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가락지 연못과 장수 샘물… 마르지 않는 富의 생명줄

글·사진 구례=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입력 2021-06-12 03:00 수정 2021-06-12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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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구례 운조루와 쌍산재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살기 좋은 터로 지목한 전남 구례군의 운조루.(큰 사진) 지리산 자락 끝단에 위치한 운조루는 대문 앞에 마당 대신 조성한 연못(오른쪽)과 물도랑 등 수기(水氣)를 적절히 응용한 대표적 고택이다.

《부자를 배출하는 곳의 조건을 확인해 보기 위해 조선팔도 360여 고을을 샅샅이 살펴본 이가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은 실사구시형 인문지리학자답게 흥미로운 답사 결과를 내놓았다. “물은 재물과 복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는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는 것이다. 또 “바닷가 주거지보다는 강가 주거지가 낫고, 강가보다는 시냇가 주거지가 더 좋다”고도 했다. 이중환이 제시한 부자 터는 당시 조선 양반층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책 ‘택리지’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중환이 시냇가 주거지로 극찬한 곳 중 하나가 지리산 자락 구례 구만(九萬·현재 전남 구례군 토지면) 일대다. 바로 호남 명가로 불리는 운조루(국가민속문화재 제8호)와 ‘비밀의 정원’으로 유명한 쌍산재(전남 민간정원 5호)가 자리한 곳이다.》


○ 집터에서 나온 금빛 돌거북

조선 영조 때인 1776년 지어진 운조루(토지면 오미리)는 2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양반가 주택이다. 낙안군수를 지낸 창건주 류이주(1726∼1797)가 집을 지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글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사람들이 이 터를 본디 이름난 길지(吉地)라고 하였으나 바위가 험난해 감히 터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류이주는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둔 곳(천장지비·天藏地秘)이 나를 기다렸다’고 하면서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해 며칠 만에 집터를 닦았다.”(삼수공행장·三水公行狀)

운조루가 위치한 구만(혹은 구만들)은 앞서 이중환이 점찍은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고, 이런 풍수설에 따라 류이주가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금구몰니(金龜沒泥·금빛 거북이 진흙 속에 묻힌 터)’라는 명당 이름답게 실제 터에서 돌거북상도 출토됐다. 류씨 집안의 가보로 소중히 보관돼온 이 거북상은 아쉽게도 1989년 도난당해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구만에 99칸 집(현재는 73칸)을 마련한 류이주와 그 후손들은 이후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리게 된다. 운조루 주인들은 막대한 농지와 함께 한때 25가구의 노비들을 거느린 지역 최고 부호(富豪)가 됐다.

과연 운조루는 부자가 나는 시냇가 집의 조건을 갖추고 있을까. 우선 운조루 대문 앞으로 바짝 붙어서 흐르는 개울물이 눈에 띈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돌 도랑을 따라 개울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운조루의 동쪽 문수저수지 방면에서 흘러온 개울물이 운조루 앞을 지나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양새다. 이를 ‘동출서류 내당수(東出西流 內堂水)’라고 한다. 서울로 치면 경복궁 앞으로 흐르는 청계천쯤이 될 것이다.

이에 더해 그 바깥으로 서출동류(西出東流·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 외당수(外堂水)가 감싸주면 금상첨화다. 운조루에서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2km 남짓한 거리의 섬진강이 그런 물줄기다. 서울의 한강에 해당한다. 이처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서로 교차하는 두 물줄기는 터의 좋은 기운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땅이 한층 더 풍요로워진다는 뜻이다.

운조루 주인의 재치 있는 ‘풍수 인테리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문 앞마당에 해당하는 곳에 아예 연못(동서 45m, 남북 15m)을 만들어 놓았다. 네모진 연못 가운데로는 인위적으로 만든 동그란 섬이 하나 있다. 연못 터 자체가 금환락지(金環落地·금가락지가 떨어진 터) 명당이라고도 전해지는데, 실제로 연못 가운데 섬은 대단한 기운이 응집돼 있다. 운조루는 물을 이용한 가택 개운(開運)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운조루에 숨은 5개 ‘보물’ 찾기

운조루의 솟을대문. 처마 양쪽에 액운과 살기를 막아준다는 호랑이 뼈와 말 뼈가 걸려 있다.
운조루에서는 일상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진귀한 ‘보물’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첫 번째가 출입구인 솟을대문 상단에 숨겨 있듯 걸린 두 개의 뼈다. 호랑이 뼈와 말 뼈다. 원래는 둘 다 호랑이 뼈였는데 머리뼈를 도둑맞는 바람에 말 뼈로 한쪽을 대체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집안의 액운과 살기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호랑이 뼈는 조선시대에도 구하기 힘든 비방으로 통했다. 두 번째는 큰 사랑채와 안채에 있는 둥근 기둥이다. 하늘을 의미하는 둥근 기둥은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궁궐 바깥에서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운조루는 당당히 우주의 중심임을 자부하듯 둥근 기둥을 사용한 것이다.

