송이가 환하게 빛난다. 봄보다 먼저 피어난 작은 생명. 찬 바람에 흔들려서 금방이라도 꺾일 듯하다.

변산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변산바람꽃은 엄동설한인 2월 초부터 피어나 복수초, 노루귀와 함께 봄을 부르는 야생화 3총사다. 특히 가장 먼저 피어나는 변산바람꽃은 한겨울 야생화를 찍은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꽃이다. 3~4cm의 키에 하얀색 꽃받침엔 은은한 핑크색이 감돌고, 노란색 암술을 둘러싸고 있는 수술 끝은 보라색으로 우물가의 새악시처럼 청초하다. 수줍게 고개 숙인 얼굴 한번 보고 싶어 축축히 젖은 땅에 배를 깔고 누웠다. 떨림을 최소화하려고 숨을 참고 있는데, 카메라 렌즈 안에서 확대된 꽃이 바람에 더욱 흔들린다.

아직 잔설이 남은 엄동설한인 2월 초부터 피어나는 이 꽃은 여수 돌산 향일암 부근, 무등산에서도 피어나지만 이름은 어디서나 변산바람꽃이다. 동백과 매화, 산수유 나무도 이른 봄에 꽃이 피지만, 엄동설한에 땅을 뚫고 나오는 키 작은 야생화는 더욱 애처롭다. 어둡고 힘겨운 시대, 어김없이 피어난 새하얀 꽃잎에서 희망을 얻는다. 대견하고 고맙다.

‘급하기도 하셔라/누가 그리 재촉했나요/반겨줄 임도 없고/차가운 눈, 비, 바람 저리 거세거늘/행여/그 고운 자태 상하시면 어쩌시려고요/살가운 봄바람은, 아직/저만큼 비켜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데/어쩌자고 이리 불쑥 오셨는지요’ (이승철 ‘변산바람꽃’)

변산바람꽃은 변산반도국립공원의 ‘깃대종’이다. 깃대종은 특정 지역의 생태, 지리,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야생생물로 그 지역의 생태계를 회복하는 개척자라는 이미지를 깃발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용어다.

현재 남아있는 변산바람꽃의 주요 서식지는 탐방로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 주변 구역이라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대신 변산국립공원사무소는 2011년부터 탐방객들이 쉽게 관찰할 수 있도록 내변산 탐방로 주변에 인공적으로 꽃씨를 뿌려 키운 변산바람꽃 대체서식지(약 300㎡ 크기)를 조성해 개방하고 있다. 2월5일부터 3월 15일까지 개방하며 탐방객은 변산반도국립공원 내변산 분소를 방문해 신청 후 출입이 가능하다.


●새 봄 첫 출항, 위도 띠뱃놀이
국내 대표적인 풍어제 중 하나인 ‘위도 띠뱃놀이’ 중 띠배가 어선에 매달려 새해 첫 출항을 하고 있다.

전북 부안 격포항에서 14.5km 떨어져 있는 위도. 낚시꾼들에게는 소문난 낚시 포인트이고 8월에는 흰색 상사화가 피어나 ‘위도 상사화 달빛걷기 축제’가 펼쳐지는 아름다운 섬이다.

설연휴 마지막날인 지난 14일. 부안군 위도면 대리마을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2-3호 ‘위도 띠뱃놀이’ 행사가 열렸다.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에 열리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풍어제 중 하나다. 새해 첫 출항, 새 봄을 준비하는 행사에 예년에는 수많은 외부 손님으로 떠들썩했을 풍어제는 ‘코로나19’로 인해 최소한의 지역민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그러나 섬 주민들의 마음만은 어느 해보다도 간절했다.

위도는 칠산앞바다의 조기잡이 황금어장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1963년까지 위도는 전남 영광군 소속이었다. 위도 앞바다에서 잡힌 조기가 영광 법성포에서 해풍에 말리면 임금님께 진상되던 영광굴비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렸다. 조기잡이 철이 되면 전국에서 5000여 척의 어선과 1만 명 이상의 뱃사람들이 몰려드는 파시(波市)가 형성돼 섬 전체가 흥청거릴 정도로 잘 사는 섬이었다.

