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들 “제발 더 달라 하지 마세요”… 고물가에 태풍까지 ‘겹시름’

김윤이 기자 , 유채연 기자

입력 2022-09-05 03:00 수정 2022-09-0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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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힌남노’ 내일 상륙]
추석 명절 앞둔 전통시장 가보니


상인들, 오죽했으면… 4일 오후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의 한 반찬가게 간판에 ‘재료값이 올라 너무 힘들다. (반찬을) 더 달라고 하지 말아 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 가게는 지난달 기록적 폭우 당시 심각한 침수 피해를 입었다. 최근 수해, 고물가, 소비 침체의 ‘3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추석 대목을 기다렸던 상인들은 ‘태풍 힌남노가 추석 특수를 쓸어가게 생겼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얼마 전 수해를 겪었는데, 추석을 앞두고 태풍까지 온다니….”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권모 씨(50)는 3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권 씨는 전날 도축된 소고기 한 팩을 정가(2만∼2만5000원)의 반값 이하인 1만 원에 팔고 있었다.

권 씨는 “강풍에 비까지 내리면 시장의 주요 손님인 어르신들이 아예 외출하지 않는다. 명절까지 며칠 남긴 했지만 들여온 고기를 다 못 팔 것 같아 일찌감치 떨이로 팔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또 “요새 물가가 올라 손님들이 가뜩이나 지갑을 안 여는데, 추석 대목은 벌써 물 건너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연중 대목인 추석 연휴를 앞두고 ‘태풍 힌남노 상륙’이라는 악재가 터지자 안 그래도 고물가와 소비침체로 신음하던 전통시장 상인들의 시름이 더 깊어지고 있다.
○ “침수 피해가 엊그제인데…”
동아일보 취재팀이 3, 4일 찾은 서울 전통시장 상인들은 “엎친 데 덮친 격”이라며 “10여 년 만에 최악의 추석 명절이 될 것 같다”면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지난달 폭우 당시 절반가량이 침수 피해를 입은 남성사계시장 상인들은 조금씩 되찾아가던 상가 모습을 태풍이 다시 짓밟아 놓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반찬가게 직원 A 씨는 “폭우 때 빗물이 가게에 차올라 침수된 냉장고를 전부 새 걸로 바꿨는데, 다시 태풍이 올라온다니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올 지경”이라고 했다.

지난달 8일 수해 당시 매장 31곳이 물에 잠긴 서울 강남구 영동전통시장도 사정은 비슷했다.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이모 씨(64)는 “수해로 가게 냉장고 6대가 망가졌는데 아직 수리를 못 해 장사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며 “태풍까지 온다니 장사를 시작한 후 12년 만에 맞는 최악의 명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해, 고물가, 경기침체로 소상공인들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4일 오후 서울 동작구 남성시장이 한산한 모습이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 “원가 올라 남는 것 없어”
“재료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제발 많이 달라고 떼쓰지 마세요(정말 너무너무 힘듭니다).”

4일 남성사계시장의 한 반찬가게 간판에는 주인의 절절한 심정이 적혀 있었다. 이 반찬가게 직원은 “손님들에게 ‘덤’을 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고물가로 인한 원가 부담이 전통시장의 미덕인 ‘덤’까지 사라지게 만든 것. 이 시장에서 건어물 가게를 운영하는 서인희 씨(59)도 “물가가 많이 오른 탓인지 시장을 오가는 손님들 장바구니가 대부분 비어 있다”며 “요즘 매출이 보통 추석 대목 때의 반도 안 되는 거 같다”고 하소연했다.
○ “거래처 사라지니 폐업할 수밖에”
수해, 고물가, 소비 침체의 ‘3중고’를 이기지 못하고 폐업하는 곳도 적지 않다.

영동전통시장의 한 도시락 가게는 지난달 8일 수해를 입은 뒤 폐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게로 들어찬 물은 빼냈지만 냉장고와 집기를 모두 쓸 수 없게 됐고, 영업을 재개할 만한 자금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같은 시장에서 1985년부터 운영했다는 식품·건어물 가게 주인 B 씨(75)도 “물가가 오르고 소비는 침체됐는데 설상가상으로 가게에서 재료를 사가던 동네 음식점마저 하나둘씩 문을 닫는 터라 나도 장사를 접을 생각”이라고 했다.

전통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재난지원금이라도 조속히 지급됐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상인은 “물난리가 난 직후 구청장, 국회의원도 왔다 갔고 피해액도 조사했는데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아무 조치가 없다”며 취재진에게 “추석 전 받으면 연휴 장사라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김윤이 기자 yunik@donga.com
유채연 기자 yc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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