세 번째는 바깥사랑채 마당에 심어진 위성류(渭城柳)다. 명나라에 다녀온 사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위성류는 1년에 두 차례 꽃이 피는 희귀한 나무로 운조루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는 얘기가 집안 내력으로 전해져 온다.

네 번째는 위풍당당한 건물채에 비해 현저히 낮게 만든 굴뚝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마루 밑 기단에 낸 굴뚝 구멍은 밥 짓는 연기가 새나가지 않도록 설계한 것으로 끼니를 거르는 이웃들의 마음까지 배려한 조치다.

운조루의 큰 사랑채(가운데)와 중간 사랑채인 귀래정(오른쪽). 운조루와 귀래정은 모두 중국의 대표적 시인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말이다.
운조루의 주인들은 베풂과 나눔의 미학을 실천해 왔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마지막 ‘보물’인 운조루의 뒤주(쌀독)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중간에 배치한 뒤주 하단엔 한 주먹만큼 들어갈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거기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뜻으로 주변의 배고픈 사람들이 아무 때나 와서 쌀을 퍼가도록 한 장치다.

○별서정원이 돋보이는 쌍산재

구례에서 운조루와 비교되는 고택이 쌍산재다. 전국 최장수 마을로 꼽히는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이곳은 운조루와는 불과 2km 남짓한 거리에 있다. 방송사 프로그램인 ‘윤스테이’ 촬영지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쌍산재의 명당 혈에 자리 잡고 있는 우물. 우물 뒤쪽 담장에는 ‘천년고리 감로영천(千年古里甘露靈泉·천년 마을에 이슬처럼 달콤하고 신령스러운 샘)’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이 박혀 있다.
이곳 역시 물과 인연이 깊다. 지리산 화엄사 계곡에서 흘러나온 작은 시냇물이 집을 휘돌아 나가고 그 바깥으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른다는 점은 운조루와 비슷하다. 그런데 쌍산재의 백미는 우물에 있다. 2004년 한국관광공사에서 전국 10대 약수터 중 하나로 지정한 ‘당몰샘’이다.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당몰샘은 가뭄에도 마르는 법이 없고 신비한 효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사람들은 상사마을이 장수마을이 된 데는 이 우물이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이를 자랑이라도 하듯 우물을 씌운 지붕에는 ‘지존지미(至尊至味)’라는 현판까지 달려 있다. 최고의 맛을 지닌 우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쌍산재 주인은 사랑채 앞쪽 마당에 있는 우물 명당을 이웃들에게 내주었다. 우물터가 집안에 있지 않고 집 담장 바깥의 주차장에 있다. 쌍산재 주인이 마을 사람들이 물을 불편하지 않게 길어 가도록 담장을 새로 고쳐 우물을 바깥으로 배려한 것이다. 쌍산재의 넉넉한 마음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쌍산재 역시 운조루처럼 안채에다 ‘베풂의 뒤주’를 운영했다. 춘궁기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뒤주에서 쌀과 보리를 꺼내 갔고, 다음 해 다시 채워 넣는 방식으로 함께 고난을 이겨갔다고 한다.

쌍산재의 안채. 안채에는 춘궁기에 이웃들을 배려한 ‘베풂의 뒤주’가 있다.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쌍산재는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된다. 살림집(안채, 사랑채, 건너채)이라는 생활공간과 서당을 갖춘 별서정원(別墅庭園)이 대나무 숲을 경계로 나뉘어 있다. 그렇다 보니 쌍산재를 방문한 사람들이 앞쪽의 살림집을 보고서는 명성에 비해 소박한 규모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나무 숲을 지나 뒤쪽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정원을 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기 십상이다. 풍수에서 명당 집의 조건 중 하나로 꼽는 전착후관(前窄後寬·앞은 좁고 뒤는 넓음)의 전형적인 사례다.

쌍산재의 아래 공간인 살림집과 위쪽 공간인 정원을 경계 짓는 대나무 숲.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비밀의 정원’이 나타난다.
담양 소쇄원 느낌을 주는 별서정원은 갖가지 화초와 나무, 연못, 돌들이 하나로 어울려 선계(仙界)에 들어선 듯하다. 이곳에는 집안의 자제들과 동리 아이들이 학문을 닦던 서당채, 별채 성격의 경암당 등이 있다. 경암당 바로 옆에 있는 영벽문(暎碧門)은 쌍산재 비경의 정수라고 불린다. 바깥으로 통하는 샛문인 영벽문을 열면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네모난 문 틀 사이로 펼쳐지는 옥빛 사도저수지(농업용수)와 지리산 풍경이 마치 액자에 걸린 그림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쌍산재는 2004년 일반에 개방한 이후 관람 및 한옥 체험 숙박 운영을 해왔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사전 예약한 경우에만 관람할 수 있다.

운조루와 쌍산재는 수백 년에 걸쳐 그 명성을 자랑해온 진정한 명가다. 주변 사람들에게 넉넉한 마음을 베풀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자나 귀족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가문의 영속성을 위해서도 필요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사진 구례=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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