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장님! 잘 해 보십시오!” 활짝 웃은 전두환 대통령 한마디에…[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최영해 기자

입력 2022-09-11 09:00:00 수정 2022-09-11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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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은행 창업주 이희건 스토리③
“해보시오, 젊은 사람이 뭘 못 하겠소?”
“어느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하지 마시오.”



2022년 7월 7일 신한은행이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1982년 일본 전역의 재일교포 주주 341명으로부터 돈을 모아 만들어진 신한은행의 탄생은 이희건 창업주의 노력 없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 사회의 밑바닥 사환에서 시작한 이희건의 삶을 들여다 본 ‘여러분 덕택입니다. 신한은행 창업주 이희건 회고록’(나남)이 최근 발간됐다. 2011년 작고한 조선 청년 이희건의 불굴의 삶을 추적, 8월 28일에 이어 세 번째로 소개한다.



1985년 11월 20일 전두환 대통령이 서울 성동구 구의동 강변로에서 거행된 올림픽대교 기공식에 참석해 공사계획을 보고받고 있다. 왼쪽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 겸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사진 동아일보DB
“한국 정부의 자율화 정책, 믿을만한가요? 김재익 경제수석은 매우 합리적인 이코노미스트라고 하는데, 교민은행 설립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가질 것 같소?”

1981년 3월 3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한국 사회에선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 정의사회 구현을 목표로 사회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 아래 폭력배와 파렴치범을 잡아들여 ‘삼청교육대’라는 군사 시설에 수용했다. 당시 경제 정책의 조타수는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렸다. 전 대통령이 김재익 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은 각별했다. 이희건은 지인들에게 재일교포 은행 설립을 타진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지인들은 한결같이 김 수석의 언행이 일치한다고 답했다.


●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1981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 현안을 보고하며 결재를 받는 모습. 사진 동아일보 DB
희건은 때가 왔음을 동물적 본능으로 직감했다.

‘지금이야말로 재일교포가 모국에서 은행을 설립할 마지막 기회다!’

1980년 10월 정부는 외국계 은행 설립을 검토한다는 방침을 밝힌 터였다. 한국 경제의 대외 신인도를 높이고 외국 자본의 조달 경로를 다양화하고 한국에 선진금융 기법을 도입한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희건의 교포은행 설립이 그동안 번번이 좌절된 것은 기존 은행들의 카르텔 체제가 워낙 공고했기 때문이었다. 은행 설립은 엄청난 이권이어서 신입자를 철저히 배제하는 분위기였다.

희건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동포 투자가들을 모아 ‘재일한국인은행설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서울의 봄’인 1980년 4월, 그러니까 약 1년 전에 은행설립 청원서를 이승윤 재무부 장관 앞으로 제출했지만 어수선한 정국에서 이 서류를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윽고 불인가 방침만 통보 받았을 뿐이었다.

1981년 4월 이승윤 재무부 장관 앞으로 보낸 ‘가칭 교민은행 설립에 관한 청원서’ 사진 나남
희건은 1981년 4월 24일 재일교포 유지단의 공동 명의로 작성한 ‘가칭 교민은행 설립에 관한 청원서’를 이승윤 재무부 장관 앞으로 제출했다. 더불어 관계 요로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최고 통치권자의 재가 없이는 은행 설립이 성사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1만 여개 업체를 소유하거나 운영하고 있었고, 연간 매출액 10조 엔, 총 보유 자산은 70조 엔에 달했다.


● 전두환 대통령과의 면담
얼마 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전두환 대통령과의 면담이 성사됐다는 전갈이었다.

전 대통령은 희건을 환대하는 표정이었다. 일단 안도했다. 이승윤 재무부 장관과 김재익 경제수석이 배석한 자리였다. 대통령의 가정교사 김재익은 깡마른 체구였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린 김재익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그는 1983년 10월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아웅산 테러 당시 안타깝게도 순직했다. 사진 동아일보DB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동북아시아 금융 중심지가 돼야 합니다. 이런 기초 작업으로 선진국의 금융 자본을 유치할 때입니다. 재일교포들이 자발적으로 출자해서 은행을 설립하겠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김 수석의 보고에 전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윤 장관도 재일교포 은행 설립을 지지하는 말을 했다. 희건은 때를 놓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호소했다.

