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환수 돕고… 장애선수 지원… 게임사, 기부도 ‘MZ 스타일’

지민구 기자

입력 2022-09-24 03:00 수정 2022-09-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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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IT업계 이색 사회공헌 바람
매년 기부금 적립해뒀다가… 환수 문화재 나타나면 신속 매입
10년간 69억 규모 사회공헌… 콘서트 수익금 발달장애아 돕자
“선한 영향력 제대로 보여주자”… MZ세대 게이머들 앞다퉈 동참



《국외 문화재 환수, 오케스트라 콘서트 개최, 장애인 선수단 운영…. 국내 게임사들의 다채로운 사회공헌 활동들이다. MZ세대의 공감과 지지를 끌어내려는 게임사들의 창의적인 사업들에 대해 이용자들도 자발적 기부로 화답하고 있다. 》


게임업계, 사회공헌도 ‘MZ 스타일’로


올해 7월 27일 문화재청이 개최한 국외 문화재 환수 행사. 영국 법인이 경매로 사들인 뒤 되팔려 했던 조선의 보록(왕실 보물함)을 공개하는 자리에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온라인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롤)의 개발사인 미국 게임업체 라이엇게임즈가 자리한 것이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영국 법인으로부터 매입해 국내로 들여온 조선시대 보록(왕실 보물함). 게임업체 라이엇게임즈가 비용 등을 지원해 국내로 환수하는 데 성공한 6번째 문화재다. 각 사 제공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영국 고미술상에서 보록이 유통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지난해 12월. 가장 큰 문제는 매입 비용이었다. 영국 법인 측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빠르게 예산을 확보하고 절차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 이때 구원투수로 나선 게 라이엇게임즈였다. 매년 기부해 모아둔 기금으로 지원사격에 나서 문화재 환수 절차를 도왔다.

보록이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리그오브레전드를 즐기는 젊은 이용자들은 놀라며 환호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우리가 게임으로 애국한 것 아니냐”는 등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 “젊은 세대에 선한 영향 주는 사회공헌”
라이엇게임즈의 구기향 총괄은 2012년 2월 27일 라이엇게임즈 한국 법인에 출근하는 첫날부터 색다른 사회공헌 방안을 고민했다. 국내 대형 게임사와 정보기술(IT) 업체에서 사회공헌 업무를 담당하며 기부금 전달, 헌혈 행사 등에서 벗어나 철학이 담긴 사업을 구상해온 그녀였다.

당시 리그오브레전드에선 한국의 구미호 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캐릭터(챔피언)가 공개돼 이용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게임 속에서 캐릭터가 입은 한복 의상이 화제였다. 구 총괄은 리그오브레전드의 주 이용층인 10, 20대가 게임 속에 나오는 우리 문화유산에 흥미를 보인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2020년 기준으로 리그오브레전드의 이용자 평균 나이는 23세다.

“게임을 통해 젊은 이용자들이 우리 문화유산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구 총괄을 중심으로 라이엇게임즈는 게임과 문화유산을 연결 지을 방안을 검토하다가 문화재청과 협업을 시작했다. 2012년 6월 5억 원 후원 약정을 통해 조선시대 유물 보존 처리, 청소년 대상 문화유산 교육사업 지원 등으로 사회공헌 사업의 첫발을 뗐다.

국외 문화재 환수 지원 사업은 더 깊은 고민을 거쳐 시작했다. 전 세계 경매 시장에서 예고 없이 문화재가 나오고 이를 매입하려면 빠르게 예산을 집행해야 한다. 신중한 의사 결정 과정을 거쳐야 하는 정부나 공적 기관의 예산 집행 체계는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

“문화재청 측과 주기적으로 이야길 나누면서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민간 기업이 이 사업을 지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라이엇게임즈는 매년 기부금을 모아뒀다가 환수할 문화재가 나타나면 빠르게 예산을 집행해 매입할 수 있는 체계를 갖췄다. 처음 거둔 성과는 2014년 1월 미국 허미티지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불화 ‘석가삼존도’를 국내에 들여온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문화재 6건의 환수 사업이 라이엇게임즈의 지원을 받았다. 문화재재단이 해외 경매 시장, 박물관, 고미술상 등에 가서 환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인지 판단하기 위한 활동 비용도 라이엇게임즈에서 지원했다. 라이엇게임즈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전달한 기부금의 누적액은 68억7000만 원에 이른다.

리그오브레전드의 젊은 게이머들은 라이엇게임즈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유산을 접하고 호응했다.

“2020년 한복의 날(10월 21일)엔 리그오브레전드가 캐릭터가 전통 한복을 입은 모습을 한국화와 실제 사진으로 구현해 온라인 전시회를 열었어요. 이용자들이 ‘라이엇게임즈 덕분에 한복의 날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는데 날짜를 꼭 기억하겠다’고 댓글을 남기더라고요. 저희가 정말 바라던 반응이었죠.”

