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탄 낭만열차는 어딘고 하니 충남行”[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글·사진 예산·서산=전승훈 기자

입력 2025-05-10 01:40 수정 2025-05-10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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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열차여행을 하다가 ‘홍익회’ 카트를 끌고 가던 아저씨가 외치는 “삶은 계란∼”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삶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둥글둥글한 달걀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계란은 부활의 상징이자 무한한 가능성과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또한 단단해 보이지만 함부로 굴리다가는 깨져 버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생을 닮았다.

2004년 4월 KTX 고속철도가 다니기 전 열차 안 풍경은 사뭇 달랐다. 기타 치고 노래하며, 카트에서 맥주에 오징어, 땅콩 안주를 사서 먹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느린 기차 안 풍경. 무궁화호를 타고 장항선을 달리는 ‘충남으로 떠나는 레트로 낭만열차’를 타고 시간여행을 떠났다.


● 충남으로 떠나는 ‘낭만열차’

서울역 오전 7시. 103년 역사를 지닌 장항선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했다. 열차가 서울을 벗어날 즈음 통기타를 맨 가수가 등장했다.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 김수철의 ‘젊은 그대’를 부르자 열차 안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교련복을 입은 스태프들이 홍익회 카트를 밀고 다니며 삶은 달걀과 바나나맛 우유, 공주알밤 같은 충남 특산품을 간식으로 나눠 주고 뽑기게임을 통해 선물도 제공한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복장을 한 가수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요를레히디∼” 요들송을 부른다. 열차칸 풍경은 삽시간에 스위스 산골마을을 지나가는 알프스 산악열차로 바뀐다.

눈 깜짝 할 사이 열차는 목적지인 예산역에 도착했다. 역시 여행의 즐거움은 출발이 절반을 차지한다. ‘충남으로 떠나는 레트로 낭만열차’ 승객들은 보령, 아산, 서산, 서천, 예산, 태안, 홍성 등 대표적인 충남 지역 7개 명소 중에 선택해 여행을 시작했다.

예산 여행의 출발점은 1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 수덕사(修德寺). 우리나라 7대 총림(叢林) 중 덕숭총림(德崇叢林)이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충남 일대에 50여 말사를 둔, 중요한 사찰이다.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은 국내 목조건물 중 건축 시기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기도 하다. 배흘림기둥에 주심포와 맞배지붕이 얹힌 모습은 힘찬기상과 균형 잡히고 정제된 아름다움이 빛나는 고려시대 목조 건축의 전형을 보여 준다. 경허와 만공, 혜암 스님 같은 근현대 불교사에 중요한 선지식(善知識)들이 도도한 선풍을 이어온 사찰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에게 수덕사는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로 더 알려져 있다. 또한 일엽스님과 화가 나혜석, 고암 이응노 화백 등 유명한 신여성과 예술인의 인연이 얽히고 설킨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수덕사 대웅전만큼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수덕여관이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현대미술 추상화가 이응노 화백이 한때 살았던 수덕여관.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는 한국의 첫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이 머물렀다. 수덕여관 주변에는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머물면서 손으로 직접 새긴 문자 추상 암각화가 남아 있다. 수덕여관 옆 ‘선(禪)미술관’에서는 이 화백이 수덕여관에서 그렸던 수덕사 풍경화가 전시되고 있다.

국내 최대의 저수지인 충남 예산의 예당호의 출렁다리. 예산과 당진의 농경지에 물을 대는 저수지라고 해 ‘예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내 최대 저수지 예당호(禮唐湖)는 최근 떠오른 예산군의 대표 관광지. 2019년 개통된 길이 402m 출렁다리와 분수 덕분이다. 출렁다리의 하늘로 곧게 솟은 64m 주탑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펼쳐진 케이블은 거대한 황새가 길고 흰 날개를 펼친 듯한 풍경이다.

예당호 주변에는 황새 알 모양 조형물도 있다. 황새가 예산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 삽교천과 무한천을 끼고 넓은 농경지와 범람원 습지가 발달돼 있는 예산은 최적의 황새 서식지로 평가받고 있다. 인근에 있는 예산황새공원에는 황새문화관, 생태 습지, 사육장까지 갖춰 황새를 보호하고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산에 왔으니 사과 맛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예산에서 사과 농사가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 지금도 수령 100년 된 예산 황토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고덕면 은성농원에서는 ‘추사(秋史)’라는 이름의 사과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이 있다. 조선 후기 예산 출신 역사학자이자 서예가 김정희(1786∼1856)의 호를 딴 술이다.