“대통령 각하! 우리 재일교포들이 조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재일교포들이 수십 년 동안 애타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전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 회장님! 잘해 보십시오!”

대통령 화통한 한마디에 희건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한국에서 재일교포 자금으로 은행을 만들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대통령 면담 직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재무부에선 “일이 잘 진행되고 있으니 은행 설립 준비를 하라”는 연락이 왔다. 군사정부 시절 은행 설립은 대통령의 결단 없이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때였다.

전 대통령은 경제라면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전문가에게 전권을 주는 이 같은 대통령의 위임 통치로 한국 경제는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군인 출신인 전 대통령이 일일이 경제 문제에 간여했다면 경제 정책이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는 뛰어난 관료 출신 중심의 전문가들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재임 시절 뛰어난 경제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다.


● 뜻 깊은 도쿄에서의 발기인대회
전두환 대통령이 1982년 1월 청와대에서 김준성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부터 새해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DB
1981년 8월 20일 재일교포 상공인들은 도쿄에서 발기인대회를 열고 신설할 교민은행의 사업 목적을 ‘모국에 진출한 재일교포 기업의 금융주선과 필요 업무’로 설정했다. 발기인은 이희건을 비롯해 신격호 강병준 등 모두 19명이었다.

희건이 어렵게 은행 설립 내락을 받았지만 예상대로 주주를 끌어 모을 수 있을지, 주금(株金)을 제대로 납입할지 걱정이 몰려왔다. 일부 재일교포 재력가는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이 불안하다며 투자를 꺼리는 모습도 포착됐다.

재일교포의 끈질긴 청원과 한국의 경제 상황이 맞물리면서 수십 년 동안 철통같던 은행 시장의 문호가 드디어 열리게 됐다. 재일교포 모국투자가들이 공동 출자한 신한은행과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국내 기업체의 합작은행인 한미은행이었다.

발기인대회에 이어 은행설립위원회가 꾸려졌다. 희건을 비롯해 40명의 위원들이 위촉됐다. 재일교포 사회를 이끌어가는 기업인들로 일본 전역에서 참여했다. 이들이 각각 5억~10억 원씩 내기로 한 출자금이 은행 설립의 종자돈이 됐다.

도쿄를 비롯해 오사카 요코하마 고베 시가 히로시마 야마구치 후쿠오카 센다이 교토 등에서 활동하는 재일교포 기업인들이 참여했다.


● 1982년 한국 사회상의 변화

1982년 1월 4일자 동아일보 호외(號外)에는 통금 해제와 교복 자율화, 개각 등의 뉴스가 쏟아져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정초 나들이길 서울시민들이 거리에 뿌려진 동아일보 호외를 보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DB
신한은행이 탄생한 1982년은 새해 벽두부터 사회적인 변화가 많았다.

매일 밤 0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을 금지한 야간통행금지가 철폐됐다. 늦은 밤에 밤거리를 배회하다간 경찰에 붙들려가 즉결 심판을 받던 때였다. 직장인들이 회식을 해도 밤 11시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중고생들의 두발과 교복 자율화가 발표됐다. 남학생은 삭발, 여학생은 단발이던 것을 자율에 맡기고 중고생들은 교복 대신 사복을 입을 수 있게 됐다. 자율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든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포부의 일환이었다.

1982년 1월 4일 개각에서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김준성 한국은행 총재가 임명됐다. 희건은 절친하게 지내던 김 부총리가 중용된 것을 축하하면서도 너무 높은 자리에 오르는 바람에 대면 기회가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1982년 1월 6일 통금이 해제된 늦은 밤 서울 거리에서 청년들이 활보하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DB
1967년 9월 초대 대구은행장으로 취임한 김준성 부총리는 희건을 자연스레 자주 만나게 됐다. 일본 간사이 지역 상공인 가운데 대구 경북 출신자들은 고국에 오면 으레 대구상공회의소와 대구은행을 방문하곤 했다. 희건은 한국에 올 때마다 김준성 행장을 만나 한국 경제 상황을 물어보곤 했다.

