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지운 지영, 연극에선 삶을 되찾을까

이지훈 기자

입력 2022-09-22 03:00 수정 2022-09-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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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82년생 김지영’ 무대로 올려
30년간 차별 속에 살아온 주인공
원작에선 비관적 결말로 끝나지만
연극은 남편의 도움과 회복에 초점


출산 후 한 달 만에 복귀해 ‘전설’로 통하는 김은실 팀장(왼쪽)이 회식자리에서 신입사원을 성희롱하려는 부장을 막으려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최정화 도율희 홍성춘 소유진. 스포트라이트 제공

거실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김지영(소유진 임혜영 박란주)의 뒷모습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돌이 채 지나지 않은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운 가운데, 무색무취한 표정으로 집안일과 육아를 하는 지영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죽은 친구, 갓난아기, 친언니, 친정엄마…. 지영은 타인에게 빙의되는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병의 원인을 찾고 싶어하는 남편 정대현(김승대 김동호)의 시점으로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연대순으로 펼쳐진다.

2016년 출간된 후 국내에서만 138만 부 넘게 팔리고 미국, 일본 등 31개국에 수출된 조남주 작가의 베스트셀러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원작으로 한 동명 연극이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되고 있다.

주인공 지영은 남아선호사상이 공고했던 1980년대에 삼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여성. 언니 은영(도율희 안솔지)과 달리 지영은 막내 남동생을 편애하는 남존여비 가풍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대학 졸업반이던 지영은 아버지에게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는 핀잔도 듣는다. 입사 후엔 회식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곧 출산·육아를 할지 모른단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 출산 후엔 경력이 단절된 채 아이를 돌보던 지영에게 사람들은 ‘맘충’이라며 손가락질한다.

크고 작은 차별에 시달리던 지영은 “세상이 지영이를 지워간 것처럼”(대현의 극중 대사) 자신이 아닌 타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지영은 산후우울증 진단을 받지만 출산과 육아 후유증이 병의 모든 원인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작품은 30여 년간 이어진 지영의 삶을 보여주며 그 병이 지영이 살아온 총체적 세월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영의 이상증세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되긴 힘들 거란 비관적 결말을 그렸던 소설과 달리 연극은 지영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방관자이자 구조적 차별에 가담하는 인물로 그려졌던 남편은 지영의 아픔에 공감하고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조력자로 그려진다. 원작이 남성을 차별적 구조의 수혜자이자 공범으로 일반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한 의도다. 제작진은 “육아 휴직을 하려는 남편이 직장에서 차별받는 에피소드를 원작보다 비중 있게 다뤄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려 했다”고 밝혔다.

100분간 이어지는 연극은 장면 전환이 빠르고 늘어지는 대목이 없어 몰입감이 강하다. 연대순으로 흐르는 개별적 사건을 창의적으로 잇는 연출도 돋보인다. 주연뿐 아니라 1인 다역을 맡은 조연 배우들까지 흡인력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11월 13일까지, 5만5000∼7만7000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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