예산 은성농원 예산사과와인 양조장에서 시음할 수 있는 사과주. 
캐나다에서 양조기술을 배운 정제민 대표는 황토사과로 시드르(사과주)를 만들고 증류해 프렌치 오크통에 숙성시켜 브랜디(칼바도스)를 만든다. 양조장 투어를 하면 ‘식객’ 화백 허영만 사인이 있는 오크통을 볼 수 있다. 애플파이를 직접 만들어 사과주와 함께 먹고, 9∼11월에는 사과 따기 체험과 음악회, 사과축제가 열린다. 유럽식 양조장 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연간 3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오는 명소다.


● 해미읍성 교황빵과 수선화

충남 서산 해미읍성 앞에는 ‘교황빵’을 파는 가게가 있다. 최근 선종(善終)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해미읍성 성지를 방문했을 때 드신 간식으로 선정된 빵이다. ‘키스링(Kiss Ring)’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동그란 빵은 서산육쪽마늘로 만드는 마늘빵이다.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한국을 찾아 해미읍성과 당진시 솔뫼성지 등을 찾아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이 해미읍성을 방문했던 이유는 이곳이 천주교 박해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1866∼1872년 천주교 박해 때 무려 1000명 넘는 충청 지역 신자가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갖은 고문을 받은 끝에 순교했다.

교황빵을 먹고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해미읍성의 정문은 진남문(鎭南門)이다. 이순신 장군도 10개월간 복무했던 해미읍성은 남쪽 왜구의 도발을 꺾고 진압하겠다는 의지가 현판에 담겨 있다. 진남문을 통과하자 오른쪽으로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오른 300세 넘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로 불렸던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 천주교 신자들이 머리채가 매달린 채 고문당하며 죽어 갔다고 한다. 회화나무 앞에는 죄수들이 갇혀 있던 옥사(獄舍)와 신문을 받고 고문을 당하던 형틀도 복원돼 있다.해미읍성 옥사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세례명 비오)가 순교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도 1791년 신해박해 때 천주교 신자란 죄명으로 해미읍성으로 유배를 왔다.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던 신도들은 해미읍성 서문 밖 자리개돌에서 잔인한 태질을 당하며 죽었다. 그래서 박해 시대 신자들은 순교자들 시신이 오가던 해미읍성 서문을 ‘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불렀다고 한다. 교황청은 무명 순교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21년 해미 순교 성지를 국제 성지로 선포했다.

충남 서산 운산면의 유기방 가옥 뒷편 솔밭 동산에 만개한 수선화.
다음 행선지는 서산 봄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운산면 유기방 가옥. 유기방은 충남민속문화유산 고택에서 거주하며 이 집과 주변을 관리하는 어르신 이름이다. 유기방 씨는 가옥 뒤 울창하게 자라고 있던 대나무 대신 수선화를 심기 시작해 지금은 가옥 주변 66만㎡(약 2만 평) 넘는 꽃밭을 관리하고 있다. 수선화는 원래 물가에서 주로 자라는데, 이 곳에서는 집 뒷편 동산 울창한 솔밭 그늘에서 수선화가 피어난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에 초록색 잎과 노란색 꽃이 바다처럼 펼쳐진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평화로웠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 유배 시절 돌담 밑에 피어난 수선화를 좋아했다. 추사는 제주 사람들이 수선화의 가치를 몰라보는 것에 유배당한 자신의 쓸쓸한 처지를 빗댄 시를 쓰기도 했다.

올해 ‘충남 방문의 해’를 맞아 ‘충남으로 떠나는 레트로 낭만열차’는 11월까지 모두 8차례 운행한다. 상반기에는 이달 17일과 30일, 6월 14일 등 4차례 운행된다. 충남문화관광재단 이기진 관광사업본부장은 “1960∼80년대 기차 여행 감성을 장항선에서 그대로 재현해 중장년뿐만 아니라 MZ세대에도 큰 인기”라고 말했다.


맛집
수덕사 가는 길에 있는 덕산면 ‘가야수라간’은 격조 있는 궁중음식과 제철 나물로 만든 농가 음식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식당이다. 100년 된 소나무 숲 밑 밭에서 키운 더덕, 곰취, 표고버섯 같은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한다. 궁중음식문화재단(이사장 한복려)에서 이어받은 ‘두부선’ ‘월과채’를 비롯한 궁중음식과 배로 만든 깍두기, 표고 새우찜 같은 농가 음식은 충남 로컬푸드 맛집 평가기관 ‘미더유’로부터 최고점인 별 5개를 받았다.


글·사진 예산·서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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