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하고 여행 떠난 14세 조선 소녀, 김금원의 ‘관동풍류의 길’

강릉=이소연 기자

입력 2022-09-18 11:32:00 수정 2022-09-18 12:52:24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강릉 선교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행을 다닐 수 없다니…. 저 원주 소녀 김금원,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이렇게 남장을 한 채 관동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시겠습니까.”

16일 오후 2시 반경 강원 강릉역에서 출발해 삼척해변역까지 이어지는 바다열차 안. 한 유랑객이 푸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열차에 올랐다.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나고 자란 조선시대 여성 시인 김금원(1817~?). ‘산천을 유람하는 여성은 곤장 100대에 처한다’는 경국대전에 따라 여성에게 여행은 그림의 떡이던 시대 남장을 하고 집을 떠나 관동팔경(關東八景·강원을 중심으로 동해안에 위치한 8개 명승지)과 금강산을 유람한 당찬 14세 소녀다. 그는 자신의 여행기를 담아 1851년 펴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처음 여행에 나선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마치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새장을 나와 끝없는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고, 좋은 말이 굴레와 안장을 벗은 채 천리를 달리는 기분이로다.’

조선시대 여성 시인 김금원으로 변장한 해설사가 강원 강릉역에서 출발하는 바다열차에 오를 채비를 하고 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물론 ‘진짜’ 김금원은 아니다. 이날 열차에 오른 이는 김금원의 복장을 한 엄미정 해설사.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16일부터 18일까지 김금원으로 변장한 해설사와 함께 강원 강릉에서 동해 풍경을 만끽하고 선교장을 야간 탐방하는 ‘관동풍류의 길’ 행사를 열었다. 강릉역에서 출발해 삼척해변역으로 이어지는 바다 풍경을 감상하는 ‘바다열차 관동풍류’와 만석꾼 이내번(1703~1781)이 터를 잡았던 300년 고택 선교장을 야간 탐방하는 ‘선교장 달빛방문’으로 관동의 낮과 밤, 바다와 고택의 고즈넉한 정취를 한번에 느낄 수 있다.

이날 엄 해설사는 정동진, 묵호항을 지나 열차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고성 청간정과 삼일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양양 낙산사, 울진 망양정, 통천 총석정, 평해 월송정 등 관동팔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에 동해는 없지만 이 푸른 바다야말로 관동팔경의 보이지 않는 조연”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김금원은 동해를 바라보며 호동서락기에 ‘이 강, 저 강이 동쪽으로 다 흘러들어 바다는 그지없이 깊고 넓도다. 비로소 하늘과 땅 사이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나니 그 품 안에 모든 것 다 안았구나’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김금원과 함께 떠나는 관동 여정은 밤에도 이어졌다. 오후 7시 반경 1시간 동안 진행된 ‘선교장 달빛방문’ 프로그램에서는 박광일 해설사(51)가 이야기를 풀어주고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관람객들을 안내했다. 특히 김금원을 연기하는 배우와 동행하는 재미가 있다. 선교장 여정의 첫 길목, ‘달빛이 내리는 문’이란 뜻을 지닌 선교장 월하문(月下門) 앞에서 김금원으로 변장한 배우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내 관동팔경을 유람하러 강릉을 찾았소. 이 집이 손님을 대하기가 신선 같다고 하여 내 며칠 지내고자 하오.”

김금원 복장을 한 배우가 강릉 선교장 월하문 앞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실제 조선시대 선교장은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유랑하던 옛 양반들에게 잠자리를 내어주던 아량 넓은 고택으로 이름을 떨쳤다. 박 해설사는 선교장 초입에 지어진 활래정(活來亭)을 가리키며 “관동팔경을 여행하는 손님들에게 내어주던 이 곳의 이름은 ‘늘 새 샘물이 솟아올라 맑은 연못’을 뜻한다. 선교장이 먼 길을 떠나온 손님을 얼마나 새 샘물처럼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16일 오후 박광일 해설사가 강원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 앞에서 이름에 얽힌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달빛이 내려앉은 선교장의 밤은 ‘신선이 머무는 높고 그윽한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가옥에서 펼쳐지는 대금산조와 가야금 연주를 들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옛 고택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박 해설사는 선교장 너머 어둠이 내려앉은 밤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옛 선비들은 따스하게 손님을 품어주는 선교장에 머물며 더 넓은 세상을 유람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길을 열면 저 어둠 너머 14세 소녀 김금원이 꿈꿨던 드넓은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겁니다.”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