위도의 가장 큰 항구인 ‘파장금(波長金)항’은 ‘파도가 높아지면 금이 쏟아진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항구의 뒷골목엔 아직도 쓰러져가는 건물 앞에는 화강암 돌에 ‘인천관’이라고 간판이 여전히 남아 있어 놓여져 있어 뱃사람들로 들썩였던 위도의 황금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격포항에서 위도로 가는 뱃길은 험하기로 소문난 바닷길이다. 위도 가까운 곳에 있는 임수도 부근 해상은 세가지 조류가 합쳐지는 곳. 심청전의 ‘인당수’가 이곳이라는 전설도 있고, 1993년 서해훼리호 사건 때는 292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래서 위도 사람들은 매년 정월 초사흗날에 띠뱃놀이를 수백년간 한해도 빼먹지 않고 해왔다. 새 봄 첫 출항을 앞두고 허수아비 선원과 떡, 과일이 실린 띠배에 묵은 재액(災厄)을 띄워 멀리 보내고 만선을 기원하는 뜻이다.

이날 아침 위도 대리마을 주민들은 각자 배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들고 마을 뒷산 원당에 모였다. 산에 오르지 않은 남자들은 바닷가에서 ‘띠배’를 만들었다. ‘띠풀(茅草)’은 물기가 잘 스며들지 않아 옛 사람들의 비옷이었던 ‘도롱이’를 만들던 풀. 띠풀로 새끼를 꼬아 배를 만들면 먼 바다까지도 홀로 떠갈 수 있다고 믿었다.


아침부터 계속된 원당굿과 용왕제를 마친 후 항구에 밀물이 가득차자 농악대의 풍물소리에 맞춰 허수아비 선원과 과일, 떡이 실린 띠배를 띄우기 시작했다. “미끄런 조기야 코코에 걸려라/에이야 술배야~/껄끄런 박대야 코코에 걸려라/에이야 술배야~/나오신다 나오신다/에이야 술배야~ 술배로구나!” 주민들은 용왕밥(고수레용 허드레밥)을 선창가 바닷에 뿌리며 흥겹게 춤을 추며 올해도 고기를 많이 잡고, 마을사람 모두 안녕하기를 빌었다.

띠배가 오색기를 단 어선에 끌려 항구를 벗어나 한 20분 나아갔을까. 모선과 연결된 줄을 끊자, 작은 띠배는 썰물 조류를 타고 먼 바다로 떠내려갔다. 길이가 불과 1미터 남짓한 띠배는 파도가 잔잔하면 황해바다 한가운데까지 떠내려 간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지난해 온 세상을 괴롭혀 온 코로나 액운도 저 띠배에 실려 멀리멀리 떠내려가면 좋겠다”고 간절한 소망을 빌었다.

위도 띠뱃놀이. 그림 전승훈 기자


●영화와 문학, 그리고 소금커피
부안은 천혜의 땅이다. 바다로 툭 튀어나간 해발 509m의 변산은 깊은 산세와 함께 바다를 품어 임산물, 수산물, 농산물이 모두 풍족하다. 변산반도는 또한 영화감독 이준익(62)이 사랑하는 무대다. 그는 ‘왕의 남자’(2005),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2010), ‘사도’(2014), ‘변산’(2018)까지 4편을 부안에서 찍었다. 영화 ‘변산’에서 주인공인 래퍼 심뻑(박정민)은 고교시절 변산 앞바다의 노을을 바라보며 이런 시를 쓴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그러나 부안은 원래 가난한 동네가 아니었다. 폐항된 줄포항은 일제강점기 목포나 군산보다 먼저 개항했고, 조기가 많이 잡히는 칠산어장을 끼고 있으니 번영했던 항구였다. 인근 김제, 만경평야의 쌀을 수탈해서 일본으로 가져가는 창구역할도 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토사가 쌓이면서 차츰 항구의 기능을 잃었다. 항구는 인근 곰소항으로 옮겨가고 1990년대에 줄포는 완전히 폐항됐다. 북적대던 항구는 현재 줄포생태공원으로 변해 있다. 영화 ‘놈놈놈’,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줄포생태공원