그때 마다 김준성 행장은 쾌도난마로 설명을 해줬다. 희건이 재일교포 은행을 설립하려던 것도 김 행장과의 대화가 큰 몫을 했다. 고속 성장을 하는 한국 경제는 앞으로도 크게 발전하겠지만 실물 부문의 성장 속도에 금융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희건은 그 때 무릎을 쳤다.

고교생 두발 자율화에 이어 1983년부터 중고생들의 교복 착용도 ‘개성 신장’을 이유로 폐지됐다. 사진은 교복 폐지 이전의 학생들이 하교하는 모습. 사진 동아일보DB
“그래! 한국에 꼭 진출하자!”

1920년생인 김준성은 희건보다 세살 아래로 대구고보(현 경북고)와 경성고상(현 서울대 경영대)을 나와 대구에서 칠복양말 공장을 차렸다. 뒤엔 농업은행에 들어가 금융인으로 변신한 뒤 대구은행 설립에 참여해 초대 대구은행장으로 취임했다. 김준성 행장의 당시 비서실장이 라응찬으로 신한은행의 산파역에다 신한은행장을 맡게 된다. 김준성이 농업은행 지점장 시절 라응찬은 농업은행 직원으로 김준성의 눈에 들었던 것이었다.

1982년 11월 국회 예결위에 참석한 김준성 부총리(오른쪽)와 노태우 내무장관. 사진 동아일보DB




● 눈물과 빗물이 뒤섞인 개업식 날
1982년 7월 7일 마침내 신한은행이 문을 열었다.

341명의 재일교포 주주들이 자본금 250억원을 모아 만든 은행이었다. 금융보국(金融報國), 새로운 한국을 만든다는 일념으로 한국 최초의 순수 민간자본 은행이 탄생한 것이다. 영업점 3개로 출발한 미니은행이었다.

개점 당일 서울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앞에서 재일교포 주주 200여 명은 주룩주룩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면서 감격에 겨워했다. 현해탄을 건너가 이국에서 주린 배를 달래며 지문이 닳도록 궂은일도 도맡아 하면서 번 돈으로 모국에 은행을 세운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때 추진하던 사업이 정권이 바뀌어서야 성사될 수 있었다.

희건은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훔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의 얼굴엔 빗물과 눈물이 섞여 흘러내렸다. 다른 주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 만에 고국 땅 서울에서 은행을 세우다니 감격의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1982년 7월 7일 신한은행 창립기념식. 서울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앞이다. 사진 나남
“신한은행은 수많은 재일교포 기업인들이 주도해 이룩한 피와 땀의 결정체입니다. 오매불망 조국에 대한 애국충정을 승화한 산물입니다. 조국의 경제 개발에 대한 재일교포 참여 의지의 결집체입니다. 이제부터 신한은행을 대한민국의 번영과 더불어 성장시켜 나가겠습니다!”

창립기념식에 마이크를 잡은 이희건 회장은 감격의 눈물과 함께 조국의 번영에 기여하는 신한은행의 성공을 다짐했다.

개점 첫날 명동 본점 영업부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하루 방문 고객 수가 1만7520명, 보통예금 178억원, 당좌예금 76억원, 저축예금 6억원, 창립기념 정기예금 95억원 등 5017개 계좌에 357억 4800만원이 몰렸다. 은행 설립자본금의 1.5배를 유치한 사상 초유의 실적이었다.


● 명동 로얄호텔에서 파노라마에 잠기다
창립기념 축하연을 끝내고 숙소인 명동 로얄호텔로 돌아온 희건은 혼자 맥주를 마시며 상념에 잠겼다. 방에 배달된 신문에 신한은행 광고가 실려 있었다.


이희건 회장은 “용기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평생 강조했다. 사진 나남
‘새싹의 꿈 키우는 신한은행’

‘저희 신한은행은 건국 후 최초의 순수 민간자본으로 발족되는 전국 규모의 6번째 시중은행입니다’

조국에 은행을 세우려고 동분서주한 지난날이 파노라마 필름처럼 희건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갖고 있던 일본의 파친코 점포 3곳 중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곳을 매각했다. 이 돈으로 은행 인허가, 주주모집 설명회, 사무실 임차료 등 제반 비용을 댔다. 남에게 밥값을 내지 못하도록 하는 그의 성미는 은행 준비 단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잡다한 일로 출장을 다니면서 돈도 쓰고 발품도 팔아야 했다. 주변에서 너무 일에 몰입하는 희건을 만류하기도 했지만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장수(將帥)가 최선봉에서 총대를 메고 두려움 없이 전진해야 한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은 그였다.