2015년 게임 속 캐릭터들을 민화로 그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전시했을 때도 젊은 관람객들이 몰려 대기 줄이 이어지기도 했다. 라이엇게임즈는 10년간 이어온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사회공헌 사업 주요 성과를 2분 31초 분량의 영상에 담아 지난달 3일 유튜브에 공개했다. 조회 수는 50여 일간 139만 건을 넘어섰다.
○ 서사가 있는 기부에 참여하는 MZ세대
인기 게임 로스트아크 개발사 스마일게이트RPG는 올해 6월 3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열었다. 게이머들은 스마일게이트가 콘서트 수익금을 모두 발달장애 청소년을 위해 쓴다는 소식을 듣고 자발적인 추가 기부에 나섰고, 목표 금액인 1000만 원을 훌쩍 넘는 6800만 원이 모였다. 각 사 제공
올해 6월 3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 인기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로스트아크’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콘서트가 열렸다.

로스트아크 개발사 스마일게이트RPG는 콘서트 티켓을 온라인에서 유료로 판매했다. 콘서트 수익금은 모두 발달장애 청소년 등을 위해 기부한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공개했다. 가장 좋은 좌석은 4만8000원. 1200여 석의 좌석은 온라인 예매 시작 1분 만에 매진됐다. 티켓 판매 시작과 함께 3만 명의 접속자가 모였으며 대기자는 5만3000여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 로스트아크를 즐기는 20, 30대 ‘MZ세대’ 게이머였다.

스마일게이트는 콘서트를 기획하며 스토리를 담았다. 단순히 수익금을 기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게임 이용자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안두현 지휘자에게 콘서트를 맡긴 것이 대표적이다. 안 지휘자는 발달장애 단원으로 구성한 ‘하트하트 오케스트라’를 재능 기부 방식으로 이끌고 있다.

스마일게이트 관계자는 “로스트아크 이용자들이 발달장애인을 위한 안 지휘자의 활동에 진정성을 느끼면서 콘서트에 더 큰 관심을 보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콘서트 실시간 중계를 유튜브 채널로 보는 게이머들에겐 ‘Y석(유튜브석) 관람자’라는 호칭을 붙였다.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지 못해 비대면 방식으로 공연을 즐기는 게임 이용자들도 존중하고 예우하자는 취지였다. 콘서트 중계 동시 시청자 수는 최대 21만 명이었고 영상의 조회 수도 187만 건을 넘어서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서사가 있는 이벤트에 MZ세대 게임 이용자들은 자발적인 기부로 화답했다. 스마일게이트가 발달장애 청소년의 음악 예술 교육 지원을 위해 6월 초 개설한 기부 페이지에는 7월 17일까지 752명의 게이머가 6800만 원을 기부했다. 스마일게이트의 목표 금액인 1000만 원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한 이용자는 유튜브 영상에 “이런 공연을 5만 원도 안 되는 티켓 가격으로 기획하고 심지어 수익금을 기부한다니, 기획 의도부터 구성까지 너무 좋다”고 적기도 했다.

게임업계에서 로스트아크 이용자들은 자발적으로 기부 활동에 나서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12월 25일 로스트아크 이용자들이 모인 커뮤니티엔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자”며 함께 돈을 모아 스마일게이트의 사회공헌재단에 기부하자는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로스트아크 운영진이 “연간 매출의 17%를 차지하는 게임 내 유료 거래 수단 서비스를 일부 포기하고 이용자들에게 되돌려주겠다”고 밝히자 이용자들은 기부로 보답하겠다는 취지였다.

게시글엔 기부 인증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각자 5000원부터 5만 원까지 금액을 낸 화면을 찍어 올리며 기부를 독려했고 1주일 동안 3억 원이 모였다. 스마일게이트 측은 이 돈을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아동과 청소년을 돕는 일에 사용했다.
○ “주류 문화에 오르길 원하는 게이머 욕구 반영”
엔픽셀이 창단한 장애인 선수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육상 선수 이원태 씨. 각 사 제공
모바일 게임 ‘그랑사가’의 개발사 엔픽셀은 지난해 9월 장애인 선수단을 창단해 운영하고 있다. 육상 5명, 수영 1명 등 6명의 선수가 속해 있다. 회사는 선수단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매달 급여를 지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훈련 용품, 상해보험, 건강검진 등의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엔픽셀은 게임업계와 장애인 체육계 안팎에서 ‘게임 스타트업이 왜 장애인 선수단을 운영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한다. 엔픽셀은 회사 블로그를 통해 장애인 선수단을 창단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엔픽셀은 글로벌 게임사로 발돋움하고자 도전하는 ‘스타트업’입니다. 그래서 장애인 선수들의 ‘도전’에 더 공감하고 응원하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MZ세대 게이머들이 새로운 사회공헌, 기부 문화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것을 두고 업계 안팎에선 게임을 ‘주류 문화’로 인정받길 원하는 욕구가 반영된 현상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강신진 홍익대 게임학과 교수는 “젊은 이용자들은 자신이 즐기는 게임을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자랑하고 공유하고 싶어 한다”며 “새로운 방식으로 대중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세련된 이미지를 구축하는 게임사들이 앞으로 더 주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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