곰소만에서 들어가는 변산 우반동 골짜기는 조선시대 인문학의 산실이다. 허균은 우반동 정사암에서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썼다. 허균이 꿈꾸던 신분타파의 이상향 율도국의 모델은 바로 변산 앞바다에 있는 섬 ‘위도’였다.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1622~1673)도 이곳에서 ‘반계수록’을 완성했다. ‘이화우 흩날릴제’로 유명한 조선시대 여류시인 매창(1573~1610)과 일제강점기 때 ‘그 먼나라를 아십니까’하고 외쳤던 신석정 시인(1907-1974)의 문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반계서당과 우물, 묘터를 볼 수 있는 ‘반계 유형원 선생 유적지’, 매창의 무덤과 시비가 있는 ‘매창공원’, 신석정의 집필실이 보존돼 있는 ‘신석정 문학관’은 부안 인문학 여행 코스다.


매창공원에 있는 매창의 시비


신석정 문학관

부안은 고려시대 청자의 산지로 유명했다. 변산에서 자라는 질좋은 목재 소나무, 최고급 품질의 고령토, 숙련된 청자 도공과 줄포항에서 개경까지 청자를 해상으로 운송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 때문이다. 전남 강진군, 해남군과 함께 부안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고려청자 도요지’를 등재하기 위해 함께 노력 중이다.

부안청자박물관

상감청자를 최초로 대량생산했던 부안의 고려청자 기술은 2011년 개관한 부안군 보안면 ‘부안청자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상감(象嵌)’는 반 건조된 그릇 표면에 무늬를 음각한 후, 그 안을 백토나 흑토로 메우고 초벌구이로 구워 낸 다음, 청자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를 하는 제작기법이다. 중국에서는 도자기 표면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반면에 흙표면에 음각으로 그림을 그려넣는 고려만의 독창적인 청자제작 방식이었다. 부안에서는 ‘상감청자’를 최초이자 대량생산해 고려청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가마터가 다수 출토됐다. 특히 사적 제69호로 지정된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고려청자 요지에서는 약 100㎝ 높이의 대형 상감파룡문초벌매병편이 출토됐다. 왕실에서만 사용되는 용문양이 상감기법으로 새겨진 매병의 조각으로, 이 곳이 일반수준의 평범한 자기생산지가 아님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고려중기 부안의 상감청자는 줄포만을 출발해 바닷길을 통해(조운제도) 수도 개경과 강화도로 유통됐다. 고려 황궁인 개성 만월대, 강화도에 소재하고 있는 고려 왕과 왕비의 능에서 부안의 상감청자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인스타그램 사진 명소인 채석강 해식동굴(위 사진)과 곰소염전 앞 ‘슬지제빵소’의 소금커피.


●가볼만한 곳=변산반도 채석강의 해식동굴은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인스타그램 명소다. 퇴적암층이 수만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절벽에 바닷물이 침식해 만든 동굴로, 안쪽에서 역광으로 촬영하면 각도에 따라 동굴이 유니콘 모양, 한반도 모양으로 찍힌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커플이 찍으면 최고의 장면이 나온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아 길게 줄을 선다. 밀물 때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물때표를 잘 보고 찾아가야 한다.



●맛집=곰소염전 앞에 있는 ‘슬지 제빵소’는 소금커피로 유명하다. 부안에서 찐빵으로 유명했던 아버지 김갑철 씨와 함께 딸 슬지 씨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춘 다양한 찐빵을 맛볼 수 있다. 또한 곰소염전의 특산품인 발효소금과 흑당이 어우러진 ‘단짠단짠’한 맛이 일품인 소금커피도 대표 메뉴다. 카페 2층에서 바라보는 곰소염전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슬지제빵소

QR코드를 스캔하면 부안 변산반도의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글·사진 부안=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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