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닻 올리는 ‘만선’, 올가미 같은 현실은 여전한데…

김민 기자

입력 2025-03-12 03:00 수정 2025-03-1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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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70주년 때 ‘만선’ 다시 무대 올려
초연 61년 만에 관객 찾아
‘산업화 그늘’ 빈곤-세대 갈등 그려
원작 대사 그대로 살려 재미 더해


연극 ‘만선’에서 도삼(황규환)과 연철(성근창), 곰치(김명수·왼쪽부터)가 빚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곰치와 아들 도삼은 고기 잡는 방식을 두고 갈등한다. 국립극단 제공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몰려든 부서(물고기)떼는 작은 어촌을 희열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가난한 곰치 일가에도 만선의 행운이 찾아오지만 기쁨도 잠시. 선주 임제순이 밀린 뱃삯 반값으로 고기를 모두 빼앗고 내일부터 배를 묶겠다고 통보하는데….’

1964년 희곡 현상 공모에 당선돼 초연될 당시의 이 연극 포스터. 국립극단 제공
1964년 7월 국립극단의 제37회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던 ‘만선(滿船)’의 당시 프로그램 북에 실린 줄거리 일부다. 표지엔 쓰러져 갈 듯한 어촌 풍경과 함께 ‘1964년도 10만 원 현상 희곡 당선작!’이라는 문구도 적혀 있다.

극작가 천승세(1939∼2020)의 작품으로 문학 교과서에도 실린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창작희곡 ‘만선’. 올해로 초연 61년을 맞은 이 작품이 6일부터 다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환갑의 세월 동안 내공을 쌓은 ‘만선’은 무얼 가득 싣고 2025년 항구로 돌아왔을까.


●올가미 같은 현실에 맺힌 비극


7일 찾은 연극 무대는 여전히 인물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었다. 곰치네 초가집은 삐뚤어져 있고, 무대 바닥은 경사를 넣어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표현돼 있다. 언덕 위에서 임제순이 흰옷을 입고 걸어 내려와 불가능한 조건을 내거는 모습, 바람이 세게 부는데도 곰치가 욕심을 부리며 돛을 두 개나 이고 언덕을 오르는 모습 등은 곰치 일가가 맞닥뜨린 ‘올가미 같은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올해 무대는 사실주의적 연극을 주로 선보여온 심재찬 연출에 제31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인 이태섭 무대디자이너가 무대를 맡았다.

곰치 일가가 맞닥뜨린 조건은 ‘만선’을 해야만 벗어날 수 있지만, 극복해야 하는 변수는 너무나 많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물고기 떼의 움직임, 몇십 분 단위로도 바뀌는 파도와 바람, 그리고 날씨까지. 그럼에도 곰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만선만 하면 된다, ‘이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불합리한 계약을 받아들인다.

더 빛나는 건 배우들이었다. 배우 김명수는 힘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곰치’의 고집을 잘 보여줬다. ‘구포댁’을 연기한 정경순은 운명의 파도에 휩쓸리며 자식까지 잃는 어머니의 한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악덕 선주 임제순’으로 열연한 원로 배우 김재건의 노련함 역시 돋보였다.


●60년 세월, 삶은 나아졌을까

극 중 곰치의 아들 도삼은 “외국 사람들은 배에 기계를 달아 고기 떼를 훤히 보고, 날씨도 탐지한다”며 “원시적으로 고기를 잡으려면 남의 큰 배보다 작더라도 내 배를 타자”고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하지만 곰치는 “뱃놈이 물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 “큰 고기로 만선 하는 맛은 역시 중선배다”라며 이를 무시한다. 급격한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빚어지는 세대 갈등과 빈곤과 같은 비극적인 서민의 현실이 잘 버무려졌다.

올해 연극은 굳이 대사를 현대화하지 않고 60년 전 쓰였던 그대로 살려냈다. “쐐기처럼 톡톡 쏜다”, “임제순이 속도 칡넝쿨이제”, “아저씨 넉살엔 얼음 속 굼벵이도 춤춘당께” 등에선 오리지널의 말맛이 여실히 살아있다. ‘만선’의 꿈을 산산조각 낸 폭풍우가 부는 장면은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거센 비바람과 파도가 휘몰아치는 듯 몰입감 있는 연출을 보여줬다.

바뀐 대목도 있다. 시대적 변화에 맞춰 슬슬이나 구포댁 등 여성 캐릭터는 원작보다 훨씬 주체적인 면모를 보인다. 다만, 60년 전 곰치의 모습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의지’와 ‘고난’으로 이해됐다. 하지만 2025년 관객들에겐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는 ‘고집’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30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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