막상 은행 설립 인가를 받고 자본금을 내야 할 때가 되자 주주가 되겠다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주저하기도 했다. 오사카와 도쿄 이외 지역에선 신한은행에 출자하겠다는 동포들이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도 팽배했고, 설령 은행이 설립되더라도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있었다. 모두 이희건 이사장을 믿고 거액을 낸 것이었다. 희건은 ‘주주들을 위해서 분골쇄신 하겠다’고 다짐했다.


● ‘용기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
“재물을 잃은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사람을 잃는 건 많이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것은 모든 걸 잃는 겁니다.”

“해보시오. 젊은 사람이 뭘 못하겠소?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열심히 해보시오”

“어느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하지 마시오.”

“기업의 성장과 존망은 천명(天命)에 달려 있고, 천명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기업에서 인심이란 종업원과 고객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기업의 존망은 종업원과 고객에게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희건 회장이 생전 늘 강조한 말이다.

이 말에 그의 사업 이념이 잘 녹아 있다. 2001년 이 회장은 신한은행 회장에서 물러났다. 그가 일본에서 설립한 간사이흥은이 파산 선고를 받아 회장 자리에 머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한은행에서 특별위로금으로 5억원을 주겠다고 했다. 한사코 사양했지만 통장으로 입금됐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이 돈을 대구사범 입시 때 만난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사업회에 기부했다.

이희건 회장은 재일교포들이 차별 받지 않고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1980년 일본 나라현에 KOMA컨트리클럽을 만들었다. 고려와 북녘 말 호마(胡馬)의 의미를 모두 담아 만든 이름이다. 골프장에서 ‘공수래공수거’라는 이 회장의 인생철학을 엿볼 수 있다. 사진 나남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이희건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넘겨주는 것은 자립 의지를 꺾을 뿐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대로 실천했다.


● ‘자식은 대학 공부 부모 돈으로 한 것으로 만족해야’
“너희는 대학 공부를 부모 돈으로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희건은 자식들에게 생전 이 말을 되뇌었다. 오래 전부터 유산을 상속하지 않을 것이니 욕심 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고, 자식들은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2008년 10월 자식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로 ‘재단법인 이희건 한일교류재단’이 출범했다. 신한은행 보유 주식과 예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자신을 낳아준 한국과 길러준 일본에서 살았던 재일교포로서 두 나라가 더불어 돕고 서로 이해하기를 소망하는 바람에서 재단을 세웠다.

‘한일관계의 밝은 미래’ ‘세계 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는 디딤돌’

재단법인 이희건 한일교류재단의 캐치프레이즈다.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은 2011년 3월 9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2011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 오피니언면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재일교포 사회의 구심점이었던 그의 명복을 기리며 추모했다. 캐리커쳐 최남진·동아일보DB
경북 경산의 빈농에서 태어나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한 무허가 시장에서 자전거 타이어 장사를 시작한 희건. 1955년 오사카 지역 재일교포 상공인들과 함께 오사카흥은(大阪興銀)이라는 신용협동조합을 세웠고, 1974년엔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를 만들어 신한은행을 창립한 그는 평생을 ‘영원한 혁신가(permanent innovator)’로 활동했다.

88서울올림픽 때 재일교포로부터 100억 엔을 모아 한국에 기부했고, IMF 외환위기 때 달러가 부족하자 일본에서 ‘국내 송금하기 운동’을 주도했다.

2011년 3월 21일 그는 94세 일기로 오사카에서 별세했다. 신한은행 주총이 끝나기 전에 자신의 부고를 알리지 말라고 한 그는 지금 교토부 미나미야마시로촌에 영면해 있다.

그러나 고향 경산을 향한 그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은 한국과 일본에 오늘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


1960년대 초반 이희건의 고향 마을 경산을 전경으로 찍은 사진을 토대로 그린 유화.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한일 교류와 모국 발전에 평생 동안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묘지는 일본 교토에 있지만 그는 항상 고향 경산을 바라보는 수구초심을 잊지 않았다. 사진 나남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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